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니 & 데비깁슨 vs 셰어 & 베트 미들러 | 라이벌 열전
10대들의 경쟁과 노장들의 대결엔 차이가 있다
음악 역사를 보면 50년대이래 간혹 틴에이저 가수 또는 틴에이저를 겨냥한 음악이 바글바글할 때가 있다. 요즘이 그렇다. 스파이스 걸스와 핸슨이 인기 차트를 강타하면서 팝계에 모처럼 10대 시장이 형성되어 이를 노린 음악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1980년대 말에도 요즘과 같은 틴 가수 열풍이 팝 무대를 덮친 바 있다. 음악 잡지들이 갑작스레 10대를 표지 인물로 내걸어 사생활을 추적하던 시기였다. 그 때가 다만 달랐던 것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 요즘에 비해 유독 여가수들이 맹위를 떨쳤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소녀 가수들'의 두드러진 판세 장악은 음악역사상 이 때가 사실상 처음이었을 것이다.
때아닌 소녀 가수들의 돌풍 중심에는 티파니(Tiffany)와 데비 깁슨(Debbie Gibson)이라는 라이벌이 있었다. 언론들은 기회다 싶어 두 소녀를 인기의 호적수로 붙여 일반의 관심을 부추겼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10대 여가수의 출몰을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10대 여가수 돌풍의 두 주역
티파니와 데비 깁슨의 출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돈나와 휘트니 휴스턴 같은 성인 여가수들밖에 없던 시절에 어린 소녀들이 부른 곡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게 새로웠고 두 소녀는 어린 나이답게 앳된 용모에 귀엽고 예뻤다. 나이는 티파니가 1971년 10월 생이고 데비 깁슨이 1970년 8월 생으로 데비가 한 살 위였다.
언니임을 밝히기라도 하듯 데뷔는 데비 깁슨이 좀 빨랐다. 1987년 5월에 데비 깁슨이 첫 싱글 'Only in my dreams'를 선보였고 그로부터 3개월 후에 티파니는 데뷔 싱글 'I think we're alone now'를 냈다. 하지만 10대 여가수 돌풍의 주역은 조금 뒤늦게 등장한 티파니였다. 그녀의 노래는 빌보드 차트에 등장하자마자 놀라운 상승 속도를 보인 끝에 당당히 1위에 올랐다.
음악 관계자들, 특히 기자들이 '티파니가 누구야?' 하며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파릇파릇하고 순수한 얼굴이 비디오와 사진으로 공개되면서 티파니의 인기는 하늘을 모르듯 치솟기 시작했다. '티파니마니아'란 말도 나왔다.
물론 데비 깁슨도 선전했다. 데뷔 싱글은 순식간에 골드를 획득하며 4위까지 진입했다. 대단히 인상적인 출발이었지만 데비 깁슨은 차트 순위와 외모의 귀여움에 눌려 티파니 다음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티파니의 힘은 거셌다. 'I think we're alone now'에 이어 두 번째 곡 'Could've been' 마저 차트 정상에 등극하면서 그녀는 소녀가수 부문 '짱'의 위치를 확실히 굳혔다.
이 때까지만 해도 티파니의 명성은 독보적인 것처럼 보였다. 의미 있는 기록도 전리품으로 얻었다. 1970년대 생 가수 가운데 최초로 넘버 원 싱글을 가진 가수로, 또 브렌다 리(Brenda Lee) 이래 최초로 두 곡 연속 차트 정상을 밟은 주인공이란 영예로운 기록이었다.
비틀즈 곡의 성(性)을 바꿔 리메이크한 'I saw him standing there'로 티파니가 온갖 플래시와 꽃다발을 독점하는 사이에 2인자였던 데비 깁슨도 기어코 'Foolish beat'란 곡으로 차트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더욱이 이 곡은 데뷔 앨범에서 3곡의 싱글을 내놓고 난 뒤 네 번째 싱글로 등정(登頂)했다는 점이 이채로웠다(두 번째 싱글 'Shake your love' 4위, 타이틀곡으로 세 번째인 'Out of the blue'는 3위).
