신세대 힙합 물결: 해외 신예 여성 래퍼 10인
몇 달 전 열린 그래미 시상식의 결론은 여성 음악과 힙합이었다. 비욘세부터 찰리XCX, 채플 론, 사브리나 카펜터, 빌리 아일리시까지 모두 큰 족적을 남겼다. 난적을 숙청하고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켄드릭 라마는 그 기세를 슈퍼볼 하프타임 쇼로 이어가며 권세를 포효했다. 이 보수적인 시상식에서 주목할 만한 순간도 있었으니, 신인 래퍼 도우치(Doechii)가 로린 힐과 카디 비에 이어 세 번째 여성 래퍼로서 랩 앨범을 수상한 것이다. 현대 대중음악의 양축을 상징하는 발걸음이었다.
작년 디스전의 서막을 올린 니키 미나즈과 메간 디 스틸리온, 가장 영향력 있는 랩 스타로 떠오른 도자 캣 등 힙합 신의 중심에는 언제나 강력한 여전사들이 존재했다.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신인 여성 래퍼들 역시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 남성 중심의 힙합 헤게모니에서 벗어나 누군가는 트렌드를 타고 기적을 개척했고, 서로 교류를 확대하며 그 영역을 넓혀가는 중. 이미 대형 스타로 떠오른 이름들은 잠시 두고 이번에는 작년 앨범을 발매한 이들로 한정해 각양각색 매력을 갖춘 신세대 여성 래퍼 10인을 소개한다.
도우치(Doechii)
스스로 탄탄대로를 일궜다. 케이티 페리 등 대형 아티스트의 작품에서 서서히 이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지난해 발매한 < Alligator Bites Never Heal >은 결국 올해의 랩 앨범까지 거머쥐었다. 수상 직후 카니예 웨스트를 오마주한 싱글 ‘Nosebleeds’나 제니와 합작한 ‘ExtraL’로 먼 한국 땅에도 당돌한 이름을 알리는 중이니, 지금까지와는 한 차원 다른 글로벌 랩 스타의 등장이라고 할 만하다. 도우치의 특장점이라면 역시 의미 없이 분절된 가사를 뛰어넘은, 서사를 살린 맛깔난 ‘스토리텔링’. 나일강(The Nile)과 ‘Denial’ 발음의 유사성을 활용한 도도하고 톡쏘는 대표곡 ‘Denial is a river’은 자기의 경험담과 자신감을 섞어 자연스럽게 풀어냈고, 챌린지를 겨냥해 밈으로 확대할 구간까지 정성스레 마련해 두었다. 실력과 최신 유행을 모두 잡고 있으니 도도한 매력이 오래갈 수밖에. 그의 등장으로 전장에 진지한 긴장감이 감돈다.
글로릴라(Glorilla)
도우치가 성능 좋고 날렵한 해치백이라면 글로리아는 사륜구동 SUV다. 작년 앨범으로 좋은 성과를 낸 글로릴라 역시 이번 리스트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일단 카디 비와 릴 우지 버트를 가계도에 두고 있는 ‘랩 블러드’다. 특유의 발성으로 탄탄하게 < Glorious > 전체를 이끌어 가는 힘 있는 목소리가 인상적인데, 그와 비슷한 랩 스타일은 1990년대 케이알에스 원(KRS-ONE), 비기, 퀸 라티파 등에서 찾아야 할 정도로 희귀하다. 섹시 레드와 함께 꾸민 ‘Whatchu kno about me’나 ‘Queen of Memphis’와 같은 특유의 타격감 넘치는 래핑도 좋지만 티 페인이 피처링한 ‘I luv her’ 등 남성 보컬을 활용한 후반부가 특히 압권. 기존에 흔히 사용되는 ‘여성 보컬 & 남성 랩’ 피처링 규칙을 역전시키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랩 자체는 정직하고 투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안정감과 묵직함이 또 아웃도어 차량의 매력 아니겠는가.
섹시 레드(Sexxy Red)
헬스장에서 심박수를 올려줄 플레이리스트의 적임자, 현재 가장 ‘핫’한 스타,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의 ‘Sticky’나 드레이크의 ‘Rich baby daddy’ 등 대형 스타의 뱅어 트랙에도종종 이름을 올리는 세 번째 주인공은 섹시 레드다. 표현의 자유를 두세 차원 넘어선 선정적인 가사와 퍼포먼스는 분명 흥겨운 파티에 제격인 음악이다. 브루노 마스와 함께 한 ‘Fat juicy & wet’으로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중인 그는 실상 카디 비의 명맥을 잇고 있다. 단,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음악과 랩이 평가절하되는 일은 없도. 섹시 레드가 풀어가는 허스키한 서던(Southern) 힙합의 글씨체는 꽤 선명하기 때문. 평단의 호평을 얻은 2023년 < Hood Hottest Princess >, 스스로를 ‘Female Gucci Mane’이라 칭한 이 작품은 남부 힙합의 어지러운 분위기와 사운드, 리드미컬한 진행을 제대로 살렸다. 솔로로는 처음으로 차트 20위권에 든 ‘Get it sexxy’, 릴 베이비와 함께한 (그나마) 차분한 트랙 ‘Lick me’가 수록된 작년의 < In Sexyy We trust > 역시 마찬가지. 아이코닉한 스네어 사운드와 거침없는 폭격에 어느새 시야가 빨갛게 흐려진다.
