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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도는 마치 기타를 멘 황혼의 검객과도 같다. 블루스부터 사이키델릭, 포크와 같이 다양한 검술을 섭렵한 것과 더불어, 여러 지역과 나라를 돌며 공연을 펼친 그 뒷모습이 흡사 낭만을 찾아 방랑하는 무사의 모습으로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수많은 땀방울이 있었다. 2009년, 상상마당에서 집계한 '올해 가장 많은 공연을 펼친 밴드'라는 수식어가 그들의 노력과 열정을 대변한다.
“블루스는 영혼의 빛깔이라 생각한다”는 그의 대답처럼, 지난 시간은 본연의 '블루스'를 다듬고 굳혀온 연마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다가올 후속작에서 날카롭게 갈린 칼날이 그 공백의 벽을 베어내려 하고 있다. 조금은 쌀쌀한 10월의 밤, 홍대 인근의 사무실에서 그와 만나 인천에서의 추억과 진중한 음악 이야기로 온기를 나누었다. 뚜렷한 눈빛에서는 그가 가진 단단한 신념이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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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지.
처음 악기를 만지고 작곡을 한 건 중학교 1학년 때부터다. 부모님께서 인천 남동구 만수동에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셨고,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악기만 다루면 또 재미없으니 자연스럽게 노래도 시작하게 됐다. 대학은 회화과에 진학했지만 밴드 동아리 활동에 치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처음으로 나만의 밴드를 조직해 자작곡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스물세 살 시절 록밴드 슬리핑 잼이다.
멤버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친동생(박상명)이 드럼을 잘 쳤다. 그때 동생도 다른 대학에서 밴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고, 밴드 제의를 보내면서 혹시 괜찮은 베이시스트와 기타리스트가 있는지 물어보니 한 학년 선배인 안성진(베이스)을 소개해줬다. 때마침 기타 자리에 신치범을 소개받아 넷이서 밴드를 꾸리게 되었다.
그러던 도중 슬리핑 잼이 하던 포크 록에서 좀 더 블루지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2006년 말 슬리핑 잼을 해체한 뒤, 거의 동일한 멤버로 써드스톤을 만들게 되었다. 1집 녹음을 마칠 무렵 동생이 실용음악과에 입학하면서 밴드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되다 보니, 안성진의 친동생인 안성용을 밴드의 드러머로 새로 영입해 활동을 이어 나갔다.
블루스로 전향하려 했던 계기가 있었을까.
2004년 무렵에는 공연을 자주 했다. 재머스, 롤링스톤즈, 바다비… 웬만한 홍대 라이브 클럽도 많이 다녔고, 무엇보다 연습실이 인천의 부평 남부역에 있었기에 가까웠던 '락캠프'에서 매주 공연을 했다. 모든 공연이 끝나면, 락캠프의 정유천 사장님이 그날 공연한 뮤지션과 무대에 올라 즉흥 잼을 한다. 이 무렵 훗날 거츠(GUTZ)라는 밴드의 리더가 되는 전두희라는 친구도 만났는데, 나는 그 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들은 이미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었고, 비슷한 뮤지션을 찾아 듣다 스티비 레이 본이나 도어즈 같은 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블루스와 사이키델릭에 눈을 뜨게 되었다. 매력을 늦게 안 거다.
써드스톤의 로고도 히피 폰트고, 첫 트랙인 '오래된 것이 좋아' 역시 어찌 보면 과거 음악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그 당시 지미 헨드릭스의 'Third stone from the sun'이라는 곡을 듣고, 60년대에 어떻게 이런 괴상망측하면서도 매력적인 음악을 만들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이런 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 밴드 이름은 곡의 앞 단어를 딴 '써드스톤'으로 짓게 되었다. 아직도 내 공연의 엔딩은 항상 이 멜로디가 장식한다.
재미있게도 2집의 제목은 반대의 의미인 < I'm Not A Blues Man >으로 삼았는데.
이때가 안성용(드럼)이 군대에 가고, 안성진(베이스)과는 음악적 방향이 달라 갈라서게 되면서 마침 군대를 갓 제대한 순천 출신의 허문녕과 김치성과 의기투합한 시절이다. 블루스의 명인이 되고 싶은데, 아무리 녹음해도 원하는 느낌의 외국 블루스 사운드를 표현할 수 없더라. 성인이 되어 뒤늦게 영어를 배우더라도 어릴 때부터 구사하던 친구들의 그 유창한 어휘나 발음을 쉽게 따라 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길을 계속 추구하고 싶고, 그 마음가짐을 대변하기 위해 < I'm Not A Blues Man >이라고 짓기로 결심했다. 전작 1집이 블루스 록, 펑크(Funk), 뉴에이지 연주곡 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어설프게나마 해보는 과정이었다면, 2집은 블루스에 좀 더 특화된 곡을 추려 만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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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갑작스레 미국 유학을 떠난 배경이 궁금하다.