보통 동일 앨범에서 싱글이 서너 번째가 되면 차트 진입 속도가 축 처지는 경향을 보인다. 데비 깁슨이 마침내 티파니와 맞설 만큼 스타덤의 부피가 커졌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비록 뒷북(?)을 치긴 했지만 신기록을 못 낸 건 아니었다. 티파니가 모든 기록을 다 쓸어간 것 같아도 데비 깁슨에게 씌워줄 '최초'라는 타이틀 중 하나를 남겨 놓은(실은 남겨놓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바로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1위 곡을 작곡하고 프로듀스한 아티스트라는 값진 기록이었다.
데비 깁슨은 남의 곡을 부른 티파니와 달리 직접 곡을 썼다. 그녀가 티파니마니아에 눌리지 않고 우뚝 솟아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재능 덕분이었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근래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소녀 가수들 가운데 가장 예능이 뛰어난 인물은 데비 깁슨'이라고 그녀를 실력으로 1인자 취급하기 시작했다. 티파니와 데비 깁슨을 직접 비교한 한 기자는 '티파니는 가수고 데비 깁슨은 아티스트'라고 규정하기도 했다.(곡을 쓸 줄 안다는 게 이렇게 유리하다).
매스컴에 의해 조작된 '불화설'
하지만 '티파니의 매력'과 '데비 깁슨의 능력'은 1988년 내내 평행선을 이루며 치열한 인기 경쟁의 양극 구도를 만들어냈다. 매스컴은 신나게 티파니와 데비 깁슨의 신경전을 기사화하여 화제를 부풀렸다. 나중에는 둘이 '어느 자리에서 말다툼을 벌이다 서로 좌석을 박차고 나갔다'느니 '서로 죽을 정도로 미워한다더라'느니 하는 불화설까지 나돌았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한 상황이었다.
데비 깁슨은 그러나 1989년 한 잡지 인터뷰에서 그러한 소문을 전면 부인했다.
"티파니와 직접 만나기도 했는데 느낌이 좋았다. 음악에는 이기고 지는 것이 없으므로 싸울 이유가 없다. 말하자면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유명해지니까 매스컴에게 그런 엉뚱한 기사를 쓸 기회가 주어진 것뿐이다."
티파니도 데비 깁슨과의 경쟁에 대해 '우린 라이벌이 아니라 동료일 뿐'이라고 못박았다.
티파니가 곡을 쓰지 못했다는 점은 그러나 그녀의 스타덤이 재능이 아닌 외력(外力)에 의한 산물임을 시사한다. 티파니는 실상 조지 토빈(George Tobin)이란 매니저 겸 프로듀서의 도움으로 컸다. 일반인들이 그녀를 주목한 것은 1987년 인파가 몰리는 '쇼핑몰'에 주말마다 찾아가 세 차례 무료로 노래부르는 토빈 주도하의 이색 투어에 의해서였고 이 때문에 그녀는 NBC TV를 비롯한 영상매체에 많이 노출될 수 있었다(마케팅이란 이름의 작전의 승리!).
티파니는 처음부터 자신의 음악세계란 없었다. 조지 토빈을 따를 수밖에 없는 나이 그리고 상황이었다. 그녀가 음반자본의 '상업적 노예'였음은 데뷔 곡 'I think we're alone now'에 여실히 드러난다.
리메이크란 일반적으로 아티스트가 과거 자신이 좋아했던 곡을 새롭게 해석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티파니는 이 토미 제임스 앤 숀델스(Tommy James & The Shondells)의 1967년 히트곡을 알기는커녕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곡이었다.
티파니는 말한다.
"이 곡을 듣고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뭐 그렇게 좋지도 않았다. 조지 토빈이 자신을 믿고 일단 자신이 새로 고친 곡을 들어보라고 했다. 일주일 후에 새 곡을 듣게 되었는데 부르기에 재미있었고 결국은 좋아하게끔 되었다."
이 말 하나로 곧 이은 티파니의 추락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2집 앨범에서 'All this time'으로 차트 상위권에 복귀했으나 그 뒤로는 영영 히트 차트와 멀어지고 말았다. 1년 반만에 그녀의 가수 생활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90년 수요층을 성인으로 조정해 조지 토빈과 결별하고 모리스 스타를 새로운 프로듀스로 한 신보 <Now Inside>를 발표했으나 앨범 차트 순위에도 못 올라 그녀의 '새로운 내면'에 아무도 관심이 없음이 확인되었다. 그야말로 행복한 시작, 불행한 결말!
