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회귀작 3집 <꿈의 팝송>은 리더인 이석원을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물갈이(?)된 모습을 드러냈다. 이능룡(기타), 전대정(드럼), 정무진(베이스)이라는 새 멤버구성으로 일궈낸 신보는 전작과는 명백히 선을 긋는 이석원의 회심작이다. 새 가위를 들고 영업 재개한 이발관. 이제 업주(?)인 세 명의 이발사(드러머 전대정은 인터뷰에 참가하지 못했다)가 들려주는 길고 굵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 공백이 꽤 길었습니다. 멤버도 다 바뀌었구요. 새로 들어 온 멤버 분들의 소개 부탁드립니다.
“2집 <후일담>이 1998년에 나왔고 4년간 휴지기에 들어갔죠. 전 약간의 직장생활을 했고 약 1년 전에 3집 작업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멤버 교체를 단행했어요. 이건 좀 의미가 달랐어요. 완벽한 라인업에 대한 욕심이랄까. 음악적 성향이나 감각의 차이가 있어도 대충 넘어가는 게 아니라 완벽하게 소통이 이루어지는, 완벽한 팀웍의 밴드를 원했죠.
베이스를 치는 무진이는 라이브 세션으로 잠깐 왔다가 눈이 맞았어요(?). 일단 잘 통했고, 베이스 라인메이킹이 좋았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작 편곡 실력도 상당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무진이가 모의해서 남은 멤버들을 뽑게 되었죠.
드러머 대정이는 지원자격이 안됐어요. 일단 병역미필(현재 방위산업체, 내년 5월 제대 예정)이었고 더군다나 블랙메탈그룹 칼파 출신이었어요. 지원한다 했을 때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죠. 그래서 기대도 안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 놈이더라구요. 이상하게 화장하고 메탈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팝 터치를 가지고 있었어요. 오히려 좀 더 세게 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길 정도였죠.
기타는 그 동안 지원자들이 많았어요. 홍대 씬에서 난다 긴다 하는 친구들 다 왔지만 이발관식의 기타를 소화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그냥 세 명의 라인업으로 앨범 작업에 들어갔죠. 그런데 작곡이 거의 끝난 상태에서 극적으로 제대로 연주하는 능룡이가 나타났어요. 이미 뽑혔을 줄 알고 지원을 안 했대요. 저도 실은 반드시 기타주자가 나타날 거라고 믿고있었어요. 그가 작업 도중에 들어와서 기존의 색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석원)
- 이번 앨범의 가장 큰 변화라면 이석원씨의 독단(?)에서 벗어나 새 멤버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점일 텐데요, 어떻게 분업이 이루어졌나요? 멤버들이 합류한 게 올해였다면 입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밴드생활을 제가 꽤 오래 했어요. 1993년 이후부터 쭉 느낀 건데 밴드는 민주주의로 굴러가기가 힘들죠. 2집은 제가 곡을 만들고 편곡을 기타치던 정대욱이 하던 포맷이었는데 이번에는 제 독재를 강화하면서도 다른 멤버들의 참여지분을 확실하게 했죠. 그러다 보니 작곡과 편곡에 여러 명이 달라붙어서 작업하게 된 거에요. 하면서 작곡과 편곡의 경계를 심하게 두지 않았고요. 가령 '울면서 달리기'는 편곡자가 없죠. 셋이 만든 곡인데 이건 어레인지라기보단 송라이팅의 개념으로 생각했으니까. 멤버들의 실력이 탁월했던 탓이죠. 제가 '이런 길이로 이런 톤으로 뽑아와라' 주문했을 때 이렇게 구미에 맞게 만드는 연주자들은 별로 없거든요.” (이석원)
인터뷰는 착착 진행되었다. 달변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이석원의 답변은 명쾌했고 특유의 유머감각이 살아 있었지만 조금은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질문이 짧고 답변은 아주 길었다. 거기에는 이들만의 고집과 고민이 흠뻑 배어있었다.
- 타이틀곡은 왜 '2002년의 시간들'이 되었죠? 이 곡 말고도 멤버마다 애착을 느끼는 곡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철저히 여론을 따랐어요. 만족스럽게 녹음을 마친 '괜찮아'와 '2002년의 시간들'을 주변인들에게 들려줬는데 80% 이상이 '2002년의 시간들'을 꼽았습니다. 들려주는 곡마다 반응이 달랐던 지난 앨범과는 다른 양상이었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트랙은 '울면서 달리기'입니다.” (이석원)
“'괜찮아'는 2집부터 반은 있었던 곡이었어요. 석원형이 1년 가깝게 심혈을 기울인 트랙이고. 그래서 전 그 트랙이 타이틀곡이 될 것 같았어요. 제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정무진)
“마지막 곡 '언젠가 이발관'이 마음에 들어요. 개인적인 취향이 스탠다드하기보다는 좀 뒤틀어져 있는, 그러니까 변칙을 좋아해요. 어느 정도 팝적이지만 변화가 가해져있지요. 하지만 마냥 제 취향만을 따를 순 없죠.” (이능룡)
- 멤버들이 느끼는 이석원씨의 보컬 역량은 어떤가요?
