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대중음악 역사에서도 1999년은 종잡을 수 없는 해였다. 일렉트로닉, 알앤비, 아이돌 그룹, 펑크 록, 스카, 뉴 메탈, 힙합이 각양각색 매력을 뽐내며 장르의 경계를 해체했고 동시에 대중의 호응까지 확보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이 해는 아주 먼 과거도 아니지만 아주 최신도 아닌, 묘한 매력을 발현한 때로 기억된다.
1999년의 명곡 특집을 기획했다. 팝 30곡과 가요 30곡을 아우르는 기획이다. 우선 우리에게 덜 알려진, 1999년을 휩쓴 팝 명곡들부터 살펴본다. 아래 링크를 누르면 [젊은 세대가 보는 1999 팝 15]로 연결된다.
팻보이 슬림(Fatboy Slim) – Praise you
베드룸 디제이 팻보이 슬림은 'Praise you'를 통해 21세기 디지털 음악이 나아갈 말씀을 전했다. 1975년 소울 가수 카미유 야브로가 부른 'Take yo' praise'의 목소리를 디지털 샘플링으로 가져와 산뜻한 전자 피아노, LP의 덜컥거리는 잡음, 관객의 환호 등의 노이즈를 더하며 자유로운 '디지털 콜라주'의 경전을 만든 것이다. 매드체스터를 방불케 하는 소울풀한 기타 리프와 신디사이저 드럼은 빅 비트, 브레이크 비트가 생소하던 대중에게도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과격한 레이브의 시대가 저물고 일렉트로닉 씬의 활기가 주춤할 때쯤, 유쾌한 방구석 디제이는 싸구려 장비와 스파이크 존즈가 메가폰을 잡은 뮤직비디오처럼 허술한 멋으로 자유롭게 몸을 흔들며 기성의 공식을 타파했다.(김도헌)
메이시 그레이(Macy Gray) – I try
1999년, 세기말 혼동시대를 감추려고 한 것인지 그 무렵에는 에리카 바두, 디안젤로, 맥스웰 등 지금 기준에서도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른바 '네오소울' 아티스트들이 줄지어 출현했다. 아마 이 부분 싱글로서는 가장 큰 성과가 'I try'였을 것이다. 처음 1997년에 영화 < 러브 존스 >와 < 픽처 퍼펙트 >에 삽입될 때는 반응이 미지근했지만 데뷔 앨범 < On How Life Is >에서 두 번째 싱글로 공개되었을 때는 스매시 히트였다. 그래미상에서도 최우수 여성 팝 보컬 퍼포먼스의 포상을 받았다. 오랫동안 다져진 재즈 컬러가 발견되지만 매우 다채로운 장르터치를 보인다. '보컬 배우'로 일컬어도 손색이 없다. 그랬기에 이 단 한 곡(빌보드 싱글5위)만 가진 '원 히트 원더'임에도 곧바로 베스트앨범이 출시되었다. (임진모)
탈 바크만(Tal Bachman) - She's so high
대학 시절 김태희를 본 동기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학교에서 가장 인기 많은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고 그 친구와 대화할수록 범접할 수 없는 천상계(?)의 사람임을 느끼게 되는, 그녀를 설명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 잔다르크, 아프로디테까지 등장한다. 귀여운 스토리텔링 덕분에 이 모던 록은 캐나다 차트에서 단숨에 1위를 차지한다. 생소하게 다가올 가수 탈 바크만은 밴드 게스 후와 BTO(Bachman Turner Overdrive)를 이끈 랜디 바크만의 아들이다.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재능과 준수한 얼굴, 거기에 첫 싱글이 대박이 났음에도 이후 발매한 2집은 거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즘의 고전 코너 '원 히트 원더스'에서 볼 수 있길. (정유나)
콘(Korn) - Freak on a leash
