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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급 연주자들로 구성된 사랑과 평화는 탄탄한 연주에 기반한 세련된 사운드로 한국 밴드 음악에 프로페셔널리즘을 도입했다. 그중 대중에 덜 알려졌을 뿐, 밴드의 원년 멤버인 이철호는 다사다난을 거쳐 1995년 5집 < 사랑과 평화 5 >부터 현재까지 구심점을 담당한 핵심 인물 중 하나다. 음악을 한지 어언 54년을 맞이한 소리 장인을 만나 부평문화재단에서 값진 인터뷰를 가졌다. 그의 언급 속에서 1970, 1980년대 한국 대중 음악의 지형도를 그린 무수한 인물과 밴드들이 피어올랐다.
'난동'이란 말이 생각날 정도로 이철호는 유례없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청년기부터 오티스 레딩,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켓 같은 미국 소울, 펑크(Funk) 뮤지션들의 세례를 받은 그는 국내에서 드물게 흑인음악의 원초성을 몸으로 표현한다. 일흔의 나이라고 믿기 힘든 군살 없는 몸매가 무대에 쏟아부은 에너지를 증명했고 인터뷰를 마치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뒷모습은 청년의 그것이었다. '음악을 직업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좋아서 할 뿐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사랑과 평화의 백 년 역사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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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음악을 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처음 팀을 꾸린 게 1964년 중학교 3학년 때다. 그 이후 원래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탁구를 치다 탁구선수로 동산고로 갔고, 2년 정도 다니다 1968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그때 결성된 팀 이름이 '피스'다. 인천 사람들로 이뤄진 팀이었다.
애스컴에서 공연한 적은 없는 걸로 안다.
사실 부평은 그때만 해도 번화가는 아니었다. 극장이 많은 신포동과 클럽이 모인 중앙동이 핵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초창기 음악은 그쪽에서 주로 활동하게 되었다. 뱃사람, 미군 등 다양한 외국인이 주둔한 신포동에서 클럽 문화를 접했고, 그때 내 몸 안에 흑인 음악이 들어온 것 같다.
그렇다면 이철호에게 인천은 어떤 의미인가?
태어나고 자랐으니 고향 그 자체다. 고향이 인천 율목동이고 창녕국민학교와 송도중학교, 동산고등학교를 거쳤다.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음악을 시작한 게 1968년이니, 무려 54년이 흐른 셈이다. 파주 선유리 기지촌에서 미8군 상대로 음악을 시작했고, 소위 '일반'이라고 부르는 부대 밖 무대에서도 공연했다.
사랑과 평화 이전 활동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
이남이, 김기표, 동포라는 닉네임이 더 익숙한 문영배 등이 함께 속했던 '영 에이스'가 와해하면서 이남이는 '신중현과 엽전들'로 갔고, 다른 둘은 '최헌과 호랑나비'로 갔다. 나는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함과 동시에 '파이오니아'라는 밴드 소속으로 풍전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다. 당시 그 팀의 리더는 차영수. 영 에이스에 가입한 이후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몇 차례 이합집산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론 이철호(보컬,퍼커션) 최이철(기타), 김태욱(베이스), 철이와 아이돌스에서 활동하던 김태흥(드럼), 김명곤(키보드,색소폰)으로 라인업이 확고해졌다. 이 멤버 그대로 '서울나그네'가 되었다.
50년 넘게 음악을 하면서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은 무엇이었는지?
사랑과 평화의 전신인 '하드락스' 시기가 가장 좋았다. 같은 구성원으로 일반에서는 서울나그네로 활동했다. 미8군 오디션에서 스페셜 A 등급을 받고 동두천, 의정부 등지에서 하우스 밴드를 할 때가 가장 만족스러웠다.
미8군에서 공연한 곡들은 무엇이었나.
당시 유명한 흑인음악은 다 했다. 애버리지 화이트 밴드(Average White Band), 브라더스 존슨(The Brothers Johnson),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의 곡을 커버했고 맨하탄스(The Manhattans)의 'Kiss and say goodbye', 뉴 벌쓰(New Birth)의 'Wildflower' 도 주요 레퍼토리였다. 원래 내 포지션은 보컬이었고 미8군 시절 흑인음악을 하면서 봉고와 콩가도 다루게 되었다. 최이철은 가성이 좋아 마빈 게이의 노래를 주로 불렀고 다른 멤버들도 코러스 정도는 할 만큼 노래 실력이 출중했다.
음악적으로 본인을 채우는 시기였던 것 같다.
그렇다. 1975년~77년 사이 부산까지 가서 활동했다가 서울의 나이트클럽 '무겐'에서 사랑과 평화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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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1978년에 발매된 1집을 만들기 시작한 1977년도부터라고 보면 된다. 이장희, 조영남 등이 무겐에 자주 놀러 왔고 결과적으로 이장희에게 대표곡 '한동안 뜸했었지'와 '장미'를 받았다. 펑크(Funk) 음악은 생소한데다 춤추기도 어려웠지만, 나와 이남이가 선동을 잘했는지 관객들의 호응이 좋았다. (웃음)
'한동안 뜸했었지' 시절의 라인업은 어떻게 되나?
