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향 기술의 발전은 음악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으며, 누구나 손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로 바꿔 놓았다. 대중음악은 그렇게 탄생했다. 음악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곡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지만, 노래에 '대중성'이라는 특수성을 더하는 데에는 음향 엔지니어 혹은 음향 기사라 불리는 이들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음악가들과 가장 밀접한 위치에서 음악을 조율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소리에 민감하고, 누구보다 많은 양의 음악을 분석한다. 녹음, 믹싱, 마스터링에 프로듀싱까지 음악 제작의 거의 모든 부분에 참여하는 최고의 음향 전문가들을 이즘이 만났다. 그들이 꼽는 명곡 명반은 과연 뭘까. 이즘 필자, 독자, 라디오 PD에 이은 '내 인생의 음악' 시리즈 여섯 번째 특집이다.
음악가들과 가장 밀접한 위치에서 음악을 조율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소리에 민감하고, 누구보다 많은 양의 음악을 분석한다. 녹음, 믹싱, 마스터링에 프로듀싱까지 음악 제작의 거의 모든 부분에 참여하는 최고의 음향 전문가들을 이즘이 만났다. 그들이 꼽는 명곡 명반은 과연 뭘까. 이즘 필자, 독자, 라디오 PD에 이은 '내 인생의 음악' 시리즈 여섯 번째 특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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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만들 때 레코딩, 믹싱을 기본적으로 거치지만 공연 엔지니어는 이 구분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한 번에 수행한다. 같은 음향임에도 결이 다른 이 일을 고종진 기사는 전부 경험했다. 그의 음향 인생은 독일 SAE(School of Audio Engineering)를 지나, 국내의 톤 스튜디오를 시작으로, 한국 라이브 사운드 협회의 협회장에 이르렀다.
고종진 하면 윤도현이 떠오른다. 데뷔작부터 '잊을게'가 실린 6집 < YB Stream 6 >까지와 공연 사운드를 맡으며 음향 커리어의 시작을 화려하게 알렸다. 함께 한 10년 가까운 세월을 < 윤도현 and Band >의 '이 땅에 살기 위하여'로 축약하며, 충격적이고 신선하면서도 전율이 느껴진다고 정의했다. 사실상 YB 하면 고종진이 아니었나 싶다.
작업했던 수많은 콘서트 중에서 고종진 기사는 어떤 무대를 기억할까. 1990년대 말 < 자유 >에서 정태춘이 부른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고 그는 오퍼레이팅을 하는 와중에도 펑펑 울었다. 1995년 음반 사전 심의 폐지를 자축하며 시작한 공연이 담은 의미와 당시의 분위기, 음악이 전해주는 감동이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 99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 >에서 비를 뚫고 나온 이언 길런(딥 퍼플, 보컬)의 샤우팅과 < 2006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을 힙합 비트로 가득 채운 블랙 아이드 피스를 인상적 무대로 뽑은 고종진 기사는 < 2010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에서의 일화를 소개했다. 축제에서는 보통 서브우퍼를 과하게 쓰지만 뮤즈는 세팅에 비해 저음을 많이 줄였다고 한다. 소리의 압도감보다 음악적 표현에 중점을 뒀기 때문이다.
음향 도사도 코로나는 피할 수 없었다. 위기 속 그를 버틸 수 있게 만든 것은 오디션 열풍이지만, 사실 고종진 기사는 MBC < 나는 가수다 >부터 참여한 음악 방송 베테랑이다. < 내일은 미스트롯 >, < 내일은 국민가수 > 등이 그의 최근 대표작인 이유도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중 임영웅이 우승했던 < 내일은 미스터트롯 >을 여러모로 가장 만족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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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지의 공연을 감독하기까지 그의 마음속에 음향의 꿈을 심어준 아티스트에 관해 물었다. 중학생 때 제일 처음으로 갔던 산울림의 콘서트를 통해 고종진 기사는 밴드 사운드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독일 유학 당시에는 'Sultans of swing'으로 유명한 다이어 스트레이츠를 접하면서 아레나 공연을 처음 경험했다고 전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재밌는 질문이다. 그는 사운드 튜닝을 할 때 무슨 음악을 틀까. 작년에 갑작스럽게 해체했던 다프트 펑크의 < Random Access Memories > 속 'Fragments of time'을 약 10년 가까이 레퍼런스로 쓰고 있다고 한다. 그전에는 악기 선명도와 질감 등을 이유로 제니퍼 원스의 'The hunter'를 필수로 들었지만, 요즘에는 저음역의 노래들이 늘어서 최신곡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것을 쓰기도 한다고 팁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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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진 엔지니어는 레코딩/믹싱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라이브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국내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서울 음향을 비롯해 펜타포트, 지산, 부산, 쌈지, 서울 재즈 페스티벌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현장을 두루 지휘했다.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음향을 시작하게 됐나요?
성균관대 철학과를 다니다가 1983년에 독일에 유학을 갔다. 생각보다 수업을 쫓아가기 힘들어서 전공을 바꿔야겠다 고민했는데 옆에 강호정 교수가 있었다. 그는 윤도현 밴드에서도 건반을 쳤고, 현재는 서경대 교수다. 이 친구가 먼저 SAE를 졸업한 상황에서 이런 음악/음향의 세계가 있다는 걸 알려줬다. 그렇게 27살 뒤늦게 전공을 바꿨다.
학교가 정확히 어디인가요?
SAE(School of Audio Engineering). 호주가 본부인 음향 학교다. 친구 덕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었다. 졸업하자마자 동문이었던 임준철과 1993년에 톤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시작할 때는 독일 군단이라고 불렸는데(웃음) 임준철, 강호정, 고종진, 또 영화음악과 연극음악을 하고 있는 한재권이 처음에 있었다.
