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가수 헬렌 레디는 1972년 여성의 자부심을 고취하는 곡 'I am woman'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과 그래미 최우수 여성 팝 보컬 퍼포먼스를 거머쥐었다. 50 여년 전 여권 신장을 노래한 그의 메시지는 오늘날 음악에서 핵심이 된 '허스토리(Herstory)'를 상징한다. 대중음악계 여성의 발자취를 짚어나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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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여성, 부모님의 이혼, 폭력적인 남편까지 온갖 고난을 겪은 티나 터너의 탈출구는 '로큰롤 여왕'이라는 칭호를 준 음악이었다. 전 남편 아이크 터너와 팀을 이룬 아이크 앤 티나 터너는 1960년 데뷔곡인 'A fool in love'부터 일찍이 주목을 받았으나 밝은 조명 뒤에서 도사린 아이크 터너의 폭행은 그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1960년대 후반 자살도 시도했던 티나 터너와 반대로 상승세를 이어 간 그룹은 1971년 씨씨알의 'Proud Mary' 리메이크로 빌보드 싱글 4위에 오르며 개인사와는 무관하게 알앤비, 소울, 록을 아우르는 역사적인 듀오로 남았다.
부모님의 이별로 생긴 사랑의 부재에도 쾌활하고 사교성 좋은 티나 터너였지만, 마약, 불륜, 구타를 일삼던 아이크 터너(2007년 12월 12일 사망)로부터는 무력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무대 위에서는 비교를 불허하는 전사였으나, 실상은 화장으로 멍든 눈을 가리고 목구멍으로 피를 넘기며 노래를 부르는 노예에 가까웠다. 학대를 견디다 못한 그는 1976년 투어 도중 도망을 감행해 이혼 절차를 밟았고, 그렇게 티나 터너의 불우했던 삶은 드디어 막을 내렸다.
아이크 터너를 벗어난 뒤 '아이크 & 티나 터너' 대신 '티나 터너'라는 이름 하나만을 남긴 그에게 홀로서기란 쉽지 않았다. 그의 힘든 모습을 지켜보던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데이비드 보위, 다이어 스트레이츠, 제프 벡 등 동료 음악가들은 존경하는 티나 터너의 자립을 위해 합심했다. 1984년 티나 터너의 자전적 이야기가 스며든 < Private Dancer >가 세상에 태어났고, 그는 음악으로 고통을 이겨낸 승리의 표본으로 완벽하게 돌아왔다. 아이크 터너와의 시절을 포함하면 다섯 번째 음반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솔로 앨범으로는 세 번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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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돌보기 위해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Private dancer'에 가수인 자신을 비추며 힘들었던 결혼 생활을 토로한 그는 'Better be good to me'와 'Show some respect'로 가슴속 응어리를 풀며 전 남편에게 조언이자 경고를 보냈다. 특히 처절한 편곡으로 지난날의 심정에 한을 더한 비틀스의 'Help!'는 도움이 절실했던 과거 자신을 향한 절규였다. 언론과 대중은 프린스, 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 밴 헤일런 등 정상급 뮤지션들 사이에서 역경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중년 흑인 여성에게 열광했고, 그래미는 올해의 레코드와 노래, 최우수 여성 팝 보컬 부문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What's love got to do with it'를 선정해 1984년을 티나 터너의 해로 만들어주었다.
< Private Dancer >를 기점으로 그에게는 사자 갈기 같은 머리와 미니스커트라는 트레이드마크가 생겼다. 불혹을 넘긴 나이임에도 남들의 시선과 편견은 아랑곳하지 않고 '티나 터너'라는 그 자체의 야수적인 매력을 뽐내며 개성 넘치는 록 패션을 완성했다. 그의 진취적인 스타일은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동년배의 여성들에게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때를 계기로 1984년부터 이어진 티나 터너의 록 시대에는 그만의 신기록이 쏟아졌다. 1980~1983년 4번 연속으로 그래미 최고 여성 록 보컬 퍼포먼스를 수상한 팻 베나타에 이어 티나 터너도 'Better be good to me'를 시작으로 1985~1987, 1989년 동일한 횟수를 기록했다. 1988년에는 브라질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약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솔로 가수로 가장 많은 관중을 모았다. 2000년 < Twenty Four Seven > 투어로는 그해 최고액인 총 수익 1억 달러를 넘기며 노익장을 과시해 20세기에 끝날 줄 알았던 인기를 다음 세기까지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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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그의 케네디 센터 공로상 시상식에서 유명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는 티나 터너가 1985년 < 매드 맥스 3 >에 출연하면서 부른 사운드트랙 'We don't need another hero'의 제목을 빌려 '우리는 다른 영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티나, 당신 같은 여성 영웅들이 더 필요합니다. 당신은 내가 여성임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줍니다.'라며 감사를 전했다. 그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아이콘이자 영웅이 된 근거는 알게 모르게 비슷한 고충을 겪었던 여성들이 많았음을 짐작게 한다. 그런 이들에게 티나 터너와 < Private Dancer >는 텔레비전 속 드라마가 아닌 누구나 한 번 씩은 경험했던 뼈아픈 이야기였다.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서 새 연인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가 전한 영감과 긍지는 예나 지금이나 멈추지 않았다. 1993년에는 그의 일생을 담은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원제 <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으며, 2018년에는 비슷한 소재로 < Tina - The Tina Turner Musical >이라는 뮤지컬이 나와 영국, 미국, 독일에서 활발하게 공연 중이다. 영화와 뮤지컬로 두 번이나 조명한다는 점에서 그의 굴곡진 인생사가 얼마나 극적이었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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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강타한 그의 성공과 2017년에 촉발된 미투 운동의 파급력을 방불케 하는 슬픈 과거사 고백은 남성 중심 사회의 음지에서 행해지던 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용기 있게 이겨낸 데 의의가 있다. 샤우팅 창법이 공통적인 1967년 오티스 레딩의 'Respect'를 재해석한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의 소울과 1984년 < Private Dancer > 속 '로큰롤의 여왕' 티나 터너의 록은 모두 세상을 향해 크게 외쳤다. 단지 인간으로서 존중받길 원했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