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즘은 모타운 탄생 60주년을 맞아 모타운을 빛낸 아티스트 15팀을 추렸다. 반세기 이상 선명한 궤적을 그린 레이블이기에 이를 대표할 인물을 선정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전설의 이름들을 소개한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모타운이 발굴한 음악 신동, 스티비 원더는 초기 모타운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1963년 13살의 나이에 리틀 스티비 원더라는 이름으로 'Fingertips – pt 2'를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고, (이는 아직 깨지지 않은 빌보드 싱글 차트 최연소 솔로 아티스트 1위의 기록이다), 노래가 수록된 라이브 앨범 < Recorded Live : The 12 Year Of Genius >를 통해 모타운에게 첫 빌보드 음반 차트 1위 자리를 선물하기도 했다. 디트로이트의 작은 음반 회사였던 모타운은 스티비 원더를 통해 그렇게 미국 시장의 발판을 넓혔다.
1970년대 이후 그는 기존 모타운의 틀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창작권을 확보했다. 사회 비판의 메시지로 버무린 걸작 < Innervisions >와 이후 두 개의 정규 음반 < Fulfillingness' First Finale >, < Songs In The Key Of Life >를 발매, 세 작품이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을 석권하는 위업을 남겼다.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나 'Sir duke'와 같은, 쉬운 팝 넘버들도 만들며 모타운 본연의 가치인 '대중성'도 놓치지 않았다. 데뷔 50여 년이 지났지만 스티비 원더는 여전하다. 대중성, 메시지, 작품성을 모두 아우르고 상업성을 보장하는 '대중 뮤지션'으로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이홍현)
스모키 로빈슨 & 더 미라클스 (Smokey Robinson & The Miracles)
향후 미라클스로 활동할 디트로이트의 5인조 R&B 그룹을 만났을 당시부터 베리 고디 주니어가 모타운의 거대한 성공을 온전히 예상했으리라고는 물론, 장담하지 않겠다. 심지어 이는 모타운을 설립하기도 전의 일이다. 그러나 분명 베리 고디 주니어에게는 레이블을 성공적으로 이끌 감각과 수완이 가득했다. 그래서였을까. 브런즈윅 레코드 오디션에 떨어진 5인조에게서 베리 고디 주니어가 특히나 눈여겨본 것은 그룹의 프론트맨 스모키 로빈슨이 어렸을 적부터 써왔다던 수많은 자작곡이었다. 그날 베리 고디 주니어는 그저 어느 한 R&B 그룹이 아니라 향후 모타운의 시스템을 함께 이끌어갈 중핵을 만났다.
스모키 로빈슨과 베리 고디 주니어가 공동으로 작곡한 미라클스의 'Shop around'가 모타운의 첫 밀리언셀러가 되며 그룹과 레이블은 스타덤에 오른다. 'Shop around'를 통해 이들이 보인 것은 모타운의 성공 공식이었다. 이른바 '모타운 사운드'를 앞세워 미라클스는 'You really got a hold on me' 'Mickey's monkey'와 같은 히트 싱글을 연이어 내놓고 레이블 후속 그룹의 진출 양분을 제공했다. 그 가운데 스모키 로빈슨은 미라클스를 넘어 모타운의 중추로 활동했다. 홀랜드-도지어-홀랜드, 미키 스티븐슨 등과 함께 레이블의 프로덕션진을 대표한 그에게서 모타운의 1960년대 히트 싱글들이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왔다. 1970년대에 이르러 명작 < A Quiet Storm >과 히트곡 'Crusin'과 같은 솔로 작을 통해서도 성과를 거두나, 이 시기에 그는 모타운의 부사장으로도 분주했다. (이수호)
마빈 게이(Marvin Gaye)
마빈 게이의 보컬은 부드럽고 강하다. 유려하게 미끄러지듯 음들을 넘나들다가도 일순 힘주어 내뱉는 샤우팅을 만나게 되면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는 한 마디로 강약중강약을 자유자재로 혼자 끌어간다. 짧지만 굵은 음악적 호흡을 나눈 타미 테렐(Tammi Terrell)과 함께한 'Ain't no mountain high enough', 각각 싱글차트 1위와 3위에 안착한 야릇한 명곡 'Let's get it on', 'Sexual healing' 등이 증명하듯 그는 모타운의 빼놓을 수 없는 보컬이었으며 또한 첫 번째 혁명가였다.
