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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해방과 공연 규제 완화 이후 각양각색의 축제가 곳곳에 등장하며 국내 페스티벌에 대한 수요가 그 어느 때보다 급증한 상황. 이제는 음악과 공연 문화에 큰 관심이 없는 이라도 각종 후기와 주변 지인의 추천에 혹해 한 번쯤은 방문을 시도할 정도다. 자연스럽게 마니아와 대중이 뒤섞이며 색이 희석되는 가운데, 인천의 <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은 양극을 전부 겨냥한 균형 잡힌 라인업을 공개하며 역대 최다 티켓 판매를 기록하는 등 명실상부 일인자 위치에 쐐기를 박았다.
자연스레 주목은 다음 순번이자 '국내 3대 록페'의 일원일 정도로 23년의 경력을 소유한 전통의 강호, <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 >로 이어지기 마련. 많은 이들이 올해 부산이 취할 태도와 구성에 관심을 보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 그 치열하고도 생생한 현장 분위기를 담기 위해 특별 결성된 이즘의 페스티벌 듀오 '김앤장'이 새벽바람의 설렘을 안고 부산행 버스에 몸을 던졌다.
긴 시간을 거쳐 삼락생태공원의 입장 부스를 지나자 탁 트인 정경과 밴드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 부산을 소재로 한 각종 이벤트 부스가 둘을 반겼다. 심지어 여름과 가을 패션이 공존하는 선선한 날씨와 스테이지를 네 개로 나눌 만큼 넓은 부지라니. 더위와 인파에 씨름하기 바빴던 여타 페스티벌들과 달리 실로 쾌적한 환경에 발을 내디며 실감했다. 아, 우리가 진짜 그 소문으로만 듣던 '부락'에 도착했구나. (장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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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밴드의 약진, 그리고 J팝 열풍의 최전선
한여름에 집중 개최되는 타 페스티벌과 달리 선선한 초가을 날씨 속에 펼쳐진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은 정오부터 바쁘게 무대에 오른 신예 밴드들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라인업은 지난해 부락의 등용문 라이징 스테이지를 장식한 이들. 개막식 축포를 쏘아 올린 스킵잭부터 카디, 밴드 바투, 지소쿠리 클럽은 1년새 몸집을 키워 전보다 많은 관객 앞에서 한층 성장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작년 방영된 엠넷 밴드 경연 프로그램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 출신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대회 우승자 터치드는 신인의 패기를 앞세워 록 인구에게 감동을 선사했으며 참가자에서 작금의 밴드 신을 이끄는 대세 그룹으로 성장한 나상현씨밴드와 라쿠나는 메인 스테이지 반대편 리버 스테이지에 수많은 인파를 집결시켰다.
올해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은 최근 불어닥친 J팝 열풍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난봄 국내 쇼케이스 성료 이후 반년 만에 내한한 이마세는 도회적인 선율과 메가 히트곡 'Night dancer'로 수천의 관객을 춤추게 했고 직접 적어 온 한국어 멘트를 수줍게 내뱉으며 매력을 어필했다.
다음은 베테랑 록밴드 텐피트의 무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에 연신 감사를 표한 이들은 올 초 신드롬을 일으킨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제곡 'Dai zero kan'과 '아리랑`을 쏟아내며 한일 문화외교에 적극 기여했다. 이 밖에도 일본 음악 신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유어네스와 널바리치, 올해 새 프론트맨 요스케를 영입한 스파이에어까지 반가운 얼굴들이 대거 등장하며 주말 동안 부산은 그간 숨어지내던 '샤이 J팝' 지지자들의 정모 현장이 되었다.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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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부산'인가? 관록이 돋보인 라인업
물론 라인업의 특색을 결정하는 건 아침 시간대의 신인 밴드와 중간중간 들어간 특색 있는 아티스트, 그리고 헤드라이너의 성격이 주된 요소일 테지만, 전반적인 퀄리티를 결정하는 요소는 바로 그 중간 다리를 연결하고 열기를 유지하는 일명 '허리 라인'. 과거 피아, 갤럭시 익스프레스, 마이앤트메리, 아시안체어샷, 쏜애플, 발룬티어스 등이 기반을 다지고 텃밭을 가꿨듯 올해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은 어김없이 베테랑과 중견 밴드의 총공세로 단단한 만듦새를 결정했다.
