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기세가 조금씩 저물자 삭막했던 극장가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구촌 곳곳에는 흥미로운 작품 소식들이 당차게 고개를 내미는 추세다. 이러한 스크린 흐름에 발맞춰 IZM이 무비(Movie)와 이즘(IZM)을 합한 특집 '무비즘'을 준비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의 명예를 재건하고 이름을 기억하자는 의의에서 매주 각 필자들이 음악가를 소재로 한 음악 영화를 선정해 소개한다. 첫 번째 차례는 한국 대중음악의 투사 정태춘과 박은옥의 전기를 다룬 < 아치의 노래, 정태춘 >이다.
서정적인 멜로디부터 냉철한 현실 비판의 노랫말까지, 정태춘의 음악은 우리 사회와 함께 오랜 세월 숨 쉬며 맥을 유지해왔다. 전설적 존재의 데뷔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 아치의 노래, 정태춘 >은 주인공 정태춘을 비롯한 주변 인물 및 평론가와의 인터뷰, 콘서트에서의 감동을 생경히 옮긴 공연 실황을 정교히 엮어 만든 음악 다큐멘터리다. 시대별 대표곡들을 찬찬히 되짚으며 따라가 본 그의 발자취 곳곳엔 대한민국 그리고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가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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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포크의 서막
등장부터 범상치 않았다. 음대 진학을 꿈꾸다 실패하고 입대를 택한 청년 정태춘은 군 복무 당시 몇 안 되는 기타 코드 진행으로 틈틈이 곡을 만들었다. 전역 후에 작곡한 노래 중 하나인 '양단 몇 마름'을 공모전에 출품해 입상했고, 이를 눈여겨본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 최경식이 서라벌 레코드사를 연결해주면서 가수 인생의 물꼬가 텄다.
첫 앨범 < 시인의 마을 >(1978)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번안곡 위주의 포크가 주를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한국적인 요소가 배어 있는 '시인의 마을'이나 '촛불'은 대중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하며 큰 공감을 얻었다. 그 인기를 방증하듯 정태춘은 1979년 MBC 10대 가수상까지 수상하며 가요계에 얼굴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1집 성공 이후 전적으로 앨범 제작을 맡게 된 그는 본인만의 색을 강렬하게 섞어 나갔다. 불교적인 색채를 불어넣은 <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 >(1980)와 국악을 토대로 한 < 우네 >(1982)는 분명 음악적으로 유의미한 작업물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록의 시대가 도래하며 포크는 설 자리를 잃었고 그 흐름에 떠밀린 정태춘 역시 연이은 실패를 겪으며 생활고에 시달렸다.
다행히 지구 레코드사로 건너가 아내 박은옥과 함께 노래한 첫 작품 < 떠나가는 배 >(1984)와 뒤이은 < 북한강에서 >(1985)가 히트를 달성하며 꺼져가던 음악인의 불씨를 되살렸다. 그럼에도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업소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노래할 공간은 여전히 부족했다. 돌파구는 전국 순회 공연 < 얘기 노래마당 >이었다.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던 '한 밤중의 한 시간'을 들려주는 장면처럼 미발표곡이나 심의에 통과되지 않은 노래를 부르며 독자적으로 언더그라운드 포크 신을 다져갔고, 이는 훗날 소극장 콘서트 형식으로 발전해 김광석과 같은 스타들의 성장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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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릿저릿한 대한민국의 현실
성공적인 데뷔 이후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지만 다시 한번 대중의 마음속에 안착했다는 역경 극복의 서사. 여기까진 정태춘을 모르는 이들에게 분명 익숙한 전개지만 한 일가족의 비극을 전하는 뉴스 보도 장면이 평화로운 흐름을 단숨에 뒤엎는다.
“오늘 오전 9시쯤 서울 망원동 대건 연립 지하 방에서 불이 나서 권순덕 씨의 딸 5살 혜영 양과 아들 4살 영철 군이 연기에 질식돼서 숨졌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자녀들의 안전을 위해 일을 나가며 밖에서 방문을 잠갔는데 안쪽에서 불이 나 남매는 꼼짝없이 갇혀 생을 마감했다. 소외된 도시 한 구석에서 벌어진 참담한 사건을 접한 정태춘은 '우리들의 죽음'이란 곡으로 안타깝게 떠나간 아이들을 추모했다. 실제로 다른 어린이가 녹음했던 원곡의 내레이션 부분은 영화 속에서 박은옥이 눈물을 머금고 읊어 내리며 비통한 감정을 자극한다.
