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힙하게, 더 여유롭게!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24’

by IZM

2024.10.30

익숙한 공간에서의 낯선 경험. 지난 10월 2주 서울 대중음악 페스티벌의 명소 올림픽공원에서 < 제6회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24 >가 개최되었다. 이름부터 바쁘디바쁜 현대사회의 정반대를 지향하는 콘셉트, 그리고 매혹적인 라인업. 도심 속 느긋한 삶과 여유로운 라이브를 지향하는 이 ‘힙’한 축제는 계절을 즐기기에 가장 적합한 행사로 자리매김 중이다. 감각적인 라인업과 부담스럽지 않은 즐길 거리를 균형감 있게 섞은 ‘슬라슬라’ 현장은 뜨거운 열기보단 선선한 가을바람에 가까웠다.


타임테이블부터 정체성이 뚜렷하다. 첫날은 한반도 밖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스타들의 무대로 진하게 꾸며졌다. 래퍼 오드리 누나(Audrey Nuna), 해외에서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DJ 페기 구와 예지(Yaeji)가 무대를 채웠다. 두 번째 날은 정의(定義)를 부정하는 종합 예술 집단 바밍타이거, 시대의 록스타 실리카겔, 빌보드 차트까지 호령한 88라이징 소속의 호주계 일본 아티스트 조지(Joji) 등 초감각을 지향한다. 더 큰 이름을 원한다면 끝으로 가보자. 한반도에서도 아이유 ‘팔레트’와 함께 붐을 일으킨 코린 베일리 래와 현대 무드음악의 현신 혼네가 방문해 일요일의 허기를 달랬다.




수가 적다고 농도가 낮지는 않았다. 장르에 얽매이지 않은 ‘힙’한 라인업이 분명 이 파티의 핵심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차트나 앨범 판매 성적보다는 한 사람의 플레이리스트와 SNS를 넘나들며 나만의 특색을 지향하는 시대에 최적화다. 장르 페스티벌, 클럽, 잔잔한 레코드 바에서 흘러나올 법한 음악 모두 ‘슬라슬라’에 나타나 개인의 취향을 공략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만의 유행 최전선에 있는 음악, 하나하나의 개성이 현장에 모여 형성하는 ‘슬라슬라’ 전체의 인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무대나 현장의 분위기도 지향과 맞닿아 있었다. 메인 무대의 크기를 줄이고 널찍하게 만든 피크닉 존, 누구나 자유롭게 앉을 수 있는 야외용 책상과 의자, 과하지 않은 먹거리와 음료 판매처, 음악을 즐기는 이들의 시선과 귀를 억지스럽게 사람들을 잡아끌지 않는 이벤트 부스. 즐길 것만 즐기자는 마음으로 간추린 라인업에 어울리도록 행사를 뒷받침하는 요소들 역시 가볍게 펼쳐져 있었다. 양껏 놀기보다는 편히 즐길 수 있는 환경이다. 곁가지는 쳐내고 핵심이 단단한 페스티벌, 내년 소식을 기대하며 인상 깊었던 몇 가지 무대 리뷰도 함께 전한다.




오드리 누나(Audrey Nuna)

독특한 음색 정도의 첫인상을 매력적인 솔직함으로 치환한 공연이었다. 한국계 미국인 싱어송라이터이자 래퍼 오드리 누나는 데뷔 앨범 < A Liquid Breakfast >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자리 잡은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아티스트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자신의 음악을 듣는 이가 모두 남동생처럼 느껴지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한국어 ‘누나’를 예명으로 삼았고, 모국에도 자주 방문하며 뿌리와 멀어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런 그가 슬라슬라에는 더 강렬한 에너지를 갖고 돌아왔다. 현장의 분위기를 뒤바꿀 만큼 범상치 않은 등장이었다. 


해가 창창한 오후의 첫 무대, 그리고 얇은 디스코그래피의 신예에게 이만큼 열광할 줄이야. ‘Rocket’이나 ‘Idgaf’처럼 끊어 치는 스타일의 랩으로 분위기를 휘어잡더니 ‘Baby blues’나 ‘Starving’과 같은 곡에서는 매력적인 보컬도 여실히 뽐냈다. 최근 발매작 < Trench >에 수록된 ‘Mine’ 등에서는 독특한 소리 배치를 선보였고, 강렬한 몸놀림과 호응 유도로 볼거리도 쏠쏠히 챙겼다. 작은 체구에서 분출하는 음악과 무대를 향한 진심이 스피커를 뚫고 무대 끝까지 전달되는 광경. 한국 동생들에게 ‘누나’를 더 깊게 각인한 순간이었다. (손민현)




예지(Yaeji)

국내에도 마니아가 많지만, 한국계 미국인 뮤지션 예지의 전 세계적 위상은 실로 드높다. 2017년 두 장의 음반을 통해 “BBC Music Sound of 18”으로 주목받은 그는 2023년 < With A Hammer >를 통해 작가주의 인증서와도 같은 “피치포크 선정 2023년의 명반 50선” 23위에 오르기도 했다. 매우 감각적이고도 후크가 분명한 하우스 뮤직으로 전 세계적 호평 받은 < With A Hammer >가 88잔디공원에서 한국 관객들에게 전이된 순간, 아직 수줍은 소녀 같던 예지가 카리스마 넘치는 퍼포먼스로 180도 돌변했다. ‘In the mirror’에서의 댄서들의 전위적인 안무를 곁들인 ‘In the mirror’와 중동적 음률의 ‘Booboo’, 말 그대로 크레이지했던 ‘Michin’에서 모두 그랬다.


