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며 부유하는 댄스 플로어, 로미(Romy) 내한 공연

로미(Romy)

by 장준환

2024.01.01



인디 팝 밴드 ‘디 엑스엑스(The XX)’에서 보컬과 기타를 담당하던 멤버 로미(Romy)는 지난해 9월 정규작 < Mid Air >를 발표했다. 미러볼에서 압출되어 사방으로 퍼지는 원색의 불빛과 그 광원에 우두커니 서있는 앨범 커버는 이태원이나 홍대 골목길 벽에 붙어 있을 법한 ‘오늘의 디제이’ 포스터를 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로미는 서로 간의 접촉이 봉쇄된 코로나 시기부터 꾸준히 댄스 플로어를 향한 갈망을 표현해 왔고 결국에는 자신만의 원초적 댄스 기지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간소한 반주 위 올리버 심(Oliver Sim)과 함께 보컬을 얹던 점잖은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의 근황은 꽤 놀라운 변신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11월부터 시작된 ‘클럽 미드 에어(Club Mid Air)’ 월드 투어는 스스로를 “이 공연은 엄선된 DJ와 함께하는 축하와 구원, 그리고 성역을 위한 댄스 플로어”라 소개한다. 로미는 언더그라운드 전자음악 신의 창구와도 같은 유명 라이브 플랫폼 ‘보일러룸’에 출연하는 등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생각하는 댄스 팝의 이상과 축복을 전파하고자 했고, 마침내 1월 9일 홍대 롤링홀(Rolling Hall)을 밟았다. 디 엑스엑스의 이름으로는 몇 번 방문한 한국이지만, 오늘만큼은 오롯이 로미라는 이름 두 글자로 당당히 올라서며 말이다.

오프닝 게스트는 우리나라의 라이징 디제이 ‘클로젯 이(Closet Yi)’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현재 한국에서 퀴어 파티 이벤트 ‘셰이드 서울’을 운영 중인 디제이 ‘리그레(LIGRYE)’가 맡았다. 무대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걸까, 독특하게도 둘은 공연장 뒷편에 설치된 부스에서 각 40분을 할당받아 디제잉을 선보였다. 하나둘 관객이 들어오는 가운데 클로젯 이는 부드럽게 조율한 하우스 믹스 셋을 풀어내며 추위에 몸을 녹일 시간을 마련했고 다들 입장을 거의 마치자 리그레가 준비한 격전지를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뉴진스의 ‘New jeans’와 르세라핌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를 가볍게 엮어 재치를 더한 운영이 돋보였다.



일순간 로미가 디제이 부스에 깜짝 등장. 환호와 함께 앨범의 첫 번째 트랙 ‘Loveher’의 주문과도 같은 후렴을 배경으로 무대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이내 ‘Weightless’가 흘러나오며 모두의 시선이 앞으로 쏠렸다. ‘클럽 미드 에어’가 본색을 드러낼 시간이었다. 관객들은 이미 80분 간의 예열을 통해 몸을 완전히 풀었다는 듯 초장부터 사력을 다해 손을 흔들고 마구 뛰기 시작했다. 뿌연 안개가 가득 차오르고 수증기 사이로 조명이 분산되는 광경이 펼쳐졌다. 주변이 보이지 않아도 좋았다. 우리는 귀가 아닌 온몸으로 음악을 느끼며 공간과 일체가 되기를 원했으니까.

공활한 딥 하우스 사운드 위로 로미의 유려한 음색이 조심스럽게 수놓이며 음악의 일부로 젖어들자 이내 황홀감이 폭발했다. 흥을 이기지 못해 가사를 따라 부르려다 이미 완벽한 상태의 조화를 해칠 것만 같아,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감상의 자세로 돌아왔다. 공연은 물 흐르듯 2020년도 발표된 ‘Lifetime’으로 이어졌는데, 이때 등장한 가사 “I’ll never let this feeling go to waste”처럼 벅차오르는 감정이 쉽게 낭비되도록 두고 싶지 않았기에 필자는 노래를 부르는 대신 그만큼 열심히 몸을 움직이기를 선택했다.



