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성탄절 흥행전 승자는 결국 <아쿠아맨>이었다. 땅의 아들이자 바다의 왕이며, 심해의 수호자인 슈퍼히어로 아쿠아맨이 지상 세계와 수중 세계를 오가며 펼치는,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으나 화려한 드라마를 극화한 1억6000만 달러짜리 할리우드 발 대형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는 개봉 9일째인 27일까지 누적 관객 수 240만에 육박하며,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 약 226만), <맨 오브 스틸>(2013, 218만), <원더 우먼>(2017, 217만) 등, 마블코믹스와 더불어 미국 만화 시장의 80% 가량을 점령하고 있는 만화책 출판사 DC코믹스 국내 성적을 모두 갈아치운 것으로 전해졌다.
영화는 <더 테러 라이브>(2013)의 김병우 감독, 하정우 이선균 주연의 < PMC: 더 벙커 > (이하 PMC)가 선보인 26일부터는 박스 오피스 정상에서 내려와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28일 기준 예매율에서는 < PMC >를 1만 표 이상 앞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스핀오프 <범블비>보다는 4만 표 이상 우위를 점하고 있다. 흥행 순위에서도 앞서고 있고. 이와 같은 지표로 판단컨대, <아쿠아맨>이 2018년 연말과 2019년 연초의 최종 흥행 승자로 귀결될 것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특히 같은 날 선보인 두 국산 화제작 <스윙 키즈>와 <마약왕>과의 경쟁에서 일찌감치 완승을 거두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두 영화는 200만 선도 돌파하기 힘겨울 터여서다. 대체 어떻게 이런 불상사(?)가 벌어진 걸까? 둘 다 150억 원이 넘는 거액이 투하된 한국산 대작이거늘. 그 이유는 <아쿠아맨>의 강점에서가 아니라, <스윙 키즈>와 <마약왕>의 약점에서 찾아야 할 듯.
<아쿠아맨>의 흥행세 '폭발적' 아냐
지난 해 12월 20일 선보인 김용화 감독의 <신과함께-죄와 벌>이 25일까지 6일 간 동원한 관객 수가 477만여 명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쿠아맨>의 기세를 결코 '폭발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세, 정도라고 할까. 포털 다음의 『글로벌 기업 스토리』(저자 김환표)를 참고해보면, “마블코믹스의 슈퍼 히어로들이 결점을 가진 영웅, 그러니까 인간미를 지닌 캐릭터인데 반해 DC코믹스가 탄생시킨 슈퍼 히어로들은 초인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특징이”란다. “마블코믹스가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비해 DC코믹스는 스토리 중심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으며, 작품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고 진지한 편이”란다.
아니나 다를까, 아쿠아맨 아서 커리(제이슨 모모아 분)는 인간미가 여간 부족한 게 아니다. 로봇 캐릭터 범블비와 비교해도, 지나치게 밋밋하고 단순하며 단선적이다. 따라서 아쿠아맨에만 초점을 맞추면 영화는 흥미롭되 그 이상은 아니다. 헌데 아서의 파트너 격인 메라(앰버 허드)와, 엄마인 아틀라나 여왕(니콜 키드먼) 두 여성 캐릭터들이 그 결핍을 보완해준다. 분위기도 진지하기 하나 어두운 편은 아니다. 관객들은 140분여의 영화를 '편히' 즐길 수 있다. 그에 반해 <스윙 키즈>과 <마약왕>은 도저히 그럴 수 없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주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무게 때문이다. 승부수는 그 지점에서 갈린 게 아닐까, 싶다.
<스윙 키즈>, 2018년의 영화 중 한편으로 손색없어
<스윙 키즈>에 대해 강형철 감독(<과속 스캔들> <써니>)은 말했다. “가장 아픈 시대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서 '춤'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행복하고자 몸부림쳤던 오합지졸 댄스단의 이야기”라고. “우리나라의 비극적 역사인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신나는 행위인 '춤'이라는 소재를 통해 전쟁과 이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영화의 주제는 극 중 인물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오듯 “이념 따윈 엿이나 먹어라!”(Fuck the Ideology)다. 내게 <스윙 키즈>는 감독의 작의(作意)가 100% 구현된 문제적 수작이다. 현실을 향한 사회적 문제의식이라곤 거의 맛볼 수 없었던 감독의 전작들보다 한층 더 성숙하게 다가선다.