물론 이 곡 역시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지금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시인의 마을' 같은 곡도 20~30군데 수정 지시를 받아 공개됐을 정도로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검열 제도는 음악인들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방해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필두로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더욱 커져갔고 정태춘 역시 거센 저항의 물결에 동참하며 그 의지를 굳게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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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아, 대한민국... 中)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어조로 무장한 < 아, 대한민국... >(1990)은 당대 사회의 어두운 이면 고발이자 억압받던 동료들의 현실에 대한 탄식, 그리고 악법으로 통제하던 국가 집단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비합본 음반으로는 최초로 LP를 찍어냈고, 스스로 위법을 저질렀다고 알리는 기자회견도 가졌고, 나아가 그 불법 음반을 각 방송사 심의실로 집어넣었고 실제로 몇 군데에선 울려 퍼지기도 했다.
고독한 싸움에 지치기도 했지만 수년간의 노력 끝에 그는 자유를 쟁취해냈다. 헌법재판소에서 음반 및 비디오법의 사전 심의 절차가 헌법과 합치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고 기나긴 세월 창작자들을 옭아매던 조항은 1996년 완전 폐지되었다. 후배 뮤지션 강산에가 언급하듯 정태춘의 숭고한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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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운동가? 약자들의 대변인!
"노래를 들으러 왔지, 당신 이념을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2019년 광주 공연 도중 울려 퍼진 한 청중의 일갈. '5.18' 곡 소개에 불만을 느낀 관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정태춘은 흔들리지 않고 무대를 이어갔다. 1987년 6월 항쟁부터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 그리고 2016년 민중총궐기까지 크고 작은 집회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운동권 인사라는 시선은 피해 갈 수 없었다.
행보를 통한 편견 이전에 노래 속에 담긴 진정한 의의를 들여다보라. 실향민이 될 위기에 처한 동향인들을 위한 '황새울 지킴이의 노래'부터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위로해주는 박은옥의 공감이 어우러진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까지, 부부는 사회에서 외면 당하고 고립되어 있던 약자들의 이야기를 항상 잊지 않고 다뤄왔다.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는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노랫말을 오래도록 사유하려는 청소년 인권 활동가 이수경 양, 오로지 '5.18'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대회 출전을 결심한 아티스틱 수영의 전설 유나미 선수, 한평생 정태춘의 음악을 가슴 깊이 사랑해 온 루게릭병 환자 김미현 씨. 각기 다른 시대와 환경을 살아왔지만 팬이라는 유대 속에 얽힌 이들의 사연 역시 근 반세기를 살아 숨 쉬고 있는 정태춘 음악의 영속성을 여실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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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아닌 과거로의 이상 회귀
'아,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간다' (건너간다 中)
'동네 할머니 손수레 지나가고/동네 할아버지 리어카 끌고 오고' (사람들 2019' 中)
희망으로 가득할 것 같은 새천년을 맞이했지만 이 나라엔 여전히 '노인을 거지로 버려두는' 차별이 만연하다. 노년층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대, 성별, 지역, 학벌, 재력 등 공감을 막아서는 벽이 많아도 너무 많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대외적인 활동 빈도를 줄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세상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하던 정태춘은 끝내 자본주의 체제와의 고별을 선언한다. 그가 노랫말로 그려낸 이상적인 세상은 미래를 뜻하진 않는다.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지는 먼 옛날의 수렵 채집 사회, 부에 대한 욕심이 없어 화폐를 만들거나 이자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던 세계를 꿈꾼다. '양아치라고 불리기도' 했던 정태춘은 그렇게 자유인이 되었다.
2시간이 채 안 되는 러닝타임으로 정태춘의 일대기를 요약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 짧은 시간에 흩뿌려진 40년 음악 세월의 조각들은 매 순간마다 그 가치를 입증한다. 때로는 절제된 형식미를 영위하는 시인이 되어, 때로는 격양된 자세로 반(反)하는 흐름을 이끈 투사가 되어 기록한 '아치의 노래', 올곧은 길을 걸어온 뮤지션을 향한 가슴 벅찬 헌사이자 이 시대가 전하는 위대한 전언이다.
- 영화에 사용된 음악 목록 -
1. 이런밤
2. 시인의 마을
3. 양단 몇 마름
4. 촛불
5. 바람
6. 떠나가는 배
7. 북한강에서
8. 한 밤중의 한 시간
9. 고향집 가세
10. 들가운데서
11. 얘기2
12.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
13. 일어나라, 열사여
14. 우리들의 죽음
15. 아, 대한민국...
16. 정동진 (1)
17. 건너간다
18. 아치의 노래
19. 황새울 지킴이의 노래
20. 저 들에 불을 놓아
21. 92년 장마, 종로에서
22. 광주천
23. 5.18
24. 봉숭아
25.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26. 사랑하는 이에게
27. 사람들 2019'
28. 정동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