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 뻔할 수 있는 구성을 뒤흔드는 것은 새로운 수용에 있다. 2011년 스튜디오 앨범 < James Blake >로 시작한, 알앤비와 소울 스타일 보컬에 짙푸른 우울함을 흠뻑 끼얹은 그의 화풍이 < Klavierwerke > EP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 Playing Robots Into Heaven >에서 강조되는 기계적 질감과 극적인 터치는 평단의 주목을 받는 계기였으나 정작 정사(正史)에 편입되지는 못한 전사(前史) 격의 작품인 두 EP < The Bells Sketch > 그리고 < CMYK >와 일부 맞닿아 있다. 반복적인 리프 위를 오직 라가 트윈스(Ragga Twins)의 랩 샘플로만 채운 'Big hammer'를 첫 싱글로 택한 그의 결정이 곧 음반의 방향성을 함축한다.
앨범 대부분은 침울한 고립을 주도하던 기존 음악의 인상과는 달리 소극적으로나마 움직임을 유도한다. 차가운 음색의 피아노와 제임스 블레이크의 희뿌연 목소리라는 익숙한 조합이지만 그 아래에 깔린 리듬의 존재감이 미세한 역동성을 덧붙이는 첫 트랙 'Asking to break'가 그 신호탄. 레이저 건처럼 신시사이저 비트를 쏘아대는 'Tell me', 개러지 스텝에 기초한 'Fall back'과 기묘한 그루브를 자아내는 'He's been wonderful' 등이 곰팡이 핀 눅눅한 방구석에서 캄캄한 지하실 기괴한 레이브 파티로 장소를 옮긴다.
갑작스럽게 보여도 변화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먼저는 젊은 유령처럼 막을 올린 그의 디스코그래피가 세상에 점차 스며들면서 신체를 획득하는 서사를 완료했음이 그 원인이다. 환경적 측면에서도 아웃사이더의 지위에서 뱉어낸 멜랑콜리의 안개가 트래비스 스캇과 비욘세 등 여러 뮤지션과의 교류를 거쳐 대중음악의 대기를 구성하는 주 성분으로 등극한 상태. 물론 창시자 격이긴 하나 그의 음악적 특색 또한 기존의 독보적인 지위에서는 많이 물러났을 뿐더러 스스로도 < Assume Form >을 기점으로 우울증과 자기혐오의 세계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뒤흔들기를 요구받는 시점이다.
물론 제임스 블레이크의 음악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적 장벽이 있기에, 코로나19를 거쳐 댄스 음악의 지위가 격상한 판세에 마냥 영합하는 움직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음반을 아우르는 무질서와 도취의 기운은 < Playing Robots Into Heaven >이 흑인 음악 기반의 여성 중심 댄스 트렌드에 맞서는 고상한 백인 남성의 구도, 즉 쾌락주의에 반기를 든 이성주의의 항거로 보일 여지를 차단한다. 그가 늘 고집스럽게 내면의 소리를 좇은 뮤지션이었음을 고려하면 신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아 탐구의 연장이다. 몸의 대변자인 목소리를 삭제하고 사운드라는 영혼만을 남긴 이원론적 구조와 동적 감각을 중시하는 반이성주의적 관점의 역설적 합치는 그 어떤 미래도 아닌 스스로의 과거와 연결되며 총체적인 순환의 그림을 그린다.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 제7의 봉인 >의 결말에서는 끝을 맞이한 인물들이 손을 잡고 '죽음의 춤'을 춘다. 언뜻 비슷하게 보이나 앨범 커버 속 제임스 블레이크는 행렬 속에 홀로 언덕을 오르고 있다. 그렇기에 아직 그가 걷는 경로 또한 종말 대신 삶의 길이다. 묵묵히 수행을 거듭하는 음악가는 어쩌면 기독교적 구원 세계의 신자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고뇌와 발걸음, 그리고 그 속에 피어나는 무아지경을 향한 갈망. < Playing Robots Into Heaven >는 결과가 아닌 수단으로서의 회귀다.
-수록곡-
1. Asking to break

2. Loading

3. Tell me

4. Fall back
5. He's been wonderful
6. Big hammer

7. I want you to know
8. Night sky
9. Fire the editor
10. If you can hear me
11. Playing robots into hea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