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진 & 툴라(TULA) 인터뷰
정여진
툴라(TULA)
이름은 몰라도 목소리는 들으면 안다. 포카리스웨트, 서울사이버대학교 같은 각종 광고와 < 요술공주 밍키 > 주제가, < 카드캡터 체리 > 오프닝 ‘Catch you catch me’ 등 정여진은 한국 방송 매체의 역사를 수놓았다. ‘얼굴 없는 가수’로서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던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9년 말의 일. < 파워 디지몬 >의 엔딩곡인 ‘To my wish’를 부르는 영상과 함께 시작한 그의 유튜브 채널은 순식간에 젊은 세대의 추억 소환 놀이터가 되었다.
활동을 재개한 지 어느덧 5년, 그동안 그는 각종 공연과 펀딩을 통한 앨범 제작 활동을 진행하며 음악가로서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했다. 미디어 노출은 아직도 최소화하기에 인터뷰 인원 모두 만화 속의 인물을 실제로 만나는 기분으로 현장에 모였다. 이날은 특별히 애니메이션 음악과 CM송 가수의 길을 같이 걷고 있는 남동생 툴라(TULA, 본명 정재윤), 그리고 현직 가수로서 유튜브 채널 제작을 전담중인 올케 나오미가 함께해 자리를 더욱 빛냈다.

몇 년 전부터 유튜브에서 정여진은 ‘노래하는 정여진TV’, 툴라는 ‘열혈툴라 [TULA]’ 채널을 개설해 음악 영상을 올리고 있다. 이외 근황은 어떻게 되나.
정여진: 꾸준히 유튜브 활동을 하면서 지금은 4월 19일에 예정된 콘서트 ‘AniBirthday to You’ 준비하면서 연습 중이다. 작년에는 ‘THE BEGINNING’이라는 공연으로 오랜 팬들을 위해 내가 어렸을 때 녹음했던 곡을 선보였다면, 이번에는 소위 ‘투니버스 세대’를 위해 성인이 된 이후 불렀던 애니메이션 주제가로 구성했다.
유튜브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것인가?
툴라: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젊은 친구들에게서 애니메이션 음악 얘기를 많이 듣기도 하고 불러달라는 요청도 받는다. 누나가 평소에 앞으로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방송 섭외도 대부분 잘 받지 않았는데 그래도 유튜브는 우리 생각대로 꾸릴 수 있겠다 싶어서 제안하게 되었다. 지금도 누나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고 있다.
정여진: 그냥 가볍게 하다가 공연 한 번 여는 것 정도만 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그 덕에 지금은 콘서트도 계속해서 기획하는 중이다.
댓글창에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태어난 또래들이 추억을 많이 이야기한다.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
정여진: 고맙기도 하고 미안함도 있다. 사실 나는 녹음할 당시에는 그렇게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나이도 만화영화를 볼 시기도 지났으니 극에 대한 이해 없이 그냥 노래로만 대했는데 그런 내 목소리에 애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노래를 다시 부르는 지금 오히려 애니메이션 음악에 더 깊게 다가가는 중이다. 당시는 그냥 감독이 원하는 방향을 착실하게 따랐다면 이제는 내 관점에서 그때의 아쉬웠던 점을 보완하고 있다. 물론 원본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왼쪽부터 나오미, 툴라, 정여진
정여진의 아이덴티티는 역시 아련함이 묻어나오는 음색이다. 그렇지만 여러 커버곡을 보면 분명 단단하고 힘있는 목소리임을 느낄 수 있다.
정여진: 광고든 애니메이션이든 보통 의뢰가 들어오는 게 예쁘고 깨끗한 쪽이라 그렇게 갔는데 에너지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다니 뿌듯하다. (웃음) 동시에 내 목소리에 약간은 구슬픔도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의 한이랄까.
정여진은 본인이 봐도 잘 불렀다 싶은 노래는 어떤 곡이 있는지 묻고 싶다.
정여진: 광고음악에서는 역시 ‘포카리스웨트’. 교수님 녹음실에서 불렀는데 내 버전이 계속 쓰이고, 예능에서도 자주 나오는 덕분에 CM송에서는 흔치 않게 가수 이름이 알려졌다. 참고로 밴드 두번째 달의 김현보가 작곡한 노래다.