“2018년, 단 한편의 영화”로 여기고 있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나 “올해의 장편 데뷔작”이라 할 <미스백>(이지원) 등과 함께 2018년의 영화 중 한편으로 손색없다. 이데올로기라는 무거운 이슈를 어떻게 오락이라는 도구로 효과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를 입증한 사례이기도. 친공이든 반공이든 한국전쟁 와중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었던 실제 인물들을 토대로 자유롭게 극화한 팩션 영화로 말이다. 더욱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문화예술은 영화 이전에 춤과 음악인지라, <스윙 키즈>는 2018년의 선물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수용소 내 최고 트러블메이커 로기수(도경수), 무려 4개 국어가 가능한 무허가 통역사 양판래(박혜수), 잃어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유명해져야 하는 사랑꾼 강병삼(오정세), 반전 댄스실력 갖춘 영양실조 춤꾼 샤오팡(김민호), 그리고 이들의 리더, 전직 브로드웨이 탭댄서 잭슨(자레드 그라임스)까지, 우여곡절 끝에 한 자리에 모인 그들 '스윙키즈'는 올해의 캐릭터들이요 배우들이다, 내게는. 오정세야 애당초 연기꾼이다. 도경수는 비로소 연기자로 각인됐다. 샤오팡/김민호는 그야말로 발군이다. 특히 박혜수/앙판래는 소위 '치명적 매혹'(Fatal Attraction)의 발견이다.
나는 난생 처음 탭댄스의 마력에 홀렸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내심,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무게감이 춤과 음악으로 비상시키려한 영화의 시도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겠다는 우려를 품기는 했다. 춤에, 그것도 탭댄스에 낯설어할 이들이라면 더욱 더. 내 우려는 현실이 됐다. 네이버 관객 평점 9.1점에 호평 비율이 90%가 넘거늘, 100만 선을 돌파하는데도 그렇게 힘겨워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마약왕>의 부진 예상대로…동일시 할 인물 없어
반면 <마약왕>은 예상대로였다. 동의 여부를 떠나 마약은 예나 지금이나 이 사회의 으뜸 금기 중 하나 아닌가. 영화가 실화를 근거로 했다고는 하나, 관객들이 그 금기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꺼려할 것이 뻔했다. 그런데 그 금기의 주인공을 목하 그 또래 대한민국 최고 배우인 송강호가 연기한다? 적잖은 관객들이 당혹스러워 할 공산이 컸다. 헌데도 오로지 송강호만으로 승부를 걸려 했다. 한국 관객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오판이었다. 이 땅의 관객은 하도 엄격한데다 '잔혹'(?)해, 출연진에 따라 영화를 보고 안 보고를 결정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 무엇보다 영화가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는 등의 입소문을 타질 못하면, 뒷심을 받지 못하고 기대한바 흥행 성적을 일궈내지 못한다는 것쯤은 이미 입증될 대로 입증된 상식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영화는 개봉 전부터 이미 영화가 별로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소문이 결국 현실이 됐다.
대중 영화는 모름지기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해야 한다. <마약왕>에는 그럴 인물이, 주요 캐릭터 중에는 없다. 송강호가 분한 이두삼부터가 그렇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흑역사의 연속일지언정, 그런 양아치 출신 기업인에 어찌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혹 이두삼을 박정희의 은유로 볼 경우, 동일시란 아예 불가능해진다. 배두나가 분한 로비스트(?) 김정아도, 당장 장XX 같은 실존 인물이 연상되나 마찬가지다. 검사 김인구(조정석)를 그렇게 시종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조소를 금치 못하겠다. 전작 <내부자들>(2015)이나 장준환의 <1987>(2017)처럼, 일정한 거리감 내지 균형감을 유지했어야 한다. 그야말로 역사‧현실 감각 부재다. <내부자들> 때 정이 떨어져서인지는 몰라도, 의당 짚었어야 할 언론은 등장시키질 않으면서, 현실감을 잃었다. 이두삼의 동생 이두환(김대명)이나 처 성숙경(김소진)에 다소 눈길이 가나, 양적‧질적 비중이 적어 관객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내부자들>의 감독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연출력 흔들려
가장 실망스러운 건 <내부자들>의 감독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연출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완급, 강약 조절에 실패했다고 할까. 어딘가 쫒기며 서둘렀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영화의 주 마케팅 요소였을 연기마저도, 개별 연기야 무난했으나 제 각각이다. 최강 연기자들이 집결했건만, 그 '케미'가 영 아니다. 송강호의 연기가 불안하다고 까지 느껴졌는데, <쉬리>(1999) 이후 처음이다. 당황스러웠다. 개인적 친분을 넘어 '팬심'까지 품어왔던 조영욱의 음악마저도 인상적이지 않다면 내 실망을 이해할까.
오페라 아리아 중 가장 좋아하는,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중 그 명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도 귀를 잡지 못했다. 영화 말미 이두삼이 너무 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릴 때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는바, 엔딩 크레디트에 또 한 번 나올 때는 조영욱이 내가 아는 그 조영욱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짜증까지 일었다. 영화는 거의 총체적 난국이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쿠아맨>이 완승을 거뒀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