제이티(JT)
알앤비 듀오 씨티 걸스 출신의 제이티 역시 작년에 첫 솔로 음반 < City Cinderella >를 발매하며 참전했다. 제이티는 앞선 셋보다는 유연하고 말랑말랑한 스타일로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 랩이 꼭 빠르고 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몸소 실천 중, 그룹 시절 다채로운 알앤비 비트 위에서도 자주 랩을 뱉었던 만큼 그 안정감이 인상적이다. 여유로운 무드의 ‘90’s baby’를 들어보면 급변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자기 속도를 잃지 않고, 일정한 톤으로 정해진 시간을 이끈다. 도시 신데렐라에 걸맞은 품격 있는 래핑은 곡의 특성에 맞는 후렴구 창작에서 더 빛을 발하는데, 간만에 트랩 대부 지지(Jeezy)를 만날 수 있는 ‘Okay’에서 제이티는 고풍이 넘치고 ‘JT coming’에 써 내린 반복적인 쾌감도 매혹적이다. 솔트 앤 파파의 ‘Push it’과 마이애미 사운드를 한 곡에 녹인 ‘Uncle AI’에 이르면 힙합 클럽에 입성한 랩 신데렐라의 모습을 차례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음반 전체적으로 흡인력이 상당한 수작.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라토(Latto)
정국의 글로벌 히트 넘버 ‘Seven’으로 이름을 함께 알린 라토는 미국판 쇼미더머니 < The Rap Game > 첫 우승자 출신이다. 미스 물라토라는 이름을 짧게 줄인 것처럼 데뷔 음반 < Queen Of Da Souf >는 자욱한 트랩의 영향력 아래 간결한 애틀랜타 힙합 색채를 물씬 풍긴다. 신인 10인 래퍼에 올리기에는 경력도 오래되었고 약간의 변형과 현대화를 거친 시점이지만 작년 < Sugar Honey Iced Tea >는 작년에 빼놓을 수 없는 랩 작품 중 하나다. 마치 어둑한 장막 앞에서 나누는 진지한 대화처럼 긴장감 가득한 비트 위 조곤조곤 언어가 움직이는 형태가 매력적이다. 피아노 아르페지오 위 ‘Big mama’부터 카디 비가 목소리를 얹은 ‘Put it on da floor again’이나 ‘Blick sum’과 같은 어둑한 레이지 비트 활용법까지. 전보다 라토의 완성도와 진중함이 분명 높아졌다. ‘정국 피처링’ 단편이 아니라 앨범 속 라토는 분명 긴 호흡이다.
아이스 스파이스(Ice Spice)
가장 급격하게 주도권을 잡았다. 아이스 스파이스는 ‘Munch (Feelin’ u)’의 바이럴 히트, 첫 탑 텐 싱글 ‘Princess Diana’, 핑크 팬서리스와 함께 한 ‘Boy’s a liar pt.2’를 연이어 폭격하며 금세 대형 스타 반열에 올랐다. 영화 < 바비 > 사운드트랙 중 가장 상징적인 ‘Barbie world’를 니키 미나즈와 함께 맡고 급기야 테일러 스위프트의 ‘Karma’에 피처링으로 발탁되기까지 하며 물 들어올 때 성실하게 노를 저었다. 그래도 본업은 팝 스타보다는 힙합. 아이스 스파이스의 랩은 ‘Deli’나 ‘In ma mood’, ‘Gangsta boo’와 같은 대표곡에서 보이듯 차분함과 담백함이 포인트다. 타 아티스트와 잘 어울릴 수 있는 넓은 적용력을 갖춘 랩으로, 뭇 스타들이 그를 찾는 이유가 명확하다. 지난해 발매한 < Y2K!: I’m Just A Girl > 역시 진한 색. 트래비스 스캇 스타일에 맞춘 ‘Oh shhh…’ 등 트랩, 센트럴 씨의 합류로 총소리 가득한 ‘Did it first’부터 ‘Hannah Montana’로 이어지는 저지 클럽 흐름. 이름값이나 음악이나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중력을 지녔다.
