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Joshua Tree > 앨범의 대성공 이후 밴드는 중대한 전환의 기로에 서게 된다. 맴버 간의 음악적 방향에 대한 의견 충돌과 모든 것을 이룬 뒤의 목표 상실은 이전 슈퍼 밴드들이 무너져간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그런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암울한 이념적 대립의 해빙 무드는 이들이 다시 한 번 서로 간의 존중과 대화 속에 길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발표된 앨범 < Achtung Baby >는 화해의 상징이 된 도시 베를린에서 작업하며 그들에게 새로운 돌파구와 변화의 시발점이 된 명반이다.
앨범이 발표되자마자 모든 팬들과 평론가들은 그들의 예상치 못한 과감한 변화에 경악했다. 스트레이트한 창법이 돋보였던 보노의 보컬은 감정 없이 낮고 건조하게 그리고 때론 뒤틀리고 찌그러진 읊조림을 반복했고, 과도한 이펙트와 전자 사운드를 장착한 에지의 기타는 분명 전작의 심플한 매력과는 달랐다. 그들의 음악은 당시 급부상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인더스트리얼 음악 트랜드를 수용한 전혀 다른 밴드로 돌아왔던 것이다. 가사 역시 이전의 진솔하고 시적인 내용과 달리 암울하고 냉소적인 어법으로 그들의 경건한(?) 팬들을 당황하게 했다. 앨범 커버의 이미지도 여러 모습으로 분장한 보노의 얼굴들과 요상한 소품들의 모자이크로 디자인되어 차갑고 뒤틀린 자아상을 보여주는 듯 했다.
이러한 그들의 파격은 그 다음해에 진행된 “Zoo TV” 월드 투어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일단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세트와 다양한 카메라 효과들을 극대화한 영상 테크놀로지의 극치였다. 수없이 쏟아내는 모호한 이미지 컷들이 스트린을 통해 현란하고 어지럽게 난무하더니, 보노는 공연 중반 “플라이” “미러볼맨” “맥피스토”라 명명한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해 연기하는 비주얼 쇼킹을 보여줬던 것이다. 보노는 이런 이미지 변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감각의 과부하이다. 우리는 모든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수 있으며 그것을 착취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이제 U2는 이전의 진지한 양심을 뒤로한 채 화려한 슈퍼 엔터테이너의 길을 걸어가는 것인가?
하지만 첫 인상의 충격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앨범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이내 일관된 U2의 진정성이 이 파격적 앨범에도 그대로 녹아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전히 풍부한 기독교적 사랑과 정의에 대한 수사가 넘쳐나고, 선명한 멜로디 라인도 여러 트랙에 담겨져 있다. 과거와 현재,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U2가 갈등을 딛고 발표한 이 앨범은 그들을 “1980년대의 밴드”로 멈추지 않고 이후에도 지속적 영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해준 변화의 산물이었다. 특히 지금까지 U2의 드라마틱한 콘서트의 원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U2는 테크놀로지와 문명에 대한 회의를 사운드 조작과 과장된 이미지로 비판하는 이중적 전략을 활용한 것이다. 즉 이미지와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가치가 소멸되어 가는 현실을 이전의 진지함과는 달리 자조적인 기지로 대치하며 질문을 던진다.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당신을 만족시키겠어...
오 이제 그녀가 온다.
나를 더 높이 데려가줘, 더 높은 곳으로.
당신은 진짜야. 당신은 진짜야.
심지어 진짜보다 더 좋은걸.
- 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 -
1990년대 부상한 음악의 새로운 흐름 가운데 일부 아티스트들은 기술과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휴머니즘 상실을 테크놀로지를 통해 비판하는 역설의 미학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음악은 그들의 메시지를 강화시키는 도구인 것이다.
U2는 1997년 앨범 <Pop>에서도 연속적 작업의 일환으로 보다 파격적인 실험을 감행했다. 이 앨범은 소비지상주의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메시지를 담아냈다. 맥도널드와 대형마트를 상징하는 무대와 스크린에서는 “사세요! 더 많이! 당장!”과 같은 문구를 쏟아내며 자본주의 이미지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던진다. < Pop > 앨범의 타이틀 곡 'Discotheque' 서 소비적 욕망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판타지를 클럽과 파티에 비유해 노래한다.
손을 뻗을 수 있지만 붙잡을 수는 없어
머물게 할 수도, 조정할 수도 없어. 자루에 담을 수도 없지.
너는 풍선껌을 씹으며, 그게 뭔지도 모르지만 좀 더 원하지.
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은 너에게 늘 부족해
너는 혼란스럽게 뭔가를 위해 고통받고 그것을 위해 일하지.
가자, 가자. 디스코텍으로.