애니메이션에서는 < 슈퍼갤즈 > 엔딩곡인 ‘끌어안고 싶어’를 뽑고 싶다. < 빨강머리 앤 >은 노래는 굉장히 예쁜데 그때 내가 중학교 다닐 적이라 변성기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 지금 부른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끌어안고 싶어’는 2023년 펀딩을 통해 제작한 < Happy Ending >에 수록하기도 했다.
툴라: ‘그래 그래’(< 미소의 세상 >), ‘비 갠 후에’(< 기동천사 엔젤릭 레이어 >), ‘Boy meets girl’ (< 다! 다! 다! >), ‘칵테일’(< 추리게임 뫼비우스의 띠 >)을 더해 총 다섯 곡을 실은 앨범이다. 다 엔딩곡이라서 제목도 이에 맞춰 지었다. 원래는 프로젝트 후원자들과의 약속으로 1년 후에 음원을 발매하려고 했는데 여차저차 미뤄져서 2주년에 맞춰 스트리밍 플랫폼에 공개하기로 했다. 이번 ‘AniBirthday to You’도 음원 공개 기념 공연이라 3개로 나눈 무대 중 하나를 < Happy Ending > 섹션으로 마련했다.

작곡가 정민섭(진주 인물열전 中)
정여진을 인식하는 방식은 세대마다 다를 것이다. < 슈가맨을 찾아서 >에서도 출연해 부른 ‘아빠의 말씀’을 비롯해 < 마루치 아라치 >, < 똘이장군 > 등 1970년대부터 극장 애니메이션 음악을 불러온, 긴 커리어를 지닌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는 아버지 작곡가 정민섭과 어머니 가수 양미란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을 터. 정민섭은 상술한 각종 만화영화 주제가 외에 ‘여고 졸업반’(김인순), ‘곡예사의 첫사랑’(박경애)과 같은 대중가요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중에는 뮤즈와도 같았던 아내 양미란의 ‘흑점’도 있다.
두 정씨 남매 또한 부모님의 유산을 열심히 가꿔오고 있다. 2022년부터 시작해 작년 제3회를 맞이한 ‘정민섭 음악제’를 진주에서 개최하며 그가 남긴 수많은 명곡을 무대에서 되살리는 중이다. 이날 인터뷰 또한 자연스레 부모님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버지 정민섭을 어떻게 기억하나.
툴라: 지금은 보컬 쪽이지만 원래는 나도 아버지처럼 작곡가를 꿈꿨던 사람이다. 작곡가로서 아버지는 특정한 모티브를 가지고 테크니컬하게 만들어내는 분이셨다. 부지런하고 성실하신 프로페셔널로서의 아버지를 높게 평가한다. 월드뮤직까지 참고할 정도로 음악적 탐구심이 많은 동시에 장르로만 접근하지 않고 한국적인 멜로디를 결합하는 유연함까지 갖춘 사람이었다는 것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정여진은?
정여진: 노래하는 어린이를 찾고 계시던 아버지께 어머니가 “당신 딸이 여기 있는데 무슨 고민을 해?” 하시면서 내 유년기 가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국과 태국 합작 공포영화 < 악어의 공포 > 삽입곡 ‘엄마 아빠 나 좀 보세요’가 첫 녹음이었다.
기억나는 루틴이 있다. 밤새 작업을 하신 아버지가 나에게 아침에 악보를 건네시고 녹음실로 가서 반주를 만지시면 내가 노래를 익힌 후에 가서 녹음하는 식이었다. 특별히 칭찬을 듣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작업이 끝나면 저녁으로 맛있는 것을 먹고는 했다. (비단 말로 안 하셨어도 그 자체가 칭찬이다) 갈비나 경양식 함박스테이크 같은 메뉴였으니 정말 그랬나 보다. (웃음)
그렇다면 정여진의 첫 번째 히트곡은 무엇일까.
정여진: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는 합창단 버전이 먼저 유명해졌으니 내 명의로는 < 똘이 장군 >인 셈이다. 여기까지가 극장 영화라면 이후에 TV 애니메이션 시대가 시작되면서 < 빨강머리 앤 > 같은 작품으로 대중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는 드라마 < 응답하라 > 시리즈에도 나왔던 < 요술공주 밍키 >가 제일 생각난다.
배우 최불암과 함께한 ‘아빠의 말씀’도 빼놓을 수가 없다. ‘우리 엄마’ 처럼 어릴 때 불렀던 노래들이 가족적인 색채가 꽤 있는데.