공연 말미 예지는 눈물을 흘리며 한국 공연에 대한 감격을 표출했다. 유럽 중심 막대한 지지를 받는 디제이 겸 프로듀서도 자신의 문화적 근간이 되는 장소와 관중과의 교감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얼굴이 그려진 스크린을 망치로 깨는 도입부 퍼포먼스의 ‘Raingurl’처럼 “타파의 음악”을 견지한 예지는 극복하고 싶은 자신의 과거를 깨뜨리고, 각종 구습 및 관성을 깨부순다. 하지만 분노에서 그치지 않고 성찰과 내면 성숙으로 이어진다. 섬세와 광기를 오갔던 슬라슬라 2024 속 예지의 무대는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셀프 요법이자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격려 메시지였다. (염동교)




페기 구(Peggy Gou)

전자음악이 울려 퍼진 금요일의 잔디밭은 그야말로 전장(戰場)이었다. 알이 작은 선글라스를 낀 서로 다른 페기 구가 삼삼오오 5호선 마천행 열차를 타고 올림픽공원으로 행군을 시작하더니, 비밀 지령을 받은 특수부대는 ‘서울시 페기구’ 등의 구호가 적힌 제복을 입고 각자의 위치에 배치되었다. 공연 현장은 그야말로 일개 군단의 운집. 야밤 작전이 시작되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몸을 흔들었다. 음악, 빛, 댄서, 관객 모두를 통제하는 DJ 부스의 사령관 페기 구의 지휘 아래였다.


무용수와 날카로운 전자음을 앞세워 능란하게 열기를 내뿜기도 하지만 페기 구의 정수는 단연 절제미다. 얌전한 피아노 멜로디와 정직한 하우스 리듬이 형성하는 어딘가 몽환적인 아우라 아래 관객들은 조심스레 욕망 자제와 분출 사이 선택의 길에 놓였다. 주제가 ‘(It goes like) nanana’와 ‘Starry night’가 대표하는 내적 흥의 미학이다. 최근 정규 앨범 < I Hear You >에 수록된 독특한 컨셉의 ‘Lobster telephone’에 모두가 ‘똑같애’를 외칠 때 절정에 이르고 개별성은 소거되어 모두 하나가 되었다. 음악을 넘어 패션부터 삶의 양식까지. 하나의 독보적 아이콘으로서 페기 구의 현재가 보였다. (손민현)




코린 베일리 래(Corrine Bailey Rae)

중학교 2학년의 ‘Put your records on’을 잊지 못한다. 2007년 그래미 “올해의 노래”와 “올해의 레코드” 후보까지 올랐던 이 명곡은 2000년대 부드럽고 달콤한 알앤비의 표본이었다. 2000년대 후반 이후 대중과의 접점이 옅어졌으나 코린은 넉 장의 정규작을 통해 자기 색 뚜렷한 음악을 구사했고 특히 2023년 9월 발매한 < Black Rainbows >는 록과 재즈를 엮은 실험적 사운드스케이프로 호평받았다. 이날 공연에도 전위적인 일렉트로니카 ‘He will follow with his eyes’와 펑크(Punk) 록 넘버 ‘New York transit queen’, 8분여의 긴 호흡으로 소통한 ‘Put it down’ 같은 < Black Rainbows > 수록곡을 선보였다.


모두가 후렴구를 따라 부른 ‘Put your records on’과 후반부 어쿠스틱 기타를 멘 채 연주한 ‘Like a star’는 한국 관객들에게 선물로 다가왔다. 2006년을 지냈던 이들에겐 당시의 정서를, 작금의 청춘에겐 지금 들어도 참 멋들어진 이지리스닝 알앤비를 만나본 순간이었다. 2006년도 데뷔작 < Corinne Bailey Rae >에서 상기한 두 곡과 더불어 사랑받은 ‘Trouble sleeping’에선 직접 무대에 내려와 관객과 같은 눈높이로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단콘에 흡사한 90분여간 전성기 히트곡과 실험적 근작을 아우른 코린 베일리 래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정진하는 아티스트임을 이번 슬라슬라 2024를 통해 증명했다. (염동교)




혼네(HONNE)

‘Living next door to Alice’와 ‘What can I do’로 1970년대와 80년대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국 록밴드 스모키처럼 현재 한국 젊은이들이 영국 일렉트로 팝 듀오 혼네에게 건네는 성원과 지지는 절대적이다. 앤디 피터 클러터벅과 제임스 윌리엄 해처 두 청년이 펼치는 감각적이고 몽환적인 사운드스케이프는 감각성과 경향성, 친밀성 세 차원에서 한국 관객들을 움켜쥐었다. 제임스가 한국에서 등산을 즐긴다는 공연 중 농을 칠 만큼 자주 한국을 찾는 이들은 어느새 국내 페스티벌의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매김했다.


혼네의 꿈결 같은 연주가 축제의 마지막 밤을 물들였다. 신보 < Ouch > 앨범 아트에 그려진 캐릭터 설치물과 사랑스러운 백드롭의 무대 연출을 기한 이들은 루 리드의 ‘Walk on the wild side’를 상기하는 ‘Happy day’과 부들부들한 멜로디에 힙합 비트를 결합한 ‘Lean on me’ 등 신보 수록곡을 소개했다. 후반부엔 물론 팬들이 사랑하는 ‘Day 1’과 ‘Warm on a cold night’, ‘No song without you’ 같은 대표곡들도 빼놓지 않았다. 플루트와 색소폰의 브라스 사운드와 백 보컬의 보컬 하모니로 풍성한 시간을 꾸린 혼네와 한국 관객들과의 애착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염동교)




정리: 손민현, 염동교

사진: 프라이빗 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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