- Discotheque -
1990년대 U2의 포스트모던 삼부작은 모든 것이 이미지와 기호로 치환되어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욕망의 판타지에 종속된 사회에 대한 차가운 비판과 냉소를 자신들의 앨범과 공연의 콘셉트로 보여준 것이다. 이 앨범들은 “복제된 것에 진정한 것들이 소외된” 현대 문명을 차갑게 들여다본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이론에 대한 오마주로 보인다.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명저 < 시뮬라시옹 >에서 욕망을 부추기는 '복제기술'(simulation)은 복제된 문화를 만들고 실재보다 더 생생한 과잉실재(hyper-reality)에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삶이 오히려 밀려나는 '복제사회'(simularque)의 문제점을 예고한 것이다. 복제기술은 이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현실을 능가하거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을 복제하여 이미지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원본이나 진실이 소멸을 의미한다.
또한 보드리야르는 또 다른 저서 < 소비사회 >에서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것도 사물 자체가 아닌 사회의 계급질서와 상징적 체계라고 진단하였다. 즉 상품의 필요를 소비하기보다 상품이 상징하는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대상이 이미지가 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문제제기를 멈추고 합성된 이미지를 통해 위조된 현실을 엿보는 데만 익숙해진다고 주장한다. 보드리아르는 시뮬라시옹에 전적인 지배를 당하는 극단의 미래를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 이에 대한 '저항'을 강조하지만, 그 저항에 있어 희망의 의미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묵시적인 허무를 표명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U2가 1990년대 발표한 세 장의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은 이러한 포스트모던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직접적인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비유와 풍자로 표현하면서 현대사회의 비인격화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런 현대 사회를 U2는 'Zooropa'라는 가상사회로 명명하고, 문명화된 바벨론, 'Zooropa'의 세계관을 담아냈다. < Achtung Baby >의 타이틀 곡 'Zoo Station'은 이 도시로 들어가는 진입로인 셈이다. 그 도시에는 “희망 대신 자본이, 평화 대신 맹신이, 생명 대신 무감각이, 진리 대신 불확실성이, 공동체 대신 익명성이” 지배하는 신 없는 디스토피아이다.
내겐 나침반이 없어. 내겐 지도도 없어.
내겐 이유도 없어. 되돌아갈 이유 말이야.
내겐 종교도 없어.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난 한계를 몰라. 우리 소유의 한계 말이야.
주로파, 걱정하지마. 그래, 다 잘 될거야.
주로파, 불확실성이 우릴 인도할거야.
그녀는 꿈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세상을 떠올릴거야.
- Zooropa -
U2가 묘사한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공동체의 해체로 인한 개인주의와 그로 인한 인간 소외였다. 다양한 개인들이 공존하는 사회 속에 혼돈과 무질서를 극복하고 하나됨을 이룬다는 것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딜레마일 것이다. 1991년 발표한 'One'은 1990년대 U2의 가장 큰 히트곡이며 가사에 담긴 문학적 미학과 정신이 돋보이는 명곡이다. 영국의 음악 채널 VH1이 기획한 “100 가장 위대한 노랫말(100 Greatest Lyrics)” 설문조사와 음악 잡지 Q가 선정한 “100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1001 Greatest Songs of All-time)” 차트에서 “One”은 1위에 올랐다. 어떤 점이 이 노래가 이토록 평단과 팬들의 찬사를 이끌어냈는가? 그것은 바로 이 노래가 다양성과 공존의 가치를 대변하는 현 시대 '다원주의' 담론의 고민과 방향을 선명하게 제안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갈등과 반목의 상황 가운데 U2는 진정한 평화와 하나됨의 가치를 일깨우며 이 노래를 불렀고, 그렇게 'One'은 “시대의 노래”가 되었다. 2001년 한국의 취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보노는 오랜 분단의 아픔을 겪은 아일랜드인으로서 한국의 분단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며, 한국 공연이 성사된다면 가장 부르고 싶은 노래가 'One'이라고 말했다.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며 시작된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는 걸까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죠.
당신은 비난할 누군가를 찾았으니까요.
당신은 말합니다. 한 사랑, 한 생명.
오늘밤 우리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라고
한 사랑. 우린 함께 나누게 되었다 합니다.
하지만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곧 사라집니다.
- One -
오늘날 다수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됨”의 가치를 강조하며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다”라는 구호는 결국 누군가를 비난하고 소외시킨 차가운 현실의 결과물일 수 있다. U2는 바로 이 점을 비판한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공동체'란 개념에는 사실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역사상 강한 공동체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은 그 외부의 이질적 요소들에 대해 배타적으로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때로는 그 이방인들을 추방하고 처단하며 내부 결속을 유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그의 저서 < 폭력과 성스러움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폭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화해의 희생양을 하나 뺀 모든 사람의 일치다.” 역사 가운데 평화와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일종의 문명사적 방법론이 바로 개인에게 가하는 공동체의 집단적 따돌림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타자 또는 소수자라는 이름의 약자들을 희생양으로 다수자들은 화해와 평화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오지 않았던가? 한국사회에서도 이런 폭력적 제의의 사례는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 희생자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 공동체는 하나됨을 위해 또 다른 모난 사람들, “비난할 누군가”를 찾아 공격할 것이다.