현재 한국 라이브 사운드 협회장을 맡고 계시지 않나요?
그렇다. 음향 업계에는 큰 회사들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공연을 해서 받는 금액은 크지 않다. 코로나 때문인지 지금은 완전 반토막 났다. 예전부터 뭔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있어서 2018년 11월 협회를 창립했다. 조합으로 할지, 사단 법인으로 할지 고민했는데 논의 끝에 법적인 힘을 얻고자 사단 법인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코로나 때문에 결국 밀리고 밀려 2022년 5월 24일 정기총회를 열었다.
협회 구성원은 기업 회원과 개인 회원 반반이다. 동등한 조건이지만 입회비나 연회비 차이는 있다. 서로가 경쟁자지만 기술적 경쟁이지 단가의 싸움으로 가지 않으려고 한다. 음향 산업을 위해 힘을 합치고, 법 개정 같은 것에 주안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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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엔지니어 분야에서 성숙한 공연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있다면요?
협회를 만든 것도 우리가 하는 직업이 이어 나갈 수 있는 직업군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직업군에서도 어느 정도 위상으로 자리 잡기를 원해서 협회를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음향 장비 렌탈과 엔지니어가 분리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이브 공연을 하면 정말 다양한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나요?
힘들었던 공연 중 하나가 2002년 북한 평양 때다. 공연장의 전기가 200V도 채 안 나와서 애를 먹고 있었는데 북측에서 주변 아파트 전기 공급을 다 끊더라. 겨우 생중계까지 잘 마쳤다.
음향의 출발부터 운 좋게 윤도현 밴드를 만났다며 자신을 낮춘 고종진 기사지만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밴드 사운드를 즐겨 들었으며, 록 페스티벌을 통해 진정한 사운드의 감동을 경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사랑과 음향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그는 준비된 인재였다.
라이브와 녹음실의 차이가 있나요?
과거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지만 현재 상황으로 본다면 레코딩과 라이브의 믹싱 기술은 디지털 콘솔과 플러그인이라는 같은 장비를 쓰기 시작하면서 굉장히 비슷해졌다. 결국 공연도 노래가 레퍼런스이기 때문에 그 곡이 담고 있는 이펙트나 프로세싱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스튜디오에서 음원을 만들 때의 느낌과 색깔을 현장에서 재현하는 게 목표다.
고종진의 핵심은 '음원을 현장에서 재현'하는 것인가요?
곡이 표현하려고 했던 뉘앙스 또는 감정을 현장에서 표현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관객은 먼저 음원을 접하고 온다. 그 노래를 듣고 울었다면 라이브에서도 그 곡을 듣고 울어야 한다고, 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활동 초에는 진짜 큰 음압으로 소리가 쏟아지는 뭔가 라이브다운 록적인 게 기준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가사가 중점이 됐다. 가사는 한 글자라도 다 들려야 된다. 한마디로 보컬 레벨을 올리면 되지만 볼륨만 올린다고 다가 아니다. 밸런스에 맞춰서 주파수도 정리해야 하고 여러 과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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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끌어올리는 핵심, 팁이 있을까요?
일단은 레벨 운영이 있다. 신날 때는 전체 운영 레벨을 3dB~5dB 정도 올리는 게 가장 쉽다. 보컬과 리버브도 중요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음원 밸런스와 맞지 않더라도 목소리를 크고, 선명하게 표현하려고 한다.
페스티벌 사운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궁금합니다.
전 객석에서 110dB이 나오도록 세팅하는 게 제일 기본이다. 그럼 그걸 커버할 수 있는 물량과 각 팀의 기술 요구서 등을 확인해서 최대한 맞추고 스피커 디자인을 한다. 장소가 길면 딜레이 스피커를 달고, 옆으로 넓으면 사이드 스피커를 추가하기도 한다.
라이브 엔지니어의 조건에는 뭐가 있을까요?
어떻게든 곡을 표현하겠다는 소리에 대한 욕심, 완성에 대한 욕심이 필요하다. 가끔은 힘들고 지치더라도 희열을 느끼고 감동하는 순간이 온다. 동경했던 아티스트와 만나 같이 작업할 기회를 얻는 것들도 삶에 기쁨과 에너지를 주는 계기가 된다.
음원을 많이 챙기는 사람이 좋은 엔지니어라고 생각합니다.
믹스 측면에서 볼 때 레퍼런스는 당연히 들으면서 연구하고 분석해야 한다. 나도 내일모레가 공연이다 그러면 음원을 차 타고 가면서라도 듣는다. 최소한 노래가 빠른지 느린지는 알고 가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이런 부분은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인데 라이브 엔지니어의 90%가 음향회사 직원이라고 보면 일단 너무 바쁘다. 스케줄에 치여서 자기가 맡은 가수나 프로젝트를 준비할 시간이 사실 부족하다.
음향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노력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머릿속에 라이브러리를 만드는 것이다. 많이, 반복해서 듣는 방법밖에 없다. 들어본 적도 없는 소리를 만들려면 기준도 없고 오래 걸린다. 페스티벌도 많이 가보고, 계속해서 자극을 줘야 한다. 음원 시장에서는 돌비 애트모스도 활발하고, 공연장에서는 이머시브 사운드가 자리 잡고 있으니 최신 트렌드를 따라 다양하게 듣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내 귀의 현 상태를 믿으면 안 된다는 걸 항상 생각해야 한다. 감기도 조심하고 술도 마시면 안 된다. (웃음)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정수민
정리 : 임동엽, 정수민
사진 : 일일공일팔
이미지 디자인 : 정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