괴리의 연속이라 하겠다. 버스에서 고음을 단속적으로 흘리다가도 후렴에서 둔중한 기타 배킹으로 육박해오는 기타들의 움직임이 괴리의 장면이었고, 브릿지에 이르러 언어체계를 기괴하게 회피해버리는 조나단 데이비스(Jonathan Davis)의 리드미컬한 보컬 역시 괴리를 노정하는 광경이었으며, 이 종잡을 수 없는 구성물들이 얼개 곳곳에 걸려서는 기어코 서사를 이뤄버리는 구성이 그 자체로 괴리의 현장이었다. 곡의 흥행에 박차를 가한 뮤직비디오는 어떠했나. 2D 애니메이션 속 허구의 세계와 카메라로 촬영한 현실의 세계를 초현실적인 CG 소품으로 아슬아슬하게 연결한 토드 맥팔레인(Todd McFarlane)의 영상은, 말하자면 완벽하게 다른 두 차원이 가까스로 조우에 성공한 결과다. 콘(Korn)은 이런 식으로 괴리를 창조하는 데 능했다. 괴리를 통해 곧 불안을 표현하는 데 뛰어났으며, 그 불안을 뉴 밀레니엄의 직전에서 시대의 스타일로 실현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수호)
푸 파이터스(Foo Fighters) - Learn to fly
타나토스를 마주하고서, 데이브 그롤(Dave Grohl)은 끝내 살아가기로 했다. 다시 음악으로 살기를 택했다. 시애틀 신의 인사들이 죽거나, 사라지거나, 혹은 퇴장하는 한복판에서 데이브 그롤은 결국 그렇게 살아 남아버렸다. 그랬기에 그에게 있어 음악이란 어쩌면 생의 본능이 현현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디스코그래피 곳곳에서 긍정을 노래하고 희망을 이야기했던 것은 어느 시점부터 생의 본능이 그의 행적을 완전히 지탱했기 때문일 테다. 이 한복판에 'Learn to fly'가 있다. '살아야 하기에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곧 곡의 메시지고, 그 메시지를 실어나르는 것은 캐치한 멜로디와 활기찬 사운드다.
담백한 사운드로 삶을 긍정하는 곡은 1999년이 저물어가는 시점에 세상에 등장했다. 그보다 몇 해 전 데이브 그롤은 한 연약한 허무주의자와 함께 그런지의 스타일을 만들었고, 더 이른 시점에는 맹렬한 하드코어 펑크 사운드에자신을 세차게 내던졌던 바 있다. 어지럽게 살아온 1990년대, 그 끝자락에 이르러 삶을 재확인해 만든 곡이 어느 순간, 삶의 의미를 모두에게 완전히 발현하고는 그해의 히트곡이 됐다. 생의 본능이 성공적으로 발했다. (이수호)
98 디그리스(98 Degrees) - Because of you
1997년에 공개한 데뷔곡 'Invisible man'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1년 후인 1998년 가을에 발표해서 1999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3위까지 오른 'Because of you'의 가사는 유치하고 촌스럽지만 멜로디와 리듬은 세련됐고 유려했다. 살랑살랑 들썩이는 비트와 부끄러운 듯 졸졸 흐르는 선율을 한층 더 부각한 것은 백인 네 명이 만들어 낸 보컬과 화음. 모타운과 계약한 98 디그리스는 앞에 등장한 백스트리트 보이스, 엔싱크와는 달리 알앤비의 농도를 높여 자신들의 인기에 예열을 가했다.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일년' 같은 한국형 업템포 알앤비는 바로 98 디그리스에게 채무를 지고 있다. (소승근)
이글 아이 체리(Eagle Eye Cheery) – Save tonight
재즈 아티스트 돈 체리와 화가 모니카 체리 부부의 아들이자 싱어송라이터 네네 체리의 남동생. 이렇듯 예술가의 피로 무장한 아티스트의 혼을 본국만이 감당하기엔 당연히 벅찼을 것이다. 이글스와 탐 페티를 섞어놓은 듯한 로킹한 어덜트 컨템포러리로 무장한 데뷔작 < Desireless >는 스웨덴의 마이너 레이블 출신이라는 태생의 열악함을 무시한채 더 넓은 시장으로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겨 갔다.