U2는 공동체가 “한 사랑, 한 생명”을 외친다면 그것은 단지 구호가 아니라 이런 현실적 인식과 반성이 있어야 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하나됨을 위한 방법을 후렴구는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는 하나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죠. 단지 함께 보듬고 가는 겁니다.” 하나됨이란 모두가 같아지는 획일성(sameness)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togetherness) 삶의 방식이다. 이 노래의 2절에서 화자는 주류 집단의 위선적인 포용과 다원주의 담론에 대해 철저히 조롱하며 비판한다.
당신은 누군가를 용서하러 오셨나요?
아니면 죽은 자를 살려내려고 하십니까?
당신은 예수 흉내를 내고 싶은 건가요?
마치 나를 당신 앞에 문둥이로 보면서...
당신은 내게 들러오라 하지만, 나를 기어서 가게 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받아들여 질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남긴 것은 결국 상처입니다.
언론과 공식적 발언에서는 성적, 인종적, 신체적, 문화적 소수자들을 포용한다는 선전을 늘어놓지만 정작 두터운 편견으로 그들을 진정한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이중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포용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값싼 동정심”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들에게 이 공동체에 머물러도 좋지만 주류인들의 언행을 따라 튀지 말고 살라고 강요한다. 더 나아가 주류인들의 거주지가 아닌 그들만의 구역 안에 게토화시켜 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보여준 사랑과 포용의 실재이다. 이후 이 노래는 U2의 콘서트에서 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며, 보노는 청중들에게 그 당시의 중요한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동참”(carry each other)할 것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1980년대 U2가 사막을 순례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담아냈다면, 1990년대의 노래들은 포스트모던 소비사회 안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삶을 표현하였다. 여기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이전의 순례에는 사막에 자라나는 '조슈아 트리'의 생명력이 상징하듯 갈등과 욕망으로 황폐해진 사회에서도 희망의 메시지를 강조했다면, 포스트모던 삼부작에서는 묵시적 과잉실재의 디스토피아 속에 길을 잃은 불안을 보다 염세적으로 표현해 냈다. 하지만 구도자의 여정이 멈춘 것은 아니다. 보드리야르의 결론과는 달리 U2는 지도와 목표를 잃고 방황할지라도 진정한 삶의 가치와 신의 나라를 향한 지속적인 여정의 길은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전설적인 컨트리 뮤지션 조니 캐쉬(Johnny Cash)와 함께 작업한 'The wanderer'는 그 절망과 희망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는 밖에 나가 걸었다.
금으로 포장된 거리에서 영혼 없는 도시의 뼈와 살을 보았지....
나는 어느 교회 앞에서 멈췄다.
사람들은 신의 나라를 원한다지만 신은 원치 않는다....
나는 밖에서 찾아 다녔다.
한 명의 의인을 찾아서, 그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을만한 영혼을 가진
나는 성경 한 권과 총 한 자루를 들고 있다.
신의 말씀이 내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예수여, 기다리지 말고 주무세요.
예수여, 저 곧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요, 나는 여전히 당신을 찾아 계속 떠돌아다닙니다.
- The wanderer -
1990년대 포스트모던 3부작의 실험적 모험을 마치고, 2000년대 U2는 이전의 록큰롤 사운드로 회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마흔 살 중년기에 접어든 밴드는 이전보다 힘의 완급조절을 통해 서정적인 멜로디를 강화하고 특유의 샤우팅은 의도적으로 강도를 낮추는 원숙미를 보여준다. 가사에 있어서도 직접적인 사회비판적 메시지보다는 솔직한 자기각성과 성찰을 강조하면서 도덕적 행동의 실제적 방법을 제안하며 왕성한 정치적 로비활동을 펼치고 있다.
오늘날 U2는 그들이 비판하고 거부했던 주류의 한 복판에 있다. 음악 평론가 소승근의 평가는 U2의 다음 발걸음을 위한 매우 중요한 질문을 제공한다.
“50대에 접어든 멤버들의 관록과 포용력 그리고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가 그들의 음악에서 뿜어져 나지만 얼핏 타인들에게 훈계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위험한 계몽성도 있다. 보노의 정치적 활동 때문인지 어느새 U2의 음악도 그들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권력'이 되었다.”
U2 역시 이러한 자신들의 위치를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주류를 비판하는 주류” 밴드이며, 자기의 유명세와 힘을 소외된 자들과 공존하는 평화를 위해 사용하는 법을 터득해 갔다. 오늘날 U2는 사랑의 가치와 이상향을 향한 순례를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 U2가 바라본 세상 (1): In God's Coun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