“맘에 드니까 같이 밴드를 하는 거죠. 일단 저는 노래방 가서 스틸하트(Steelheart)의 'She's gone' 부르면 노래 잘한다 하는 것처럼 고음역대 구사한다고 보컬 잘한다고 여기지 않거든요. 석원형 노래를 들으면서 기교 없이도 참 편안하게 부르는구나, 남자목소리인데도 참 예쁘구나, 생각했어요.” (정무진)
“이발관 들어오기 전부터 석원형 노래를 좋아했고, 막상 들어와서 보니 제가 연주하는 기타가 석원형 목소리랑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능룡)
“어느 순간부터 꺾기에 집착하게 되네요. 꺾는 게 그렇게 좋더라구요(웃음). 자연스러운 보컬의 길을 찾은 게 이거였던가 봐요. 누가 말리거나 하진 않으니 앞으로 계속 하게 될 것 같네요.” (이석원)
- 역시나 이발관 하면 가사를 빼놓을 수 없지요.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언제나처럼 영어의 배제입니다.
“일단은 제가 영어를 잘 못해요(웃음). 데모 앨범 제작 당시 영어 가사를 써 본 적 있는데 영어를 못해도 우리말로 쓰는 것보다는 쉽거든요. 단어 선택 잘못하면 멜로디의 감도도 20-30%는 깎이죠. 즉 멜로디를 갉아먹지 않으면서도 내용 연결이 자연스러운 한글 가사를 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죠. 그렇지만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우리말 가사를 쓰겠다는 건 그냥 저만의 신념이고 그걸 꺾고 싶진 않네요.” (이석원)
- 그렇다면 가사를 생각하는 대상은 보통 뭐죠?
“8번 트랙 '불우스타'의 경우 드라마 <여인천하>를 보면서 쓴 건데 사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죠. 상상을 통해선 가사를 못쓰죠. 모두다 제 얘기이니까. 저것도 드라마 속에 저를 대입해서 가능했던 거였고. 사건, 오브젝트, 경험, 느낌. 이런 것들에서 나오죠. 에디베더나 마이클 스타이프는 앨범 내놓고 '오해하지 마라, 내 얘기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저는 제 얘기가 아니면 못 쓰죠.” (이석원)
이어 앨범 제목에 대한 질문을 건넸다. 자연스럽게 4집 앨범에 대한 구상의 공개로 이야기가 이어졌고, 이와 관련한 1980년대 뉴 웨이브(New Wave)에 대한 이발관의 애착을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발관의 마인드를 구경했다면 이번엔 이발관의 숨겨진(?) 사운드의 비밀을 찾아낼 수 있었다. 궁금하지 않나? 이석원의 '인생의 밴드'라는 펫 숍 보이스(Pet Shop Boys)와 이발관의 연관성이 무엇인가가.
- 앨범제목이 <꿈의 팝송>인 것도 그렇고 신보에 걸린 카피가 '당신이 반드시 따라 부르게 될 멜로디'입니다. 조금 오만한 타이틀 아닌가요?
“새 앨범에 대한 제 마음이죠. 꿈처럼 좋은 음악들을 들려주겠다 혹은 만들었다는 각오와 자부심, 바람이 범벅된 제목이에요. 아울러 '꿈'과 '팝송'이라는 각각의 단어의 의미를 떠나서도 두 언어의 조합이 주는 어감이 너무 좋더라구요. 2집 수록곡인 '꿈의 팝송'과는 전혀 상관없구요.” (이석원)
- 건반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팝송'이란 제목이 80년대의 뉴 웨이브를 상기시킵니다. 이건 이발관의 특색이라고 볼 수도 있죠. 단지 건반 삽입 탓이 아니라 특히나 드럼은 진짜 연주인데도 컴퓨터로 찍은 듯 일렉트로닉(Electronic)하게 들리거든요. 그런 사운드지향을 원래 개념에 두고있었습니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반(半)은 정확히 보신 거에요. 제가 펫 숍 보이스를 좋아하듯 80년대 뉴 웨이브에 관심이 많아요. 다른 밴드를 좋아한다 했으면 비슷하네, 다르네 여러 평가가 있었을 텐데 그들은 전자듀오고 우리는 밴드포맷이기 때문에 어떤 유사성도 찾을 수 없으니까 좋아한다 말해도 제가 문제되거나 손해볼 건 없지요.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은 이발관 음악에 펫 숍 보이스의 냄새를 느끼지 못하죠.
가령 펫 숍 보이스의 4집
- 4집 계획에 대한 질문의 답을 벌써 해주셨네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2집에서 3집으로 넘어오는 사운드의 단계가 훨씬 노골화 될 것 같다는 얘기죠. 지금은 신스 팝과 기타 팝이 공존한다는 반응인데 완전한 뉴 웨이브 쪽인 음악을 하고 싶다는 것이죠. 멤버들도 이쪽에 대한 소스가 많고 프로듀서는 당시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어 승부수를 제대로 던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1집이 우리나라 최초의 기타 팝이다, 라는 평가를 들었던 것처럼 4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뉴 웨이브 앨범을 구사하고 싶다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뉴웨이브를 하는 팀이 없잖아요?” (이석원)
- 벌써 4집에 대한 얼개가 나왔습니다. 그럼 시기도 생각하고 있나요?