플로 밀리(Flo Milli)
독특한 아티스트다. 통통거리는 하이 톤의 랩은 자칫 도자 캣의 아류처럼 느껴질 수지만, 붉은 악마보다는 말괄량이에 가까운 음성과 분위기가 플로 밀리의 윤곽선을 특정한다. 플레이보이 카티 ‘Beef’를 커버한 ‘Beef Flomix’가 초기 바이럴 시장의 선택을 받으며 본격적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생각 외로 작가주의 래퍼로서 성장했다. 데뷔작 < Ho, Why Is You Here ? >를 시작으로 2022년 < You Still Here, Ho? >, 이듬해 < Fine Ho, Stay >로 ‘Ho 트릴로지’를 완수한 플로 밀리는 재치 있는 연속 앨범 속 다채로운 변화를 꾀했다. ‘Like that bitch’와 같은 앙칼진 래퍼의 가시를 가장 처음에 내보였다면, 다음 작에서는 리얼리티 쇼 형식을 앨범에 덧씌웠고 ‘Bed time’과 ‘Big steppa’ 등 랩 형태 자체도 꽤나 다듬었다. 가장 최근작에서는 시저(SZA), 카디 비와의 합작 ‘Never lose me’로 드디어 히트곡을 거머쥐기까지. 빛나는 기획력과 반짝거리는 생각을 보니 분명 쥐고 있는 카드가 많은 래퍼다.
레이 뱅크즈(Lay Bankz)
미국의 대표적인 힙합 매거진 < XXL >은 차세대 힙합 스타 ‘XXL 프레시맨 클래스’를 매년 선정한다. 2024년의 리스트 중에 ‘레이 뱅크즈’라는 이름이 특히 눈에 걸렸고 음악은 귀에 더 걸렸다. 소울의 성량과 랩의 강세 듀얼 코어를 동시에 갖춘 신예의 등장이 오랜만인 덕분, 작년 봄에 발매한 < After 7 >의 구성과 면면이 흥미롭다. 어셔나 티 페인 스타일의 신시사이저 양식에 매력적인 멜로디를 얹은 ‘Tell ur girlfriend’를 시작으로 ‘Would you?’까지 보컬적 역량을 마음껏 뽐내고 ‘2Bad’에서는 깔끔한 싱잉 랩으로 이어간다. 반전의 후반부는 멜로딕한 분위기를 뒤엎으며 랩을 쏟아내고 본인을 래퍼의 틀에 밀어 넣는다. 물론 ‘Tongue out freestyle’에서 보이듯 아직 단순한 라임, 입으로 내는 효과음이 불균등하게 나열되는 등 개선의 여지도 곳곳에 있지만 불확실성, 기대감,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게 유망주의 본질 아닌가.
코이 르레이(Coi Leray)
뉴저지 출신의 코이 르레이 역시 2021년 XXL 프레시맨 클래스 출신 ‘핫 루키’였다. 그러나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는 프리스타일 사이퍼에서 쭈뼛쭈뼛한 자기 어필로 상장과 동시에 하한가를 찍기도 했다. 분위기 반전은 숏폼, 2023년 ‘Cause girls is players too’라는 능글맞은 플로우가 담긴 ‘Players’가 SNS의 파도를 타고 전 세계로 전파된 것이다. 굵직한 히트곡을 남긴 사실 하나만으로도 유리한 출발점에 놓였고 눈에 띄는 변곡점도 꽤나 많다. 본인의 대표곡이 수록된 < Coi >의 오프너 ‘Bitch girl’에서는 전설적인 팝 듀오 홀 앤 오츠의 ‘Rich girl’을 재치 있게 샘플링했고, 메트로 부민이 지휘한 <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 사운드트랙에도 동승, 의외로 K팝 아이돌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Happy fools’에 목소리를 싣기도 했다. 확연한 우상향 그래프 속 올해 2월 발매한 < What Happened To Forever?>에서도 간결하게 다듬어진 코이 르레이를 만나볼 수 있다. 역시 구체적인 ‘플레이어’로 성장 중이다.
오드리 누나(Audrey Nuna)
이번 리스트의 유일하게 다른 인종 오드리 누나는 한국 이민자 2세 래퍼다. 본명인 오드리와 한국어 ‘누나’의 합성어로 만든 닉네임처럼 태어나자마자 불가피하게 얻은 타자로서의,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갖게 된 이가 랩과 음악으로 삶을 풀어낸다. 얼터너티브 힙합과 알앤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성향 역시 성장기로부터 왔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트로트부터 K팝과 냉면 취향을 얻었고, 거주지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따라 자연스레 켄드릭 라마와 카니예 웨스트의 영향권에 놓였다. 작년 발매한 < Trench >를 재생해보면 다양한 양식을 확인해볼 수 있다. ‘Mine’에는 양옆으로 너울대는 사운드의 파도가, ‘Jokes on me’에는 얇은 목소리로 풀어내는 미국식 한(恨)이, ‘Locket’에는 툭툭 던지는 Z세대의 래핑이 여러 모양으로 새겨져있다. 동양인으로서 당당히 힙합 본토에 깃발을 꽂은 ‘누나’가 과연 신의 깊은 중심에도 진입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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