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기세가 조금씩 저물자 삭막했던 극장가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구촌 곳곳에는 흥미로운 작품 소식들이 당차게 고개를 내미는 추세다. 이러한 스크린 흐름에 발맞춰 IZM이 무비(Movie)와 이즘(IZM)을 합한 특집 '무비즘'을 준비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의 명예를 재건하고 이름을 기억하자는 의의에서 매주 각 필자들이 음악가를 소재로 한 음악 영화를 선정해 소개한다. 열다섯 번째는 소울의 천재 레이 찰스의 전기를 다룬 영화 < 레이 >다.
'소울의 천재' 레이 찰스는 음악을 위해 태어났다. 경이로운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 밴드 리더였던 그는 흑인음악 발전에 뚜렷한 공적을 세우고 팝과 컨트리까지 섭렵하며 반세기 넘는 기간 대중음악 전반에 광범위한 궤적을 남겼다. 레이 찰스 사후 1년 뒤 개봉된 < 레이 >는 천국으로 떠난 거장의 업적과 아킬레스건을 동시에 조명한다. 작품은 환한 미소와 검은 선글라스에 가려진,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점에 도달한 한 남자의 고군분투를 면밀히 살폈다.
영화는 미혼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미 남부 조지아주의 상징이 된 레이 찰스 로빈슨의 유년 시절을 추적한다. 생계 수단과 아버지의 부재로 발생한 가난이 가족을 흔들었지만 두 형제는 강인한 어머니의 품 안에서 밝고 긍정적인 자아를 형성했다. 일찍이 마주한 고난에서 음악으로 위안의 찾은 레이는 동네 가게에서 피아노를 비롯한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재능을 싹 틔웠다.
비극은 다섯 살이 되던 해 찾아왔다. 동생 조지의 익사 사고를 눈앞에서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어린 소년은 유일한 형제를 잃은 뒤 큰 충격과 함께 트라우마를 안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녹내장이 찾아온 레이는 서서히 시력이 감퇴하여 7살에 완벽히 시력을 잃는다. 그는 하루아침에 빛을 잃어버렸지만 아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심어준 어머니의 현명한 지도 아래 세상을 청각으로 탐색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음악과 소리는 언제나 안식처를 제공했으며 꿈을 꾸게 했다. 목표를 안고 시애틀로 거주지를 옮긴 뒤 시작은 나이트클럽 무대. 백인 밴드의 건반 연주자로 출발한 레이는 남부 지역 출신답게 컨트리 장르에 발군의 감각을 선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되려 앞을 볼 수 없었던 젊은 천재의 재능에 착취와 사기로 보답했다. 자신 이외에 아무도 믿을 수 없었기에 유일한 돌파구는 더 좋은 노래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얼마 뒤 신인 뮤지션을 탐색하던 아틀란틱 레코드의 레이더에 현란한 연주와 완벽한 냇 킹 콜 모창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한 뮤지션이 포착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남의 노래가 아닌 자작곡의 필요성을 느낀 레이블의 제안에 소울의 천재는 'Mess around'를 써내 단숨에 미국을 사로잡는다.
목사의 딸 델라 베아와 사랑에 빠진 뒤 레이 찰스는 독특한 접근법으로 진정한 개척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성가를 모욕했다는 신도들의 규탄에도 불구하고 가스펠에 블루스와 소울을 접목한 혁신적인 크로스오버는 'I got woman'과 "Hallelujah i love her so'라는 불멸의 히트곡을 배출해낸다. 그는 다채로운 스펙트럼과 정교한 장르 결합으로 음악적 혁명을 일으키면서 특유의 정갈한 슈트와 검은 안경, 그리고 활짝 웃는 얼굴을 항상 유지했다.
헤로인 중독과 고질적인 여성 편력. 뮤지션으로서의 위상과 업적이 쌓여갈수록 반대급부도 역시 증가했다. 레이는 투어 도중 면도 가방에 항상 마약 키트를 들고 다녔으며 다수의 백 코러스 멤버와 복잡한 이성 관계를 맺었다. 아틀란틱을 떠나 ABC 레코드와 음반 제작의 전권을 보장 받은 대형 계약을 체결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백 보컬 걸그룹 라엘레츠의 마지 헨드릭스와 6년 동안 부적절한 외도를 이어갔다.
약물은 음악가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 먹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음악 실험의 촉진제가 됐다. 'What I'd say'와 'Hit the road Jack', 그리고 컨트리를 결합한 'I can't stop loving you'까지. 모두 명곡을 끊임없이 갈망한 레이가 헤로인과 씨름하던 중 세상에 나온 클래식 넘버다.
음악만을 향한 열망은 결국 헤로인 집착으로 연결되어 제 발목을 잡았다. 16살 때부터 마약에 손을 대며 중독 증세와 불안에 잠식된 레이 찰스는 결국 1964년 재활 클리닉에 입원한다. 금단 현상의 고통 속에서 의지를 바로잡은 건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이었다. 그는 삶의 버팀목이었던 어머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굳은 결심을 되새긴 끝에 중독을 끊어낼 수 있었고 이후 눈 감는 순간까지 주옥같은 음악을 대중에게 선물했다.
레이 찰스는 용감했다. 그는 시력과 가족을 잃은 시련 앞에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큰 꿈을 품었다. 가난한 소작인 집안의 시각장애인 아이가 '대부'의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언제나 밝아 보이는 줄만 알았던 웃음 뒤에 숱한 고난이 자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체적 한계와 인종 차별, 불안이 초래한 약물 중독을 모두 이겨낸 건 결국 자신이었다.
조지아주의 정식 주가로 지정된 대표곡 'Georgia on my mind'가 흘러나오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 레이 >는 위대한 음악가의 열정과 결점을 과감히 드러내 그와 관객과의 심리적 거리를 성공적으로 좁혔으며 스크린 너머 들리는 거룩한 유산에 귀 기울이게 했다. 미국이 사랑한 진실된 인간이자 긴 세월 대중음악계를 찬란하게 수놓은 시대의 아티스트 레이 찰스, 우리는 여전히 그를 그리워한다.
- 영화에 사용된 음악 목록 –
1. Mess Around
2. I've got a woman
3. Hallelujah i love her so (Live)
4. Drown in my own tears
5. (Night time is) the right time
6. Mary Ann
7. Hard times (No one knows better than i
8. What'd i say (Live)
9. Georgia on my mind
10. Hit the road Jack
11. Unchain my heart
12. I can't stop loving you (Live)
13. Born to lose
14. Bye bye love
15. You don't know me (Live)
16 Let the good times roll (Live)
17 Georgia on my mind (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