그럼 데비 깁슨은 어땠을까? 작곡과 프로듀스의 능력에 의해 티파니보다는 훨씬 전도 양양해 보였다. 그녀는 재롱을 떨어야 할 나이인 다섯 살에 'Make sure you know your classroom'이란 곡을 작곡한 신동으로 선전되었다.
데비 깁슨이 비범한 재주와 안목이 있는 소녀임은 명백했다. 티파니와 달리 '음악관'을 구비했다고 할까? 'Foolish beat'를 스스로 프로듀스한 경위만 해도 그렇다.
"난 이 곡을 프로듀스해 달라고 조지 마이클에게 편지를 썼지요. 그는 내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프로듀서거든요. 그로부터 응답이 없자 난 '좋아, 내가 직접 해보겠어'하고 결심하게 됐지요."
1989년 신년벽두에 나온 2집 <Electronic Youth>의 첫 싱글 'Lost in your eyes'가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라 순항을 예고했으나 이후 타이틀곡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게 활력이 떨어졌다. 이듬해에 낸 3집 <Anything Is Possible>은 보잘 것 없는 차트 성적을 기록해 앨범 제목과 달리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은 쪽으로 전개되었다. 93년 와신상담 끝에 신보 <Body Mind Soul>로 재기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일찍 커버린 스타들
작곡의 재능을 가진 기대주였음에도 데비 깁슨은 어째서 '반짝의 굴레'에 빠졌을까? 아마 이런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녀는 뛰어났으나 너무 어린 나이에 빨리 커버렸다. 틴에이저가 간직해야 할 순수성이 상업적으로 이용되어 종국에는 재능도 함몰시키는 치명적 '이미지 소멸'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청소년은 청소년다워야 하는데 그녀는 너무 어른다웠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청소년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있다. 하나는 그저 청소년으로 청소년임을 만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일이다"라고.
데비 깁슨이나 티파니가 10대 시절을 꿈과 재능의 비축기로 보내고 나중 성인이 돼서 데뷔했으면 결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어릴 적 명성은 위험하며 '순수성의 판매'는 효력이 너무도 짧다.
이 점을 팝 음악계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해준 '어른 여가수' 라이벌이 있다. 바로 셰어(Cher)와 베트 미들러(Bette Midler)다. 두 사람은 티파니와 데비 깁슨의 '어린 투 톱 시스템'이 꺼져가던 시점에 가수로서 재기에 성공해 그들을 대체하는 '어른 투 톱 시스템'으로 위력을 뽐냈다.
매력적인 몸매의 셰어는 60년대에 소니 앤 셰어(Sonny & Cher)로 활동하다 솔로로 나서 1970년대 들어 1위 곡만 3곡을 기록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던 인물. 이후 배우로 전향해 차트와 등졌으나 1988년 마이클 볼튼이 써준 'I found someone'으로 가수로 재기한 뒤 소녀 가수들이 휘청거리던 1989년 잇따라 빅히트 싱글을 발표하는 '노장의 관록'을 과시했다(셰어는 알려진 대로 1999년 'Believe'의 세계적 히트로 다시 한번 슈퍼스타의 위력을 펼쳐 보인다).
티파니와 데비 깁슨이 무색하게 엄마뻘인 셰어의 싱글 'After all'(6위), 'If I could turn back time'(3위), 'Just like Jesse James'(8위)는 연이어 차트 상위권 공략에 성공했다. 마치 '얘들아 봐라'하는 식. 1946년생으로 나이 마흔이 넘은 그녀가 이처럼 또 한차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 것은 결코 소녀 톱 가수를 제조해낸 '요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까지나 쇼 비즈니스계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낳은 소산이었다.
더욱이 셰어는 이에 앞서 1987년 영화 <문스트럭>으로 웬만한 여배우도 꿈꾸지 못하는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상을 수상, 스크린과 팝 양대 부문을 석권했다. 미국 연예주간지 <피플>은 1989년 15주년 특집호에서 셰어의 끝없는 스캔들과 뛰어난 패션감각을 들어 "여가수 겸 배우인 셰어야말로 196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가르쳐주는 좌표"라고 추켜세운 바 있다.