정여진: 원래는 제목처럼 정말 아버지와 하려고 했던 노래였는데 조금 인지도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느끼신 아버지가 최불암 선생님께 부탁했다. ‘우리 엄마’는 굉장히 슬픈 곡이라 부르면서 나도 눈물 지은 기억이 난다.
마침 묻고 싶다. 어머니 양미란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지.
정여진: 곡을 주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알앤비 쪽의 색을 가지신, 나와는 정반대로 정말 연예인처럼 사셨던 분이다. 사실 당시의 추억보다는 ‘정민섭 음악제’를 준비하면서 군부대 공연 등 자료를 많이 찾아보며 그때는 몰랐던 어머니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후에 CM송과 애니메이션 가수가 된 것은 어떠한 흐름에서였나?
정여진: 어릴 때부터 노래를 불렀으니 당연히 내가 가야 할 길은 가수라는 생각으로 앨범을 준비했다. CM송은 그 과정에서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맡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성격상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어려워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광고음악을 하자마자 ‘딱 이거다’ 싶었다. 환경 자체도 익숙했던지라 녹음실이 편하고 무대에 대한 부담감도 없었다.그렇게 CM송 업계로 진출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애니메이션까지 이어졌다.
일반적인 가수로서 활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조금은 있을 것 같은데.
정여진: 그런 마음이 전혀 없이 살았다가 최근에 바뀌었다. 유튜브 활동 시작 이후 올림픽공원에서 개최한 첫 공연에서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불러주는 어린 친구들을 보니 떨리는 마음이 사라지고 힘이 나는 것이다. 그런 경험이 생기니까 옛날에도 내가 무대 위에서 잘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조금 들긴 했다.
소심한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적극적이지 못한 성격 때문에 물러난 경우가 있다. 최진실 주연의 영화 < 편지 > 사운드트랙으로 ‘Too far away’라는 곡을 불렀는데 영화제 축하공연 요청을 부끄럽다는 생각에 거절했다. 지금 보면 그런 게 아쉽다. 그래도 2020년대 유튜브를 통해 활동을 재개하고 공연까지 이어가면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툴라: 그때 흔히 생각하는 가수의 길을 택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도 있다. 무대 위에서 볼 수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더 선명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정여진도 근래 나온 음악을 커버하면서 소통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젊은 가수 중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인물이 있나?
정여진: 윤하가 돌아왔을 때 정말 반가운 마음에 ‘사건의 지평선’을 커버하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도 < 블리치 > 일본판 엔딩곡 ‘혜성’을 세트리스트에 넣을 예정이다.
여담이지만 영화음악 중에 신해철이 음악감독을 맡은 < 정글 스토리 > 사운드트랙으로 ‘아주 가끔은’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여진: 대학 선배였던 류금덕과 함께 부른 곡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목소리가 조금 여린 보컬을 찾다가 CM송 쪽을 타고 나에게 연락이 왔던 것 같다. 홍대 앞에서 만나 직접 설명까지 들었는데 정말 영광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라 작년 ‘THE BEGINNING’ 콘서트 때도 툴라와 올케 나오미까지 셋이 같이 불렀다.
이즘의 공식 질문이다. 부모님 외에 정여진을 음악의 길로 인도한 작품이나 아티스트는 무엇인가?
정여진: 어렸을 때 김현철, 박학기 등 동아기획 소속 아티스트의 음반을 좋아했다. 김현식을 특히 좋아해서 매일같이 4집 첫 트랙 ‘언제나 그대 내 곁에’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는 했다. 들국화와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 또한 많이 들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공연 코러스로 연습 때 직접 만난 적도 있다.

해외 음악도 많이 접했을 것 같은데.
툴라: 누나가 듀란 듀란, 그 중에서도 사이먼 르 봉의 팬이었다.
정여진: 얼굴이 잘생기기도 했지만 음악도 분명 뛰어났다. (웃음)
툴라: 의외로 누나가 헤비메탈도 좋아했다. 주다스 프리스트, 나중엔 잉베이 맘스틴을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정여진: 날 너무 그런 쪽으로 몰아가는 거 아니야? (웃음) 잉베이 맘스틴은 어쩌다 보니 작년에 내한공연도 보러 갔다.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도 참 좋아한다.
아버지 정민섭 작곡가 곡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말해달라.
정여진: ‘곡예사의 사랑’. 가수 입장에서 욕심이 나는 곡이라 제3회 정민섭 음악제에서도 이 노래를 불렀다.
진행: 임진모, 손민현, 임동엽, 한성현, 정기엽, 신동규
정리: 한성현
사진: 정기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