이철호, 이남이, 최이철, 김태흥, 이근수다. 이근수는 김명곤이 전역하기 전에 대타로 들어온 멤버다. 미8군 오디션을 봐서 스페셜 A 등급이 나온 라인업이기도 하다. 공연이 7시에 시작한다면 4시부터 마음이 흥분되고, 끝나면 무대를 더 하고 싶을 정도로 열정이 넘치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왜 1집의 크레디트에는 이철호의 이름이 없나?
1집 크레디트에 오른 건 최이철(보컬/기타), 사르보(베이스), 김태흥(드럼), 김명곤(보컬/키보드/알토 색소폰) 이근수(키보드)다. 이탈리아 출신 베이스 연주자 사르보는 사실 나이트클럽에서만 활동한 멤버다. 나와 이남이는 이제는 많이 알려진 모종의 문제가 있어서 크레디트 표기는 물론, 나이트클럽에서의 활동도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처음 서울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멤버는 이철호, 이남이, 이근수, 김태홍, 김명곤, 최이철 6인이고 베이스 레코딩은 전부 이남이가 한 것이다. 나는 퍼커션으로 몇 곡 참여했지만 메인 보컬과 코러스를 녹음할 시점에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목소리를 싣지 못했다.
사랑과 평화 2~4집에 모두 참여하지 못한 것인가.
그렇다. 하지만 '검은나비'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검은나비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신중현과 더 멘의 일원이자 검은나비 1기였던 손학래와의 인연으로 검은나비에서 활동했다. 화려한 무대 매너로 나름 인기를 끈 기억이 난다. 1981년도 '청바지 아가씨'를 발표했는데 그때는 이영이라는 이름을 썼다. 작곡가는 손학래로 되어있으나 원래는 사랑과 평화의 곡이다. 다만 '설레이는 내 마음 그대는 알까 / 부풀은 내 마음을 어떻게 전할까'라는 후렴구는 녹음하면서 추가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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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이후로도 공연은 함께했다. 사랑과 평화가 대중음악계에서 한 역할은 무엇일까?
그전까지는 개인 기량과 연주력 등을 따지지 않았지만 사랑과 평화는 달랐다. 멤버 전원이 확고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들고나온 음악 자체도 신선했다. 이장희가 처음 들려준 '한동안 뜸했었지'는 포크 록 스타일이었지만 사랑과 평화를 통해 펑크(Funk) 스타일로 재탄생했다.
이철호 선생은 지금도 사랑과 평화를 지키고 있다. 현재의 멤버는 어떻게 되는가?
건반주자 이권희가 1999년에 들어왔으니 현 멤버 중에선 나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멤버라고 할 수 있겠다. 베이스 박태진은 2011년에 들어왔고, 우리 팀 막내이자 기타리스트는 이해준이 2014년에 들어왔다. 사랑과 평화의 사운드 확립에 기여했던 '맛드럼' 이병일의 후임인 박상열 드러머는 3~4년 전에 들어왔다.
2006년에 세상을 떠난 故 이병일의 드럼을 '맛드럼'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드러머는 펑크 밴드의 지휘자다. 드러머의 실력에 따라 프로와 아마추어가 결정된다. 이병일은 이러한 드럼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지한 연주자였다.
흔히 말하는 사랑과 평화가 이철호 체제로 재탄생한 시기는 1995년인데, 5집부터 지금까지 낸 9집까지 가장 자랑스러운 곡은 무엇인가?
이: 5집은 '못생겨도 좋아', 6집 '얼굴 보기 힘든 여자'가 기억에 남는다.
어릴 적부터 흑인음악에 꽂힌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음악이 기억나는지.
벤 이 킹의 'Stand by me', 윌슨 피켓(Wilson Pickett), 오티스 레딩 등의 음악을 많이 접했다. 느린 곡에서도 샤우팅 창법을 주로 구사해서인지 다들 폭발적인 보컬로 인식하지만 진득한 발라드곡도 다수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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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난동'이라 할 정도로 퍼포먼스가 강렬하다. 보컬리스트로서 이철호의 색깔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켓, 오티스 레딩 아티스트의 과격하게 지르는 창법을 참고했다. 물론 리듬감과 무대에서의 흥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웃음)
올해 사랑과 평화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10집을 구상 중이다. 멤버들이 각각 두 곡씩 작곡하기로 했다. 10월에 인천 서구문화회관에서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다. 올해는 특히 인천 공연이 많다. 12월에는 무려 하와이 공연도 계획되어 있다.
앞으로도 좋은 무대를 보여주면 좋겠다.
현재 이철호의 후임으로 점찍어둔 보컬이 한 명 있다. 무대를 떠나게 된다면 그 친구가 나를 대신했으면 한다. 사랑과 평화를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랑과 평화가 이철호의 것은 아니지 않는가.
역사의 것일까.
그렇다. 50년, 100년 이상 이어 가길 바란다.
인터뷰 : 임진모, 백종권, 염동교, 한성현
정리 : 염동교, 한성현
사진/편집 : 백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