당신이 어느 페스티벌을 가더라도 어디선가 멀리서 중후한 저음의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면, 즉시 타임테이블을 확인해도 좋다. 보컬과 기타를 담당하는 이성수가 속한 3인조 하드록 밴드 해리빅버튼의 시간이 찾아왔을 터이니. 다양한 장르 뮤지션의 유입으로 페스티벌 지향성이 점차 가벼워지는 추세라면 묵묵히 헤비니스를 책임지며 '록 페스티벌' 정체성의 균형을 맞추는 팀이다. 쇳덩어리 질감의 연주가 쉴 틈 없이 몰아치는 'Planet of the apes', 'Circle pit'은 밴드의 건재함을 톡톡히 알리기 충분했다.
눈여겨볼 팀은 펑크의 뜨거운 심지를 품에 안고 상륙한 검엑스(GUMX)였다. 거진 20년 경력을 가진 이용원 주도의 이 3인조 밴드는 무시무시한 위력과 속도감으로 많은 이들을 흙먼지와 포옹케 했다. 또한 5년 만에 다시금 부산 잔디를 밟은 이브(Eve)의 공연을 기대하는 이들도 많았으니. 한 편의 뮤지컬 같은 탄력적인 완급 아래 녹슬지 않은 실력을 증명한 것은 덤, 기다려 준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며 부른 후반부 'I'll be there'는 감동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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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지칠 때쯤, 저녁 시간대를 장식하며 활력을 불어넣은 용병은 오늘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동시에 이에 상응하는 실력으로 매번 무대를 휘어잡는) 실리카겔과 새소년, 그리고 이승윤의 무대였다. 이미 수차례 검증되어 '믿고 듣는'의 칭호를 부여 받은 이들의 무대에 과연 의심을 품을 자가 있을까.
특히 지금 이 시대의 앤섬(anthem)이 된 'No pain'으로 출발해 펜타포트에서 공개한 신곡 'Tik tak tok'으로 마무리하는 실리카겔의 대장정은, 손목에 십자가 보호대를 한 팬들의 환호와 섞이고 다져지며 마치 시간이라는 속성이 방부제에 의해 멈추다 못해 역행하는, 젊음이 부유하는 초월적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그 화력을 체감한 것은 바로 부산 출신의 뮤지션 공연. 이들은 마치 본인의 홈그라운드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듯 더욱 강성하고 농도 짙은 에너지를 뿜어냈다. “부산 가자!” 토요일의 출발을 알린 창원 출신의 한로로의 무대는 말 그대로 '속이 꽉 찬' 오프닝을 장식했다. < 이상비행 >의 수록곡과 '거울', '입춘' 등 좋은 성적을 거둔 싱글로 먼저 내실을 채운 뒤, 중간중간 앙증맞은 사투리로 청중의 마음을 가뿐히 녹여 코팅했다고나 할까.
반면 일요일 오전 시간대의 소음발광은 완전히 '속을 뒤집어 놓는' 하드코어 무법지대의 무대였으니. 보컬 강동수의 진두지휘하에 수많은 인파가 몇번이고 월 오브 데스를 행하는 진귀한 광경이 펼쳐졌고, 거대한 써클핏 가운데서는 여러 골수팬이 모여 목숨을 내놓듯 절을 바쳤다. 가슴을 후벼파는 밴드 사운드에 맞춰 모두가 손을 들어 올릴 때는 수많은 < 기쁨, 꽃 >이 여울지는 광경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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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부락'의 하이라이트는 토요일 헤드라이너를 담당한 피닉스. 쨍한 선율로 귀를 잡아끄는 'Lisztomania' 신시사이저 도입이 터져 나오는 순간 단 한 순간도 눈을 떼기 힘든 마법 같은 80분이 이어졌다. 조금 더 보태자면 '올해'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을지. 단언컨대, 피닉스라는 그룹을 아는 이도 모르는 이도 현장에 있었다면 일심동체가 될 만큼 압도적인 위력과 친근함을 뿜어낸 무대였다. 몇 주가 지난 지금에도 그 여파가 아직 귀에 선명할 정도.