마빈 게이는 모타운에 사회성을 심었다. 자그마치 2년간의 투쟁 끝에 발매한 1971년 작품 < What's Going On >은 그가 당대 시대를 보고 느낀 철저히 자기 고백적이고 술회적이며, 비판적인 사회의 개가였다. 베트남전의 참담함, 흑인 인권의 현주소, 환경 문제를 끌어안은 곡들은 당시 회사의 우려와 달리 'What's going on'을 필두로 장장 3곡을 싱글차트 10위권 안에 올리며 음악적 성과를 이뤄냈다. 범대중적 입맛에 맞춘 달콤한 사랑 노래와 3분 팝을 선보이던 모타운은 마빈 게이를 통해 현실을 포획했다. (박수진)
바렛 스트롱(Barrett Strong)
바렛 스트롱의 히트곡은 1960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23위까지 오른 'Money (That's what I want)' 밖에 없고 이마저도 모타운의 전신인 탐라 레이블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이 티끌만큼도 영향력이 없어 보이는 바렛 스트롱이 모타운을 빛낸 아티스트로 선명한 발자국을 찍은 이유는 그의 작사 능력 덕분이다. 작곡가 노만 휫필드와 짝을 이뤄 마빈 게이의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 에드윈 스타의 'War', 템테이션스의 'Cloud nine'과 'I can't get next to you', 'Papa was a rollin' stone', 'Just my imagination (Running away with me)' 같은 명곡의 노랫말을 탄생시킨 주인공이 바렛 스트롱이다. 작사가로서 그의 전성기는 1970년대 중반부터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평탄하지 않은 소재를 평범하지 않은 멜로디에 적용시킨 특별한 가사는 훗날 대중음악에 영향력을 과시했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라는 속물주의에 찌든 것처럼 보이는 'Money (That's what I want)'는 모타운의 창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가 작곡했다. 바렛 스트롱은 상업적인 감각이 뛰어난 베리 고디 주니어의 본심을 대신 노래해 모타운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소승근)
템테이션스(The Temptations)
1964년 < Meet The Temptations >로 데뷔한 미국 보컬 그룹 템테이션스는 'My girl'이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며 상승세를 얻었다. 이후 노먼 휘트필드가 프로듀서로 참여하면서 이들의 음악은 사이키델릭 소울로 변화되었고, 1969년 발매된 < Cloud Nine >이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4위를 기록하며 알앤비의 주축을 다졌다. 이들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보컬 그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I wish it would rain', 'Ball of confusion', 'Papa was a rolling stone'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템테이션스의 무대를 보면 이들이 알앤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현란한 발 스텝이 가미된 절도 있는 춤사위는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소울풀한 리드보컬을 중심으로 이뤄내는 하모니 또한 완벽하다. 게다가 단체로 빼입은 화려한 정장 차림은 대중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대표곡 'My girl'의 로맨틱한 선율이라든지 브라스 섹션과 16비트로 신나게 쪼개지는 기타 연주의 'Papa was a rolling stone' 같은 펑키한 음악도 훌륭하지만, 템테이션스의 가치는 노래에만 국한되지 않고 볼거리 그득했던 무대에 자리한다. (조지현)
슈프림스(The Supremes)
미국 디트로이트 출신의 무명 가수에서 화려한 디바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 < 드림걸스 >. 그 이야기 속에는 실제 바탕이 되는 그룹 슈프림스(Supremes)가 있었다. 뚜렷한 히트곡이 없던 초창기 시절 레이블 소속 가수들의 백 보컬로 활동을 이어 나가던 이들은 산뜻하고 밝은 사운드와 직선적이고 깔끔한 팝 창법으로 백인 중산층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는데, 1964년을 기점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보여준 기세는 실로 무서웠다. 영국 출신의 밴드들이 매섭게 차트를 침공하던 1960년대 속에서도 1위 곡을 12개나 탄생시키며 미국의 대표 여성 보컬 그룹이자 동시에 모타운 레코드의 간판 아티스트 중 하나로 단단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비록 배리 고디 주니어의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를 전면에 앞세운 노골적인 상품화 전략과 차별 대우로 팀워크의 균열을 겪고 잦은 멤버 변경을 일삼다 결국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여성 그룹 최초로 빌보드 200 차트의 정상을 밟고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세 곡이나 헌액되는 등 음악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긴 팀으로 평가받는다. 흑백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인종이라는 장벽을 허물고, 티엘씨(TLC),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 등 후세 흑인 걸그룹의 성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슈프림스. 비록 흑인임에도 백인 취향의 음악을 지향했지만, 이들이 역대 흑인 뮤지션 반열에 오르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지 않을까. (장준환)
잭슨 파이브(The Jackson 5)
1960년대 모타운의 얼굴이 슈프림스였다면, 1970년대로 넘어가면서 그 자리는 잭슨 파이브가 이어받았다. 1969년 말 'I want you back'으로 데뷔한 잭슨 파이브는 이 곡을 포함 1970년에만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로 4곡을 연달아 1위에 올리며 음반사에 새 스타가 탄생했음을 선포했다. 재키, 저메인, 티토, 말론, 그리고 마이클 잭슨으로 구성된 가족 그룹이었지만 그중 주인공은 'Ben'으로 솔로 넘버원까지 기록하며 팝계에 전설이 될 마이클 잭슨이었다.
