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수 맞아? | 소승근의 하나씩 하나씩

인터넷이 없고 뮤직비디오를 쉽게 볼 수 없었던 시절에는 오직 노래만으로 그 가수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키는 클까? 얼굴은 잘 생기고 예쁠까? 안경을 꼈을까?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을까? 어떤 옷을 입었을까? 음악팬들은 가수의 음색만으로 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예상하고 재단했죠. 목소리가 굵고 두꺼우면 몸집이 크고 우락부락하거나, 아니면 목소리가 맑고 얇으면 호리호리하거나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을 것이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자유롭게 상상하던 시절이 나름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 가수가 이 '상상 방정식'에 맞긴 하지만 간혹 여기서 벗어난 가수들도 있어서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는데요. 그래서 이번 하나씩 하나씩에서는 이 공식에 적용되지 않는, 목소리와 외모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지막지하고 극악무도한 가수들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아론 네빌 (Aaron NeVille)

라디오에서 아론 네빌의 노래를 듣고 이번 주제를 정했을 만큼 그의 외모는 단연 발굴입니다. 얼굴은 깡패, 몸매는 조폭 그런데 목소리는 트로트. 아론 네빌은 신이 창조한 불일치의 미학이며 언밸런스의 승리입니다. 저는 아론 네빌이 1990년도 그래미 시상식에서 린다 론스태드와 함께 'Don't know much'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동시에 확신도 했습니다. '신은 공평하다!'. 교도소 생활을 만기 출소한 범법자가 마음을 고쳐먹고 가수가 됐다고 주장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그의 외모와 체형은 소울 가득한 꺾기 창법과 대칭점을 이루지만 많은 동료 가수들은 아론 네빌의 노래 실력만큼은 인정합니다. 'Don't know much'의 성공 이후, 국내에서는 레너드 코헨의 원곡을 커버한 'Bird on a wire'도 사랑받았죠.
크리스토퍼 크로스 (Christopher Cross)

이 분야의 2인자되시겠습니다. 1980년대 초반, 텔레비전에 등장한 크리스토퍼 크로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주얼 쇼크였는데요. '절대자' 아론 네빌처럼 우락부락한 얼굴과 체형이지만 덩치만 컸지 마음은 소심하고 겁 많은 찌질이처럼 느껴졌습니다. 날카로운 눈매와 정리하기 힘들어 보이는 곱슬머리, 정돈 안 된 수염으로 덮인 얼굴은 경찰서 앞에 붙은 범법자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의 몽타주였죠. 그 외모에 어울리지 않은 턱시도는 그의 가늘고 고운 목소리와 어울리는 단 하나의 장치였습니다. 1980년에 빌보드 정상을 차지한 'Sailing'으로 그래미 주요 4개 부문을 싹쓸이한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1981년에 영화 < 아더 >의 주제가 'Best that you can do'로 오스카까지 거머쥐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고, 1984년까지 'All right', 'Ride like the wind', 'Think of Laura' 같은 노래들로 인기를 누렸고 저도 정말 좋아했습니다.
트레이시 채프만 (Tracy Chapman)

1988년도 그래미 시상식에 등장해서 기타 하나만으로 'Fast car'를 부르던 트레이시 채프만은 제 선입견을 깬 가수입니다. 포크 스타일의 'Fast car'를 들었을 땐 당연히 백인 남성이라고 생각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한 그는 흑인이었고, 더 놀랐던 것은 그가 여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통통한 10대 외톨이 소년처럼 보였던 트레이시 채프만은 다소 긴장한 듯 수줍은 모습으로 차분하게 'Fast car'를 불렀고 그 노래를 들은 선배, 동료 뮤지션들은 기립박수로 새로운 별의 출현을 축하했습니다. 진솔하고 겸손한 트레이시 채프만은 그래미 최우수 신인, 최우수 여성 팝 보컬, 최우수 컨템포러리 포크 앨범을 수상하며 스타를 넘어선 아티스트가 되었습니다.
윌리 넬슨 (Willie Nelson)

전형적인 간신 음색의 가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윌리 넬슨은 1982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5위를 차지한 'Always on my mind'와 로이 어커프의 원곡을 커버한 'Blue eyes crying in the rain'으로 뒤늦게 알려졌지만 사실은 1960년대 초반부터 활동하며 미국의 국민가수로 추앙받는 컨트리 싱어 송라이터죠. 초등학교 여학생처럼 딴 양갈래 머리로 각인된 그는 깎지 않은 수염과 깐깐해 보이는 얼굴까지, 저에게 윌리 넬슨은 미국의 수구 보수 세력처럼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짓밟는 네오콘의 이미지로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윌리 넬슨을 싫어하는데요. 이런 선입견, 참 무섭습니다.
닐 영 (Neil Young)