멤버들 모두 부평 남부역에서 다 같이 살고 있을 때, 내가 돌연 한국에서 음악을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난 이만큼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세상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2009년 상상마당에서 집계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연을 많이 한 밴드로 우리(써드스톤)가 꼽힌 적 있다. 그만큼 공연도 많이 했고 앨범도 두 장이나 냈기에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던 상황이었다.
감사하게도 조덕환 님의 공연 세션 제의를 받아 투어 활동을 함께 다닐 때였다. 세션으로 설 때는 관객 반응이 폭발적인 것에 반해 정작 내 공연은 파리만 날리는 거다. 일종의 냉탕과 온탕을 계속 오가는 기분이었다. 이럴 바에는 미국에서 한국 출신의 슈퍼 기타리스트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치기 어린 마음으로, 현지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연습실을 다 처분하고 LA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미국 유학 이후 얻은 것이 있었을까.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다 내려놓게 된 것 같다. 미국 뮤지션들과 함께 무대에 서 연주하면서 '아,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더라. 이때 정통 블루스를 아이덴티티로 삼기보다는, 다른 사이키델릭 요소나 한국적인 것을 접목한 나만의 블루스 스타일 개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돌아온 복귀작 3집 < Psychemoon >이 한국대중음악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며 평단의 인정을 받았는데.
배경을 잠깐 설명하자면 미국에 다녀온 반년 동안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2집의 멤버들은 다른 밴드로 갔고, 나는 또 다른 멤버와 작업을 해보고 싶어 사람을 구하고 있던 상황이다. 마침 군대에 갔던 성용이가 제대했고, 이제 또 락캠프에서 만나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 한두수라는 친구와 밴드를 하게 되었다. 일단 셋 다 88년생 동갑이었고 음악적인 얘기가 잘 통했다. 그래서인지 3집 < Psychemoon > 앨범에는 그런 호흡이나, 미국에서 얻었던 교훈들이 소소하게 담겨있다. 사이키델릭과 블루스의 혼합은 물론 우리나라 민요 '쾌지나칭칭나네'를 삽입해 한국적 사이키델릭 록을 시도하기도 했으니까. 여러모로 그 때가 음악적 수준이 높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블루스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생각하는 블루스는 뭔가 연습하거나 테크닉적인 기술로 표현될 수 없는 그 사람의 타고난 감성 내지는 살아온 삶, 그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영혼의 빛깔이라고 생각한다. 옷이나 외모는 언제든 바꿀 수가 있지만 영혼은 못 바꾸지 않나. 그러니 블루스 앞에서는 누구든 솔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블루스 연주자의 공연에는 자신만의 블루스가 있다.
지금은 자기만의 블루스를 찾았는지.
이제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다 보니 나만의 색이 잡혔다. 지금 당장 미국에 가서 그 지역의 뮤지션과 공연해도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미시시피나 루이지애나 출신의 전통 블루스를 구사하는 분들은 따라 할 수 없겠지만, 블루스 기반의 사이키델릭 스타일로 가면 나만의 느낌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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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검도 도장을 운영했다고 들었다.
2016년 말부터 약간 번아웃이 왔다. 열심히 쭉 달리다보니 육체적 에너지는 아직 많이 남았지만 정신적인 에너지가 떨어지는 거다. 사람은 비단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피트니스도 필요하지 않나. 음악가로서 정말 괴로운 시기였고, 문득 중고등학교 시절에 검도를 했던 기억이 떠올라 도장에 찾아갔다. 성인이 되어 접한 검도에는 어릴 때 느끼지 못한 깊이가 있었다. 이후로 검술에 심취하게 되어 2019년 10월부터 3년이 좀 넘게 검도 도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예명에서 이름을 딴 '태앙 원도류'라는 곳이었는데, 지금도 유튜브에 치면 영상이 나온다.
후속작 계획이 있는지.
지금 3집 멤버였던 한두수가 운영하는 녹음실 '수 스튜디오'에서 후속작을 작업하고 있다. 한두수는 프로듀싱 능력이 정말 좋다. 3집 < Psychemoon >이 잘 될 수 있던 이유도 내가 못 본 부분을 그 친구가 멋지게 다듬어 준 덕분이었다. 음악적 성과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때는 힘이 너무 넘쳐 모든 소리를 꽉꽉 채우려 하던 시기다. 그래서 후속작은 전작보다 여백의 미를 가지면서 연륜의 묵직함을 가진, 그런 작품이 될 예정이다.
펜타포트 무대에도 여러 번 섰었는데,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펜타포트는 늘 항상 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내렸는데, 그러면 스테이지가 진흙밭이 되지 않나. 진흙 때문에 무대가 더러워지면 안 되니 주최즉에서 주차장부터 가는 길부터 무대까지 레드카펫을 깔아준 기억이 난다. 그때 살면서 레드카펫을 처음으로 밟아봤다.
시대가 변하면서 음악 업계가 변화하고 있다. 체감이 되는지.