경쾌하고 펑키(Funky)한 사운드와 아이돌의 이미지로 대중을 사로잡은 이들의 인기가 올라감에 따라 유사한 콘셉트의 'One bad apple'(원래 잭슨 파이브 곡이었다)로 정상을 차지한 오스몬즈라는 '백인' 가족 그룹이 맞수로 나섰다. 잭슨 파이브가 흑인 자본의 모타운 소속이었기에 가능했던 흑백 대결로서 이들은 흑인을 대표했지만 음악은 색을 구분하지 않고 사랑받았다. 사회적 차별을 떠나 음악 안에서 이뤄진 이 대결에 당대 모타운과 잭슨 파이브는 그 경계를 허물며 1970년대 초 흑인에 의한, 흑인의 전성기를 함께 공유했고, 그와 동시에 '팝의 황제'의 출발을 세상에 알렸다. (임동엽)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
이 글을 읽기 전에 잠깐 코모도스의 'Three times a lady'를 들어보자. 아마도 당신이 상상하던 모타운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발라드가 흘러나올 것이다. 확실히 알앤비와 소울 넘버 중심의 보컬그룹이 메인이었던 곳에서 그들은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모타운 그룹 중 최초로 노래와 연주가 함께 가능했던 팀. 그리고 백인음악의 정서와 스타일을 가져오는데 거부감이 없었던 팀이라는 의미에서. 그 중심에는, 1980년대 마이클 잭슨, 프린스와 함께 흑인 솔로 아티스트로 군림했던 라이오넬 리치가 있다.
케니 로저스에게 제공한 'Lady'와 다이애나 로스와 함께한 'Endless love'를 통해 대중적 기조의 솔로 커리어를 본격화, 'Truly'를 빌보드 정상에 올리며 완연한 솔로 팝 싱어로의 변신을 완수했다. 'You are'이나 'Running with the night'와 같은 히트곡들로 자신의 뿌리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대중들의 머릿속엔 'Say you, Say me'나 'Hello' 같은 슬로우 넘버들이 훨씬 더 임팩트 있게 남아있는 것이 사실.
당시에는 변절자처럼 여겨졌지만, 그는 누구보다 대중의 편에 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좋은 음악을 들려주려 노력했을 뿐이다. 흑인임에도 굳이 블랙뮤직을 고집하지 않은 유연한 마인드, 모타운이었지만 결코 그 울타리에 갇히지 않았던 음악 스타일. 어덜트 컨템포러리 혹은 콰이어트 스톰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건 세간의 비난을 괘념치 않는 애티튜드 덕분이었다. 편견을 뛰어넘는 용기, 작곡과 가창을 아우르는 음악적 재능, 그리고 지금에 안주하지 않는 지속적인 노력. 이 삼각기둥 위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우뚝 서 있는 그는 누가 뭐래도 모타운의 레전드 뮤지션이다. (황선업)
포 탑스(Four Tops)
포 탑스는 팀워크로 빛났다. 4명의 원년 멤버가 무려 40년 이상 함께했다. 동시대에 모타운의 인기를 견인했던 템테이션스, 슈프림스는 이루지 못한 일이다. 리드 싱어 레비 스텁스를 중심으로 압둘 듀크 파키어, 르날도 오비 벤슨, 로렌스 페이튼이 구축한 라인업은 1997년 로렌스 페이튼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견고했다. 특정 멤버에 치우치곤 했던 여타 그룹과 달리, 비교적 균등한 하모니를 구사한 덕이다.