우리나라에서 'Heart of gold'와 'Four strong winds'로 사랑받은 캐나다 출신 닐 영의 음색 역시 온화하거나 따뜻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얇고 까칠하죠. 그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얼굴 역시 시니컬하고 도전적입니다. 밥 딜런처럼 말 한 번 잘못하면 엄청나게 혼날 것 같은 외모입니다. 닐 영은 남들이 뭐라고 하던, 음악평론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생각을 음악과 행동으로 설파해왔는데요. 미국 남부인들을 흉보는 'Southern man', 섹스 피스톨스의 보컬 자니 로튼에게 바친 'My my hey hey', 컨트리적인 앨범 < Comes A Time >과 < Harvest Moon >, 보수적인 성향을 나타낸 < Hawks & Doves >, 펄 잼과 함께 그런지를 선보인 < Mirror Ball >, 커트 코베인에게 헌정한 < Sleeps With Angels >까지 닐 영의 음악세계는 그의 얼굴처럼 자유롭고 거침없습니다.
메이시 그레이 (Macy Gray)

영화 < 스파이더맨 > 1편, 길거리 행사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등장한 메이시 그레이의 모습은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큰 얼굴, 뽕이 들어간 듯 위로 솟아 오른 어깨, 정리 안 된 머리카락, 짧은 목. 얼핏 SF 분장을 하고 나온 듯 조금은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이것은 특수효과가 아니라 그것이 메이시 그레이의 평범한 무대 모습이었죠. 우락부락하고 선 굵은 그의 외모는 어린 소녀의 허스키한 음색과 대비되며 2000년대 최고의 '비대칭 싱어'의 자리에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1990년에 'No more lies'를 불러 인기를 얻은 흑인 여가수 미셸레이에 이어 '베이비 보이스'의 계보를 잇는 메이시 그레이는 2000년에 발표한 데뷔앨범과 싱글 'I try'로 그래미 최우수 팝 여성 보컬 부문을 수상한 실력파 뮤지션입니다.
릭 애슬리 (Rick Astley)

1988년에 빌보드 정상에 오른 'Never gonna give you up'을 듣고는 저음을 가진 중년의 알앤비 가수라고 생각했지만 제 예상은 격렬하게 빗나갔습니다. 뮤직비디오에서 확인한 그는 당시 21살의 앳된 미소년이었으니까요. 보이 밴드의 멤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끔하게 생긴 영국의 젊은 백인 싱어였던 겁니다. 오호 통제라. 장난 끼 넘치는 10대 소년처럼 생긴 릭 애슬리의 중저음 음색은 숙성된 와인 같았죠. 이후 'Together forever'와 'It would take a strong strong man', 'She wants to dance with me' 같은 댄스곡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데뷔앨범 < Whenever You Need Somebody >의 마지막 트랙에서는 스탠더드 팝 넘버 'When I fall in love'를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느끼한 크루닝 창법으로 불러서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습니다.
문주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문주란의 음색은 여성으로 성 전환한 남성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그만큼 독보적인 저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얘기인데요. 대표곡 '돌지 않는 풍차'에서 들려주는 낮은 알토톤의 음색은 당시로선 생경했지만 '공항의 이별'에서는 가녀리고 아름다운 소리도 곱게 뽑아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팔색조 같은 디바죠. 미국에는 토니 브랙스톤, 아니타 베이커, 샤데이, 그레이스 존스 등 몇몇 저음 여가수가 있지만 대한민국에는 문주란이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문주란이 텔레비전에 출연했을 때 사회자가 말한 이 멘트가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나이 어린 가수이면서도 나이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가수, 문주란 양의 노래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광조

남자들은 공감할 얘긴데요.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왠지 여성스러운 남자가 있었습니다. 말할 때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고, 손동작이 화려했으며 입모양은 얄미웠습니다. 외람되지만 이광조가 저에게 그런 이미지를 준 가수죠. 1980년대 '오늘 같은 밤', '즐거운 인생',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인기를 얻은 이광조의 노래 부르는 모습과 행동은 참 '거시기'했습니다. 곱고 가는 음색은 이광조의 인기 폭을 넓히는 데 적격이었지만 일부 남성들은 그의 제스처와 노래할 때 드러나는 비대칭의 입모습을 좋아하지 않았죠. 그나저나 나이가 들면서 점차 성룡과 비슷해지는 그의 얼굴은 꽤 부담스럽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정비례하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인성도 훌륭할 거야, 청순해 보이는 여성은 순수하고 순진할거야,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은 무식할 거야,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은 무서울 거야, 영국 남자들은 신사적일 거야, 대기업 CEO는 대부분 사기꾼일 거야, 동남아 사람들은 나보다 못 살 거야 등등. 우리는 이런 불합리하고 검증되지 않은 틀 안에서 주관적의 사실을 객관적인 진실로 착각합니다. 위에 나열한 가수들은 당당한 실력으로 그 선입견이란 유리창을 깨고 굳건히 입지를 다졌죠. 저는 이들을 통해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쓸데없는 고정관념을 없애준 이 위대한 가수들에게 지금이라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