로미는 중간중간 연습해 온 서툰 한국어로 “감사합니다”와 “사랑해”를 언급하며 수줍게 미소를 보였다. 정중하게 박수를 유도하고 곧바로 칭찬하는 모습도, 그리고 뜀박질이 필요한 순간에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춤을 췄다. 먼저 시범을 보일 테니 눈치 보지 말고 함께 공연을 즐겨달라는 사인처럼 보였는데, 그건 당신이 누구든 간에 모두 포용하겠다는 ‘클럽 미드 에어’의 정신이기도 했다. 물론 현장에 있던 관객도 몇 배로 보답하기 위해 쉬는 구간이 나올 때마다 “We love you”와 “Romy”를 연호하며 격한 호응을 보냈다. 새삼 깨닫는 진리지만, 아티스트가 진심을 다해 즐기는 공연은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아바의 ‘Dancing queen’을 방불케 하는 찬란한 축포의 ‘She’s on my mind’, 캄캄한 밤바다를 떠돌듯 앰비언스가 주를 이루다 듬직한 클럽 리듬으로 변모하는 ‘The sea’, 프로그레시브적인 전개로 고조를 가져오는 ‘Twice’와 카일리 미노그가 떠오르는 EDM 박자 아래 각인적인 훅을 여민 ‘Did I’ 등 수록곡이 하나둘 무대를 장식했다. 특히 스웨덴의 가수 로빈의 명곡이자 댄스 플로어 신의 영원한 바이블이기도 한 ‘Dancing on my own’의 리믹스 버전을 선보일 때는 무대 아래로 내려와 군중 사이로 섞이며 하나가 되는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다.



'클럽 미드 에어’가 지닌 철학은 유대와 포용을 통한 부드러운 치유다. 그의 댄스 뮤직은 경쾌하지만 결코 막연히 억세거나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차라리 어딘가 쓸쓸하다면 그게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 Mid Air >는 가장 낮은 위치에서 전진한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에게 닿고자 하고, 동시에 모두가 누릴 수 있다.

과거 커밍아웃을 선언한 적이 있는 그이기에, 앨범의 노랫말은 사랑하는 이에게 받은 상처와 관계에 대한 고찰, 퀴어 클럽에서 평등한 존재로서 함께 춤을 추고 위로받던 경험을 토대로 제작되었다. 여기서 모든 상대는 ‘Her’로 지칭된다. 아마 그가 ‘Dancing on my own’의 “난 구석에서 네가 그녀에게 키스하는 걸 보고 있어(I'm in the corner watching you kiss her)” 파트를 내리 반복 재생한 것도, 중반 즈음 킹스 오브 투모로우의 원곡 ‘Finally’의 “더 이상 흘릴 눈물은 두지 않아(No more tears to cry)” 구간을 인터루드로 가져온 것은 직접 겪은 일련의 슬픔과 회복의 정서를 전달하고 싶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정석적인 샘플링으로 웨어하우스 에라를 복각한 훌륭한 인생찬가 ‘Enjoy your life’와 프레드 어게인과 함께 빚어낸 올해 최고의 위로이자 그래미 ‘베스트 댄스/일렉트로닉 레코딩’ 노미네이트 부문에 이르는 ‘Strong’이었다. 마지막 곡으로 등장, 몽롱한 트랜스 사운드와 함께 “너무 강하게 굴 필요는 없다(You don’t have to be so strong)”는 온화한 문구를 다 같이 따라 부르는 광경은 좀체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날 함께 간 한성현 필자는 로미의 공연을 두고 꼭 “내향인을 위한 비욘세의 < Renaissance >” 같았다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보다 더 찰떡같은 표현이 있을까 싶다. 세계를 품을 만큼 거창하지 않아도, 자극적이고 화려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위로의 어법으로 설득을 펼쳐낼 수 있으니. 비로소 전자음악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나 딱딱해 보였던 댄스 플로어는 어느덧 함께 일렁이며 부유하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밤새 춤을 췄다. 혼자가 아닌 모두와 함께.

사진 : 염동교, 장준환, 에스팩트(AESPECT) 제공
장준환(trackcam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