1956년부터 7년간 여러 음반사를 전전했던 이들은 1963년 모타운의 손을 잡고 비로소 무명 시절을 청산했다. 1964년 'Baby I need your loving'(11위)을 시작으로 1965년 'I can't help myself'(1위), 'It's the same old song'(5위), 1966년 'Reach out I'll be there'(1위), 1967년 'Bernadette'(4위) 등을 연달아 터트리며 레이블에 영광을 안겼다. 비단결 같은 앙상블과 홀랜드-도지어-홀랜드의 빼어난 곡이 이룬 성과였다. 모타운은 포 탑스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포 탑스는 모타운의 황금기에 박차를 가했다. (정민재)
드바지(DeBarge)
1970년대에 히트곡을 쏟아낸 잭슨 파이브 이후 모타운은 새로운 가족 그룹 드바지를 내세웠다. 도회적인 음악 스타일을 지닌 남매 팀 드바지는 초기에 주목받지 못했으나 1982년 2집 < All This Love >로 이름을 알렸다. 다수의 리메이크 및 샘플링으로 요즘 세대에게도 익숙할 'I like it', 부드러운 알앤비 'All this love'가 각각 빌보드 싱글차트 31위, 17위를 기록하며 모타운 가족 그룹의 영광을 이어갔다.
열 남매 중 여섯째였던 엘 드바지는 그룹의 프로듀서 및 작곡가, 리드 보컬을 소화한 핵심 인물이었다. 'Time will reveal'이 수록된 3집까지는 엘을 비롯한 드바지 패밀리의 손길이 닿은 곡들로 가득했다. 전성기를 맞이한 이들은 빌보드 앨범차트 19위에 오른 1985년 4집 < Rhythm Of The Night >에서 조르지오 모로더, 데이비드 포스터와 같은 강력한 제작진을 맞이한다. 히트 작곡가 다이앤 워렌이 쓴 산뜻한 댄스 곡 'Rhythm of the night'은 빌보드 싱글차트 3위에 올라 드바지 역사상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모타운의 1980년대를 빛내주었으며, 세련된 선율로 모타운의 대중적인 알앤비 사운드를 견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팀이다. (정효범)
릭 제임스(Rick James)
모타운에서 나온 노래들은 이미 충분히 신났다. 단순함을 유지하라는 레이블의 강령을 따른 음악도, 그 슬로건에 결박되지 않고 복잡성을 추구한 작품도 대체로 경쾌함에 수렴했다. 슈프림스, 스티비 원더, 포 톱스, 잭슨 파이브 등 모타운에 속한 많은 가수가 몸이 절로 들썩거려지는 음악을 들려줬다. 이로써 모타운은 즐거운 솔뮤직의 메카로 등극했다.
여기에 1970년대 후반부터 릭 제임스가 가세하면서 모타운의 카탈로그는 한층 강렬한 댄스의 기운을 풍기게 된다. 그는 선명한 신시사이저 루프, 전기기타 연주, 풍성한 관악기 파트, 제창과 애드리브 보컬의 혼재 등으로 둔중함과 역동성을 한꺼번에 나타냈다. 이전까지 모타운에는 흔하지 않았던 진하고 쾌활한 펑크가 릭 제임스에 의해 터져 나왔다. 마치 쿨 앤드 더 갱, 팔러먼트, 프린스가 한 레이블에 속해 함께 음반을 만든 것 같았다. (한동윤)
마사 앤 더 반델라스(Martha And The Vandellas)
마사 앤 더 반델라스의 시작은 모타운이 아니었다. 로잘린드 애쉬포드와 아넷 비어드, 글로리아 윌리엄스가 1957년 결성한 델파이스(The Del-Phis)가 팀의 전신이었고 마사 리브스가 팀에 가입한 것은 1960년이었다. 당시 마사 리브스는 가수로 모타운에 지원했으나 선곡부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는데, A&R 부서의 미키 스티븐슨은 그의 재능을 눈치채고 마사 리브스를 베리 고디에게 천거했다.
모타운 최초로 리드 싱어를 전면에 내세운 걸그룹 마사 앤 더 반델라스는 히츠빌 USA의 체계적인 시스템 하에 금세 레이블의 간판이 됐다. 마사 리브스의 힘있고 도발적인 목소리는 '예쁘장한', '모범적인' 모타운에 강렬함을 더했다. 그 파워는 초기 로큰롤을 연상케 하는 'Heat wave'와 'Nowhre to run'은 물론, 1964년 '거리에서 춤을 추는' 'Dancing in the street'를 흑인 공민권 운동의 상징적인 노래로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김도헌)
아이슬리 브라더스 (The Isley Brothers)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결성된 아이슬리 가문의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사실 모타운에 몸담은 기간이 길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타운 소속 이전에도 이들은 스타였다. 1959년 'Shout'를 시작으로 비틀즈가 커버한 'Twist and shout', 'This old heart of mine' 등의 히트곡으로 탄탄한 보컬 라인과 음악 내공을 선보였다. 모타운에서 발매한 'This old heart of mine'이 톱 40 히트를 기록한 것은 이들의 커리어에서 부진에 가까웠다.
