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한글 가사의 노래들

by 임진모

2024.10.09

해마다 추석, 고향, 여행이 연관되는 계절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전파를 수놓는 명곡 ‘향수’ 하면 이동원과 박인수의 서로 다른 발성과 음색이 일궈낸 크로스오버 하모니, 천재작곡가 김희갑의 광채를 발하는 선율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지금은 소멸 위기를 맞은 아름다운 옛 우리말 가사를 빼놓을 수 없다. 이동원이 김희갑선생을 찾아가 곡을 의뢰한 것은 1927년 정지용의 시어(詩語)들에 흠뻑 매료되어서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옛말이지만 너무도 정겹고 고유한 한글, 이를테면 1절에 등장하는 ‘지즐대면’, ‘휘돌아나가고’, ‘얼룩배기’, ‘해설피’ 뿐만 아니라 ‘짚베개’, ‘풀섶 이슬’, ‘함추름’, ‘귀밑머리’, ‘성길 별’ 등 즉각적으로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말맛을 느끼는 언어들이 전편을 휘감는다. 




이런 한글 어휘들이 부를 때도 들을 때도 감동을 자극하는, 가요역사에 빛나는 명작을 주조한 원천임은 물론이다. 이 가을철에 미디어를 잠식하는 또 하나의 명곡 바리톤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향기로운 우리말이 소박한 사랑의 감정을 부추긴다.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곡을 들으면서 이 코러스 파트가 등장하면 너나할 것 없이 따라 흥얼거리는 것은 그만큼 노랫말이 멜로디와 어우러져 잘 배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원래 노르웨이의 여가수 원곡이고 ‘시크릿 가든’이 ‘Serenade to spring’(봄을 향한 세레나데)란 제목으로 연주한 곡임을 전제하면 작사가 한경혜의 한글 개사는 놀랍다. 둔갑술이다.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한가요..’ 작사의 레전드 양인자 가사, 이선희 노래 ‘알고 싶어요’처럼 우리글은 살 떨리는 사랑의 감정 표현수단으로도 최상급이지만 이별의 언어로도 공감의 지고(至高)성을 발휘한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이소라 작사 노래 ‘바람이 분다’) 


세계화, 미국화라는 말이 시사하듯 지금도 위력적인 서구에 대한 갈망과 동경이 저류하면서 한국의 대중가요가 갈수록 우리말 대신에 외국어들이 판을 친다. 랩과 힙합의 득세 그리고 K팝의 강한 존재감은 세계로 뻗어간다는 명제 아래 더더욱 아름다운 한국어에 대한 국민적 자긍이 약화되어 간다는  느낌마저 든다. 반면 K팝에 심취한 외국 팬들은 도리어 음악에 나타난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경탄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에 따르면 멜로디 중심의 음악일 경우 한국어 가사는 매끄럽지 않고 다소 불편함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강력한 댄스 퍼포먼스에 랩이 엉키면서 전개되는 음악에서의 한국말은 청각적으로 자연스럽고 별나다고 강조한다. 특히 간혹 추임새를 넣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네 글자’ 패턴은 아주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도란도란’, ‘엉망진창’, ‘티격태격’, ‘소리질러’ 등의 4자 언어들이다. 




이 대목에서 과거 배철수의 그룹 활주로 때의 곡 ‘이 빠진 동그라미’(나원주 작사 작곡)의 노랫말은 압권이다. ‘한 조각을 잃어버려 이가 빠진 동그라미/ 슬픔에 찬 동그라미/ 잃어버린 조각 찾아 때굴때굴 길 떠나네...’ 이 곡에는 때굴때굴 말고도 ‘에야디야’, ‘둥실둥실’, ‘헐렁헐렁’, ‘울퉁불퉁’, ‘이리저리’, ‘비틀비틀’ 등 네 글자 부사는 물론이고 ‘얼싸 좋네’, ‘찾았구나’, ‘길 떠나네’처럼 네 글자가 운율을 이루며 곡의 흥을 지배한다. 


2015년 밴드 출범 이후 9년이 흐른 올해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 데이식스가 근래 음원차트를 완전정복한데는 아이돌로 분류되지만 시원한 록 사운드를 구사해 딴 K팝 가수들과 차별화한 것과 더불어 이전 발표 곡들인 ‘예뻤어’,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등이 역주행한 덕분이 클 것이다. 팬들은 짧은 한마디를 반복하는 식으로 가사를 이어가는 동시에 유독 한글 가사 쓰기에 집중하는 것이 팀의 특장점이라고 평한다. ‘날 바라봐 주던 그 눈빛/ 날 불러주던 그 목소리/ 다 다/ 그 모든 게 내겐/ 예뻤어/ 더 바랄게 없는 듯한 느낌/ 오직 너만이 주던 순간들/ 다 다/ 지났지만/ 넌 너무 예뻤어...’- ‘예뻤어’(영케이 작사) 

 

확실히 ‘좋은 멜로디는 히트를 만들어내지만 좋은 가사는 명곡을 낳는다’는 가요계 속설은 맞다. 자우림의 김윤아가 솔로로 발표한 노래 ‘야상곡’(김윤아 작사 작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 곡은 다수가 동의하듯 멜로디의 성찬이지만 가사도 높은 공감지수의 서정성을 자랑한다. 특히 저 옛날 속요나 시조에 등장할 만한 고어(古語)풍의 어휘들을 동원해 더 애절하고 성찰적인 곡조의 아우라 창출에 성공하고 있다. ‘바람이 부는 것은 더운 내 맘 삭여주리/ 계절이 다 가도록 나는 애만 태우네/ 꽃잎 흩날리던 늦봄의 밤/ 아직 남은 님의 향기...’ 

 

곡에는 이밖에도 ‘애달피 지는’, ‘속절없는’, ‘애써 전하는’, ‘실낱같아 부질없다’ 등 지금의 가요에는 부재한 우리말을 순차적으로 전하면서 한편으로 마치 우리를 최신성에 사로잡혀 서사의 위기에 빠져있음을 경고하는 듯하다. 이러한 오랜 우리말로도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이완을 가져다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젋은 세대에게 ‘거장’ 소리를 듣는 아이유의 대표작이자 스스로 가사를 쓴 ‘밤편지’의 경우는 지금의 언어로도 충분히 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시대적 편차가 분명하지만 두 곡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그 자체로 미학인 한글의 멋이다. ‘나의 일기장 안에/ 모든 말을/ 다 꺼내어 줄 순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띄울 게요/ 음 좋은 꿈이길 바라요...’

 

2008년 인디의 등불로 혜성같이 출현한 장기하는 ‘싸구려커피’란 곡을 통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따른 세계금융위기 속에 신(新)빈곤층으로 내몰린 청춘의 질곡을 노래했다는 음악관계자들의 해석이 대세였다. 그의 급스타덤은 하지만 대중가요 가사가 외국어 천지이던 때 오로지 한글 가사의 노래에 집중한 결과이지 않을까. ‘말을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을지 몰라/ 지레 겁먹고 벙어리가 된 소년은/ 모두 잠든 새벽 네 시 반쯤 홀로 일어나 창밖에 떠있는 달은 보았네/ 하루밖에 남지 않았어/ 달은 내일이면 다 차올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그걸 놓치면 영영 못 가...’ - ‘달이 차오른다’ (장기하 작사 작곡)  역시 우리 대중가요의 명곡은 순우리말 가사가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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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jjinmo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