'Entertainment' 'Lasso' 'Girlfriend' 'J-boy' 'Tonight' 등 히트곡을 총망라한 셋리스트와 크기가 다른 두 사각형 무대를 입체적으로 활용한 연출, 음원과 거의 일치한 토마 마스의 안정된 보컬과, 프렌치 터치가 가미된 정교하면서도 능청맞은 멤버들의 연주력에 보는 내내 감탄을 감출 수 없었다. 반대로 우주로 뻗어 나갔다 미시세계로 접어드는 연출이 돋보인 'Love like a sunset pt. 1 & 2'에 이르러는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바라보기 바빴으니. 마지막까지 '1901'의 통통 튀는 선율만큼이나 관중 사이를 통통 튀어 다닌, 전매특허 크라우드 서핑은 흠잡을 데 없는 결말이었다.
록과의 접점이 희미하다는 이유로 사전에 많은 우려가 터져 나왔던 일요일의 헤드라이너이자, 젊은 힙합 뮤지션 키드 라로이의 무대는 예상치 못한 인이어 딜레이 이슈로 약 20분가량이 지연되며 일견 아쉬움을 낳았다. 그럼에도 공연에 돌입하자 무대를 종횡하는 체력과 왕성하고도 예상치 못한(?) 호응 유도로 (공연을 본 이들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공백을 상환하며 '부락'의 밤을 천천히 물들였다. (장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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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색 있는 콘텐츠로 가득했던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을 회고하며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은 양질의 라인업뿐만 아니라 관객 참여형 콘텐츠도 제공했다. 페스티벌 타임테이블이 공개되고 '김앤장 듀오'가 가장 기다렸던 무대는 주최 측이 야심 차게 준비한 히든 스테이지. 최강 신예를 가리는 '루키즈 온 더 부락` 경연이 종료된 후 이곳에선 '삼락 게임천국`과 '부락-노래자랑'이 펼쳐졌다.
진행자와 참가자들이 하나 되어 OX 퀴즈, 소맥 타기 대회 등 다양한 게임을 통해 경품을 나누고, 청중들은 스테이지 위로 올라가 각자 애창하는 노래를 부르며 아티스트 못지않은 무대 매너를 선보였다. 특히 페스티벌 전문 유튜버가 사회를 맡은 '부락-노래자랑'의 열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동 시간대 실리카겔 공연을 뒤로하고 삼삼오오 모인 관객들이 노래방 기계 반주에 맞춰 자우림의 '일탈`, 이장희의 '한 잔의 추억'을 합창한 순간은 올해 모든 페스티벌을 통틀어 가장 짜릿한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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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은 이미 부산 시민들의 전유물에서 전국 각지의 록 팬들을 끌어당기는 대형 관광상품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전국구 인지도를 보유한 지역 의류 브랜드와 협업을 통해 머천다이즈 상품을 출시하고, 돼지국밥을 비롯한 부산 대표 음식을 판매하는 등 개최지의 특색을 살린 콘텐츠가 페스티벌의 경쟁력을 창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을 향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록 마니아들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지난해를 되짚어 보자. 음향 사고로 서브 헤드라이너 넬의 무대가 전격 중단되고 급격히 늘어난 수용 인원을 감당하지 못해 입장 단계부터 다양한 운영 관련 불만들이 빗발쳤다. 올해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을 향한 우려의 목소리가 유독 컸던 이유다.
명백한 실책을 인정한 주최 측은 올해 입장 줄 최적화와 화장실 증설, MD 예약 시스템 등을 도입해 관객 편의 증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사이트 곳곳에 안전 요원을 배치해 완벽에 가까운 현장 통제 능력을 선보인 것도 인상적이었다. 돌아가는 길 “작년 후기 보고 걱정했는데 운영 정말 깔끔하네”라는 칭찬이 여기저기서 쏟아진 걸 보니 일전의 오명은 말끔히 씻겨 내려간 듯했다. (김성욱)
글 : 김성욱, 장준환
사진 : 부산문화관광축제조직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