모타운 역사에서 아이슬리 브라더스의 의미는 레이블의 한계와 구조적 모순을 상징하는 데 있다. 짙은 감각과 다채로운 색채를 지향하던 형제들에게 공장제 음악과 베리 고디의 독재 체제는 창작을 제한하는 요소였다. 1969년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본인들의 레이블 티넥(T-Neck)을 설립하고 'It's your thing', < 3 + 3 >을 연이어 발표하며 찬란한 1970년대의 전성기를 열어젖혔는데, 모타운은 계약 기간 중 'It's your thing'을 작곡했다며 저작권을 요구했고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이후 모타운이 내리막길을 걷다 MCA 산하 레이블로 전락한 데 반해 아이슬리 브라더스는 21세기까지 건재를 알리며 장수하고 있다. (김도헌)
에드윈 스타 (Edwin Starr)
미국은 전쟁의 나라답게 반전에 대한 명곡도 많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에드윈 스타의 'War'이다. 이 곡은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가사로, 모타운의 가장 도발적이고 의식 있는 선동가로 손꼽힌다. 물론 지금은 모타운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아있지만 발매 당시에는 너무나 직접적인 가사에 베리 고디 주니어의 반대에 부딪혔다.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노래는 1970년 빌보드 싱글 순위에서 1위를 했고, 1998년에 개봉한 <러시 아워>에 등장해 다시 한번 큰 사랑을 받았다.
에드윈 스타는 1942년 컨트리의 고향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태어나 10대 시절부터 여러 보컬 그룹에서 활동했다. 가사에 제임스 본드를 언급하며 스파이 의상을 입고 활동한 'Agent double-o-soul'로 처음 자신을 각인시켰고, 그 후 릭 틱 레코드(Ric-Tic Records)와 계약을 맺고 디트로이트에 정착했다. 초기에는 'Headline news', 'Backstreet', 'SOS(Stop her on sight)'등으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1960년에 모타운이 릭틱 레코드를 인수하면서 그는 우렁차고 사포 같은 창법을 가진 모타운의 가장 거친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비록 'War'를 넘어선 차트 성적은 없지만 R&B차트에 'Stop the war', 'Funky music sho nuff turns me on''등을 올려놓기도 했다. 1979년에는 'Contact'와 'H.a.p.p.y. radio'로 디스코 물결에 잠시 합류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이후로는 아예 영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했다. 아이스-티(Ice-T), 스눕 독(Snoop Dogg) 등 수십 명의 래퍼들이 그의 목소리나 음악을 샘플링('Easin 'In')해 거칠고 예리했던 에드윈 스타의 소울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김반야)
애시포드 & 심슨 (Ashford & Simpson)
모타운의 자취를 더듬을 때, 무대 앞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무대 뒤 송라이터에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사, 작곡자를 넘어 듀오로도 활약한 니콜라스 애시포드와 발레리 심슨 부부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또 하나의 레이블 레전드다. 1966년 레이 찰스의 'I don't need no doctor'로 수면에 떠오른 둘은 모타운과 계약을 하면서 히트 프로듀서 대열에 동참한다. 이들의 접근법은 '익숙하고 간단하며 신나는 대중 음악'으로 모타운 마케팅에 충실한 전략이었다.
마빈 게이와 타미 테렐의 전속 송라이터를 맡으며 근래 찬가로 비상한 'Ain't no mountain high enough'를 포함해 'Your precious love',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 등을 써내려 확실한 존재감을 선보였다. 샤카 칸 원곡에 이어 휘트니 휴스턴의 리메이크로 널리 알려진 곡 'I'm every woman' 또한 '여성 앤섬'(anthem)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84년 직접 아티스트로 나선 알앤비 댄스 곡 'Solid'가 빌보드 싱글차트 12위를 차지하여 본인들의 이름을 히트 퍼레이드에 올렸다. 모타운 안팎 위상을 '바위처럼 견고하게'('Solid as a rock') 만든 데에는 분명 커플의 오선지 아래 빚어진 곡들이 일조한다. (임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