셰어가 기염을 토하자 베트 미들러도 뒤질세라 불쑥 융기했다. 미들러는 결코 노장의 파워가 셰어 한사람으로 몰리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알게 모르게 기나긴 세월 속에 두 사람의 신경전이 치열하게 물밑에서 진행되었다. 그 수준은 거의 앙숙. 서로간 거의 꼴 보기 싫어하는 정도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는 사이로 연예 타블로이드 신문을 간간이 장식했다.
베트 미들러는 1980년 자신이 주연한 재니스 조플린 일대기 영화의 주제곡인 'The rose'로 한 동안 톱 가수의 영화를 누렸으나 그 뒤 영화에 전념, 인기 차트와는 소원했다. 특히 코미디 영화 쪽으로 두각을 나타내 미국 제1의 코미디 배우로 성장했다(가수 출신이면서 스크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등 전반적 경로가 라이벌답게 셰어와 흡사하다).
미들러는 그러나 1989년 역시 자신이 출연한 영화 <비치스>에 삽입된 곡 'Wind beneath my wings'가 플래티넘 싱글이 되면서 노장은 살아 있음을 알렸다. 그녀는 티파니와 데비 깁슨이 어느덧 은퇴(?)하고 없는 90년에 'From a distance'라는 노래로 거푸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저력을 과시하며 팝계의 정상을 재탈환했다. 이 곡은 그래미상 '올해의 노래' 부문을 수상했다. 이 때의 나이가 마흔 다섯.
노력에 의한 '참된 성공'이 장수의 비결
티파니와 데비 깁슨이 20살이 되기도 전에 가수의 생을 마감한 반면 베트 미들러는 그들의 엄마 나이에 재기를 이뤄낸 것이다. 이 무렵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 성공한 지금이 젊은 시절의 성공보다 배나 값지다"는 감격의 소감을 밝혔다.
셰어와 베트 미들러의 분발은 거듭 말하지만 마케팅도 마케팅이지만 거기에 노력을 보탠 결과라는데 참의의가 있다. 두 여인은 연예계에 임하는 자세가 성실하고 진지하며 '최우수의 능력보다는 최선의 노력'에 담긴 엔터테이너의 고전적 미덕을 신뢰한다. 보컬의 성숙미는 따라서 말할 것도 없다.
셰어의 어머니 조지아 홀트는 1989년 자기 딸을 이렇게 품평한 바 있다.
"나는 항상 내 딸에게 얘기해왔다. '넌 미인도 아니고 재능이 많은 여자도 아니고 그다지 똑똑하지도 않다. 그런데 넌 특별하다. 왠지 관심을 끌게 하는 여자다'라고. 내 딸이지만 언제나 다른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그녀는 정말 비범하다."
상기한 대로 티파니와 데비 깁슨이 라이벌이 아니라, 셰어와 베트 미들러 사이가 경쟁자가 아니라 '티파니와 데비 깁슨 대(對) 셰어와 베트 미들러'라는 노소(老小) 대립 구도가 보다 올바른 상황인식 아닐까? 순진과 성숙의 대결! 두말할 나위 없이 승리의 여신은 성숙 쪽으로 웃음을 짓는다.
티파니와 데비 깁슨의 반짝 스타덤은 우리에게 '10대의 맑은 영혼은 함부로 팔아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남긴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틴 지향의 음악에 도사린 위험도 이것이다. '키드 뮤직'으로 한때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 광채는 너무도 짧다.
에디슨의 말이 생각난다.
"성공이란 그 결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소비한 노력의 총계로 따져야 할 것이다."
역시 어릴 적은 꿈을 키우며 무한대의 노력으로 참다운 어른을 준비하는 시기다. 섣불리 나섰다간 사춘기의 순정(純情)은 물론 종국에는 잠재적 재능마저 잃고 만다. 실패하고 나서 절감하게 되지만 세상이란 그렇게 무섭다. 티파니와 데비 깁슨의 비극 한쪽에 둥지를 틀고 있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