올해 초부터 여기저기서 공연 영상 제작에 대한 제안이 많이 오고 있다. 스마트폰 이전은 영상을 찍기 어렵던 시절이다. 촬영을 하려면 디지털카메라나 캠코더가 필요했고, 유튜브도 나중에 성행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영상물을 찍어주겠다는 제안뿐만 아니라, 녹음과 편집도 제대로 해서 양질의 퀄리티 영상을 제작해주는 채널들이 많아졌다. 한국의 '타이니 데스크'를 꿈꾸는 채널도 많이 생겼고. 요즘은 영상물이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오늘날 음반은 약간 명함이 되었고, 제대로 된 뮤직비디오나 라이브 영상이 더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지원적인 면에서 변화는 없었나.
최근에는 밴드 관련 지원 사업이 많이 활성화되었다. 써드스톤도 이번에 인천 음악 창작 지원소라는 곳에서 발탁됐고, 이번 EP 앨범의 녹음부터 뮤직비디오, 발매까지 제작 지원을 받게 되었다. 요즘은 거의 지역별로 음악 창작 지원소가 있는 것 같더라. 정말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옛날만 해도 음악을 하려면 모두 서울로 올라와야 했는데, 요즘은 지방에도 로컬적인 지원이나 인프라가 잘 형성되었으니. 우리도 곧 대구와 부산에서 공연할 계획이고, 심지어는 제주도에도 일정이 있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음악을 할 수 있는 글로벌 시대가 된 것 같다.
마침 코로나도 줄어들었겠다, 갓 스무 살이 되어 록 밴드를 시작하는 젊은 친구들에게는 지금이 참 좋은 시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부터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 음악을 여과 없이 보고 자란 데다, 영어 교육도 잘 받은 세대이기 때문에 사운드적으로 보나 보컬 스타일로 보나 국가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해외와 차이가 없다. 이젠 정말 음악에 국경이 없어진 거다. 그런 면에서 시대가 좀 확실히 변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음악을 시작한 지도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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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인천의 모습은 어땠나.
사실 인천의 락캠프만 해도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관객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공연도 매일 새벽까지 하고. 근데 내가 공연을 제대로 시작했을 2004년 무렵에는 인천은 물론 홍대에서도 슬슬 인디에 대한 열기가 식던 시기다. 야구 선수로 치면 이제 막 근육을 키워서 백 미터 달리기를 10초 대로 만들고 장타 연습까지 끝마쳤는데, 정작 구단을 찾아갔더니 관객이 아무도 없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기억하는 2004년의 인천은 옛날의 영광을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조금은 쓸쓸할 수도 있는 어두운 골목길에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2000년대 중반이 인디 암흑기인 것 같다.
약간 저주받은 시기에 데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제대로 밴드를 시작한 게 2004년인데, 국내 인디 신은 어떻게 보면 2000년대 초반까지가 피크였으니까. 1990년대 중반은 대학로 소극장 무대가 중심이 되던 시절이니 실력만 있으면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찾아가는 구조였다. 공연이 잡히면 막 2주 동안 목이 쉬도록 논스톱 릴레이로 진행하기도 했고. 여러모로 낭만의 시대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인디는 상황이 많이 개선된 것 같은지.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 < TOP 밴드 >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도 생기지 않았나. 무엇보다 2010년대로 넘어가면서 < 네이버 온스테이지 >와 < 헬로루키 >가 생겼을때 인디 신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올해 AOA 초아와 함께 SBS의 예능 프로그램 < DNA 싱어 >에 출연했다.
어떻게 된 거냐면, 초아에게 방송 작가가 요즘에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혹시 친척분 중 노래를 잘하는 분이 없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초아가 이제 나를 아니까 음악 하는 분이 있다면서 소개했고, 그렇게 작가에게 연락을 받아 출연하게 되었다. TV에서 봤다고 알아보는 분도 계시더라. 재밌는 경험이었다.
사실 록 밴드는 공중파 방송에 설 기회가 잘 없지 않나.
지금도 인디 지향적인 음악을 하고 있지만 KBS나 MBC, SBS 같은 방송 3사에 출연하고 싶은 꿈은 늘 가지고 있다. 뮤지션이라면 당연히 그런 곳에 나가야 한다고 생각도 하고. 하지만 마니아적인 음악으로는 공중파나 유명 프로그램에 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때는 어떻게 운이 좋아서 친척 동생 덕분에 나갈 수 있었지만, 이런 데를 진짜 내 음악으로 나가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국내의 많은 훌륭한 인디 뮤지션들을 조명해주는 곳이 앞으로 생겨날 것이라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
본인을 음악인의 세계로 이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나 뮤지션을 꼽는다면.
내 음악의 큰 두 가지 줄기가 바로 포크와 록이다. 포크 쪽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김광석과 한동준의 노래를 너무 좋아했고, 그런 순수한 감성을 굉장히 좋아한다. 록 쪽으로 가면 이제 강산에, 윤도현 밴드를 꼽고 싶다. 모두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분들이다. 외국에서는 내 음악 스타일인 지미 헨드릭스와 스티비 레이 본. 이 두 사람이 현재 나의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행 :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정수민
정리 : 장준환
사진 :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