특히 인기의 기수에 섰던 이 곡은 1년 반에 걸쳐 유럽 전역과 영국, 미국에 릴리즈되기에 이르렀으며, 1999년 빌보드 Hot 100에서는 22위에 이름을 올리며 세기말 히트곡을 언급할 때 반드시 포함시켜야 하는 넘버로 정착하였다. 닥쳐올 내일을 걱정하기 보다는 현재에 충실하고 지금을 즐기자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소박하면서도 단단한 록 사운드로 담담히 노래하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 잠시나마 안정을 가져다 주었던 추억의 트랙. 내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여, 부디 이 노래를 들으며 잠깐이라도 'Save tonight' 하시기를. (황선업)
제이지(Jay-Z) - Big pimpin'
제이지와 팀버랜드가 처음 인연을 맺은 'Nigga what, nigga who (Originator 99)'와 달리 이 노래는 빌보드 싱글 차트 18위까지 오르며 히트했다. 'Nigga what'과 마찬가지로 'Big pimpin''도 팀버랜드 특유의 오밀조밀한 리듬이 근간을 이루지만 'Big pimpin''에는 청취자들을 홀릴 장치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1957년 개봉한 이집트 영화 < Fata Ahlami >의 사운드트랙 'Khosara khosara'에서 가져온 루프였다. 이 샘플로 'Big pimpin''은 신선함과 이국적인 흥을 발산했다. 랩 음악에서의 여성 비하를 예술적 표현으로 너그럽게 수용하는 사람들한테는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한동윤)
에펠 65(Eiffel 65) - Blue (Da ba dee)
'솔직하면 매력 없다'라는 말처럼 현재는 그 위세가 대폭 꺾였지만 1990년대 유로댄스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유럽 권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이 댄스 장르는 꾸밈과 가식 없이 말초신경을 흔들어버리는 멜로디와 강한 비트를 내세워 영미권의 음악시장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클럽까지,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중 이름과 다르게 이탈리아 출신인 3인조 그룹 에펠 65의 'Blue (Da ba dee)'는 1990년대 말의 유로댄스를 대표하는 곡. 피아노와 보코더를 활용한 환각적이고 중독적인 후렴구, 신나는 업비트 템포로 대중의 귀를 홀렸다. 음악 쓸 줄 아는 마블 스튜디오 또한 < 아이언맨 3 >의 오프닝 씬에 1999년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이 곡을 사용하였다. (이택용)
림프 비즈킷(Limp Bizkit) – Nookie
1990년대 후반을 휩쓴 것은 누가 뭐래도 뉴메탈이었다. 필자 역시 학창시절의 갈 곳 없는 답답함을 후련한 기타 사운드와 그로울링을 통해 잠시나마 해소할 수 있었는데, 나를 구원해 준 영웅들 중 선봉에 서있던 팀은 누가 뭐래도 이들이었다. 뭔가 비장하고 음울했던 다른 밴드들과 달리 보다 놀기 좋은 그루비한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덕분에 기분전환용으로 더 적합했다고 할까. 더불어 괴기스러웠던 웨스 볼랜드의 분장이나, 끊임없이 이슈를 양산해내는 프레드 더스트의 존재감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2집 < Significant Other >의 리드곡이었던 본 트랙은 보다 힙합의 비트감을 강조하며 데뷔작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확립시킨 야심작. 퍼커션과 기타의 완급조절을 통한 전매특허 사운드는 이때 정착되었고, 이러한 곡 운용을 통해 자신들만의 뉴메틀을 확립시키며 전성기를 열어젖혔다. 1999년 앨범 판매량7위를 기록함과 동시에 대표작인 < Chocolate Starfish and Hot Dog Flavored Water >의 연결고리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 이와 동시에 저 멀리 타국에 있는 나의 10대 시절을 수놓은,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한 획을 그은 멋진 곡. (황선업)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 - Bills, bills, bills