“1집은 거의 선주문이 없었고 2집은 정말 비참했어요. 거의 돌 맞는 상황이었거든요. 근데 지금으로선 반응이 좋으니까 빨리 내자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죠. 그래서 지금 마음이 좀 급해요. 원래 성격적으로 조급증이 있고. 내년 가을을 생각한다면 당장 4집 들어가고 싶은데 사실 1년도 부족할지 모르겠어요.” (이석원)
- 그럼 4집에 대한 고민과 구상 이전에 그간 발표한 1, 2, 3집에 대한 이미지를 정리해 주실 수 있을까요?
“1집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2집은 단색 톤의 사진, 3집은 칼라사진이나 수채화 느낌이죠. 재킷을 보면 알 수 있죠. 저희는 재킷 디자인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것도 음악을 설명해주는 수단이 되니까요. 앨범 다 나오고 거기에 맞추는 게 아니라 커버도 동시에 들어가죠. 디자이너가 계속 음악 들으면서 소통을 하는 거죠. 특히 데이트리퍼(Daytripper, 류한길)가 작업한 2집 <후일담>의 재킷 반응이 좋았어요. 근데 이번은 그 앨범이랑 느낌이 많이 다르니까 이런 단색 디자인밖에 할 줄 모른다면 하지 말아라 했죠. 이렇게 시작했는데 결과물에 다들 만족스러워 했어요.” (이석원)
체리필터(Cherry filter)가 시동을 건 밴드 씬이 심상치 않다. 거듭되는 선전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들은 또 다시 갈림길에 서게 된다. 가요시장이 워낙 밴드에게 불리한 여건인지라 무게를 버리고 더 많은 대중과 호흡할지, 아니면 원하는 음악만을 추구하며 작은 무대에서만 만족할 것인지 여부는 밴드의 특성과 미래, 즉 생명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좁은 틈에 움트기 시작한 이발관의 생존방식은 무엇일까?
- 체리필터로 시작해 밴드 씬이 조금씩 활성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이발관도 한 몫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주세요.
“밴드는 일단 무조건 많이 나와야 해요. 외국의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쇼처럼 밴드가 TV에 일단 자주 나와야 해요. 그래야 밴드 멋지다고 하는 반응들도 많이 나올 거고. 일단은 밴드의 수가 많아지는 게 가장 큰 숙제라고 봅니다.” (이석원)
- 그런데 러닝타임이 너무 짧아요. 37분! 고민의 흔적이겠지만 4년 기다린 팬들을 생각한다면 아쉽습니다. 지난 앨범에는 '인생의 별'이나 '어제 만난 슈팅스타'처럼 5분-6분 넘어가는 곡들이 많았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앨범은 듣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보다는 저의 음악적인 욕심이 강했어요. 군더더기를 남기고 싶지 않았거든요. 50곡 가량을 갖고 출발했으니 탈락한 곡들도 많죠. 그렇지만 그 선택을 두고 대중적이다, 아니다라고 볼 수는 없죠. 저는 원래 천성이 그래요. 대중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대중이 날 좋아하니까 그렇게 가야한다, 이게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등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거기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 거죠. 앨범에 대한 이런 저런 리뷰가 올라오고 있지만 너무 대중적이라서 이번엔 안 된다, 이건 해당사항 없죠. 우리는 너무나 대중적이고 싶은 밴드예요. 심지어 저는 <가족오락관> 같은 프로그램에도 출연해보고 싶은 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아적으로 흘러서 그게 고민이죠.” (이석원)
대중적인 음악을 지향한다 하지만, 아울러 밴드의 (수적) 대중화를 주장하는 이들이지만 이들의 음악이 진짜 대중친화적인지, 더 정확히 말해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을 만큼 열린 길을 걷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역으로 평단의 호의적인 반응을 가져 온 견인차이기도 했지만 거기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이발관은 아니었다.
사실 밴드는 많지만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던 행운과 실력, 기회를 동시에 쥔 밴드는 많지 않다. 거기에 명성에 걸 맞는 산술적 반응을 얻기란 더욱 요원한 일이다. (현재로서는) 이를 모두 충족시키며 영업재개 이후 전례 없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이발관의 (현재의) 성공의 열쇠는 이런 노력과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 1시간 30분간 진행되었던 이들과의 길고 굵은 이야기가 '인터뷰'라는 좁은 무대에서의 화려한 영웅담으로 그치지 않길 바란다. 날이 서 있는 지금의 가위가 앞으로도 서슬 퍼렇기를, 벌써부터 잡아 놓은 4집의 구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아울러 가까운 미래인 12월의 단독공연도 좋은 반응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02년 10월 31일 목요일
인터뷰 : 임진모, 정리 : 이민희, 사진 : 김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