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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공일오비가 지난달 선보인 '325km' 뮤직비디오는 무척 예스럽다. 기본적으로 낮은 화질이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노래 제목은 그러데이션 효과를 준 금속성의 폰트로 꾸며 1980, 90년대에 유행한 비디오게임 로고를 흉내 냈다. 영상 편집도 오래전에 만들어진 느낌이 나게끔 의도적으로 단순하고 촌스럽게 했다. 이따금 깔리는 노이즈 또한 낡은 분위기에 한몫한다. 구식으로 똘똘 뭉쳤다.
이런 방식의 연출은 이제 제법 흔하다. 5월만 해도 '325km'를 비롯해 최예근 '고릴라', 이그지스트 'Whatever', 일공육공 'Just wanna die today', 넘넘 '째깍째깍', 락커스빈 '불러본다', MC 스나이퍼 '야간비행', 재규어 중사 '종말로', 곽진언 '너의 모습' 등 비디오테이프 화질을 콘셉트로 택한 뮤직비디오가 여럿 나왔다. 선명하지 못한 화면의 영상 제작은 우리 대중음악계의 경향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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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흐름을 선도한 대표적인 인물은 미국 가수 브루노 마스(Bruno Mars)다. 그가 2013년에 공개한 'Treasure' 뮤직비디오의 화질은 몹시 흐릿했다. 영상이 깔끔하지 않은 탓에 정식 뮤직비디오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노래 제목 옆에는 'official'이라는 인증의 단어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브루노 마스는 노래의 분위기를 살릴 목적으로 거친 질감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Treasure'의 장르는 1970년대에 유행한 디스코다. 오래된 느낌을 풍김으로써 이 양식이 지닌 시대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노래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함에 따라 비디오테이프 효과도 널리 퍼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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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다수의 가수가 브루노 마스처럼 과거에 인기를 얻었던 장르를 소화할 때 비디오테이프 질감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고 있다. 1980년대 뉴 스쿨 힙합 사운드를 추구한 45RPM의 '붐박스', 1990년대 초반에 성행했던 뉴 잭 스윙 골격을 취한 박재범과 기린의 'City breeze'가 이 양상의 주요 예가 될 것이다. 이달의 소녀 1/3도 1990년대 걸 그룹의 발라드 스타일을 흉내 낸 '비의 목소리 51db' 뮤직비디오를 비디오테이프 화면으로 꾸민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유빈의 '숙녀', 뮤지의 '아가씨2', 재한 일본인 가수 유키카의 '네온' 같은 시티 팝 노래도 같은 맥락으로 언급할 수 있다. 시티 팝은 1980년대에 일본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스타일이다. 이 노래들도 그 시절 정서를 구현하고자 비디오테이프에 생기는 노이즈나 아날로그 캠코더 촬영 모드를 영상에 담아냈다.
투박한 것이 적은 현실도 저화질 뮤직비디오의 증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아이돌 그룹이 성황을 이루면서 화려함과 세련미를 뽐내는 뮤직비디오가 흔해졌다. 화사한 작품이 넘쳐나다 보니 화질이 떨어지고 연출이 조악한 영상이 오히려 귀해지는 상황이 왔다. 이로써 비디오테이프 기법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면 특별함을 내보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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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되지 않은 너저분한 모습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독특한 개성으로 인식되는 추세 또한 비디오테이프 연출의 확산에 일조한다. 녹슨 대문과 색이 바랜 간판이 반기는 황량한 동네, 공사를 하다 만 것 같이 콘크리트 벽 사이로 철근과 배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로 꾸민 카페가 SNS를 타고 사진 촬영의 명소로 부상했다. 날로 발전하는 세상에서 낡고 거친 면모가 진귀한 멋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을 고려해 비디오테이프 화면을 내건 뮤직비디오들은 을지로, 문래동 같은 동네를 촬영지로 택하곤 한다.
10대나 20대 초반의 젊은 세대 대부분은 비디오테이프를 구경조차 못해 봤을 것이다. 비디오테이프가 DVD 같은 다른 저장 매체에 밀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이 비디오테이프 기법의 뮤직비디오를 참신한 것으로 느껴지도록 한다. 이렇게 비디오테이프 스타일의 뮤직비디오는 과거의 문물을 새롭게 즐기는 '뉴트로'의 한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