세기말 걸그룹 시장은 TLC가 끌고 데스티니스 차일드가 밀었다. 'No scrubs'를 작곡한 걸그룹 선배 엑스케이프(Xscape)의 칸디 버러스가 선사한 'Bills, bills, bills'로 데스티니스 차일드는 미국 최초의 넘버 원 싱글을 갖게 됐다. 부드러운 기타 리프와 비트는 감각적이었고 여풍당당 가사는 TLC를 능가할 정도로 과감했다. 핸드폰 요금, 고지서, 자동차 유지비도 못 내면서 철없이 보살핌을 바라는 남자에게 '넌 하찮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놈이야'라 일갈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과감한 시도였다. 20세기 4인조였던 데스티니스 차일드를 대표하고, 2001년 < Survivor >의 초 히트와 비욘세 사가(Saga)를 예고했다는 점에서 'Independent woman pt.1'만큼 의미 있는 곡이다. (김도헌)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 – All star
너바나가 불을 당긴 1990년대 펑크 록의 부활은 네오 펑크를 거쳐 스카 리듬을 더한 스카 펑크(Ska Punk) 유행으로 계승됐다. 노 다웃, 골드핑거, 랜시드와 같은 거대한 이름부터 서브라임, 컬쳐 쇼크, 릴 빅 피쉬 등 신진 밴드들이 재기 발랄한 리듬과 비판적 메시지를 뽐냈다. 그러나 세기말 히트를 넘어 21세기까지 인터넷 밈(Meme)으로 살아남은 곡은 캘리포니아 밴드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의 'All star'다. 1999년 당시에도 빌보드 싱글 차트 4위에 오른 인기곡이었지만 영생을 얻은 건 드림웍스의 간판 애니메이션 < 슈렉 >이다. 미워할 수 없는 초록 괴물의 유쾌한(?) 일상을 느긋한 리듬으로 그린 인상이 어찌나 강했는지, 지금도 수많은 유튜브 크리에이터들과 인터넷 커뮤니티가 거부할 수 없는 '필수요소'로 이 곡을 노래한다. (김도헌)
뉴 래디컬스(New Radicals) - You get what you give
1999년 반짝인 곡을 소개하는 특집이나 슬프게도 이 밴드는 1999년에 해체까지 했다. 해산 이유는 잔혹한 조별 과제만큼이나 보컬 그렉 알렉산더에게 집중된 역할 때문이었는데 그렉은 가창과 작곡, 작사까지 (해야만) 했던 중심 멤버였다. 그는 노래에서 “코트니 러브와 마릴린 맨슨, 너흰 다 가짜야!”라며 가식적인 미디어를 공격했고, 느닷없는 저격에 마릴린 맨슨은 그렉을 만나면 두개골을 부시겠다고 단단히 화를 냈다. 핫한 이슈와 그만큼 뜨거운 보컬로 그 해 라디오 전파를 가장 많이 탄 노래로 뽑혔다. 다행히 머리가 박살나지 않은 그렉은 밴드 해체 후에도 작곡을 놓지 않았는데, 그 유명한 < 비긴 어게인 >의 'Lost stars'를 만드는데 이른다. (정유나)
티엘씨(TLC) – No Scrubs
백인 남성 지배의 미국사회에서 흑인 여성의 존재는 아주 오랫동안 아니 지금도 바닥이다. 그런 억압구조의 현실에서 흑인 여자 셋이 '차도 없는 주제에 내 전화번호를 따려는' 스크럽을 기생'충'으로 깔고 '내 연인 혹은 섹스파트너로는 부적합'하다는 메시지는 1999년 만해도 대담함이었다. 당대엔 거의 '페미니즘'송으로 통했다. 미끈하면서도 독특한 R&B 형식이라 더더욱 호평 다발을 낳았다. 영국 NME는 1999년 베스트트랙 2위로 고평했고 1990년대 대표하는 곡의 하나로 선정한 매체도 부지기수. 여기저기서 수작의 특전을 누렸다. 에드 시런의 'Shape of you'가 가사의 진행 리듬이 이 곡과 유사하다는 논란 끝에 'No scrubs'의 작곡자 넷이 무더기로 시런 곡의 크레딧에 등재되는 표절사고가 그중 하나였다. (임진모)
블링크 182(Blink-182) - All the small thing
미국에서만 500만장이 팔린 이들의 초대박 세 번째 앨범 < Enema of the State >의 두 번째 싱글로 빌보드 차트 6위까지 올랐으며 이제는 1990년대 펑크팝의 명곡으로 평가받는다. 런닝타임이 고작 2분45초에 불과하지만 '징징징징징징징징' 경쾌한 16비트 기타 리프로 시작해 쉴 새 없이 달리다보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중독성 강한 노래다. 처음 들을 때 어설픈 음 전개와 엉성한 화음에 이게 뭐지 하다가도 의외로 탄탄한 곡 구성과 연주력 그리고 귀와 입에 착 달라붙는 멜로디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며 한 번 더 플레이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누가 뭐래도 “나나나”는 언제나 대중적 떼창의 필승카드인 듯.
1992년 결성된 이 밴드의 세 아이들은 음악처럼 자유분방하고 철없는 일탈을 즐겼다. 그럼에도 날마다 리더 Tom Delonge네 집 차고에서 진지하게 음악적 실력을 연마하며 내공을 키웠다. 가사와 앨범 재킷, 그리고 MV에 나타나는 짖굿은 농담과 섹드립에 장난기 가득한 패러디까지 이들은 90년대 잘 노는 아이들의 전형을 보여준 악동들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것도 진심으로 돌보면 진리를 불러온다”는 가사처럼 이들이 자신들에게서 찾은 작은 재능과 끼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되었다. (윤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