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많던 '록페'는 어디로 갔을까. 한 때 모든 음악 페스티벌은 곧 록을 일컫던 시절이 있었지만, 2018년 무수한 음악 축제 중 록의 이름을 내건 메이저 페스티벌은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과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뿐이다. 다행히도 국내 유일의 록 페스티벌이라는 굵직한 이름 덕에 예년보다 9천여 명 이상 많은 8만 5천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봄철 라인업 공개부터 치열한 얼리버드 경쟁을 벌이던 지난날들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음에도 공연을 취재하러 도착한 3일 차엔 3만 팬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여느 때보다 복잡한 감정을 갖고 송도 달빛축제공원으로 향했지만 다를 것은 없었다. 팔찌를 차고 선크림을 바르고,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켜면서 스테이지로 발을 디디는 과정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연례행사, '록페 전투 모드'로의 진입이었다. 2018년 여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관문,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문이 열렸다.
|
네버 영 비치(Never Young Beach) : 넘실넘실 뜨거운 태양 아래
선선한 바람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넘실거리는 기타 라인이 들리는 곳으로 서둘러 발길을 향했다. 탄탄한 연주력을 바탕으로 기분 좋은 기타 팝을 선보이는 네버 영 비치의 음악에 몸을 맡기는 팬들의 모습이 '록페의 전초전'으로 꽤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시티팝 리바이벌의 바람을 타고 일본 음악 씬의 유행을 이끌고 있는 대표 밴드답게 확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눈도장을 찍었다.
|
워크 더 문(Walk The Moon) : 유쾌하게 Shut Up And Dance
더위가 절정에 이른 한낮, <라이언킹>의 우렁찬 'Circle of life' 외침이 들릴 때 모두가 워크 더 문의 등장을 눈치챘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를 번갈아 외치며 등장한 프론트맨 니콜라스 페트리카는 웃통을 벗은 채 종횡무진 무대를 누볐고, 나머지 멤버들과 함께 흥을 돋우는 신스팝 퍼레이드를 펼쳐갔다. 모두가 기다린 단 한 곡 'Shut up and dance'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은 아마 우리보단 밴드에게 더욱 잊지 못할 장관이지 않을까 싶다.
|
새소년 : 나날이 여유로워지는 신인의 날갯짓
대세가 된 이름답게 여러 무대에서 새소년 라이브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밴드에게도 펜타포트는 큰 무대였는지 보컬 황소윤은 '이렇게 큰 곳에서 공연하는 건 처음이다. 믿기지 않는다'며 감격한 모습이었다. 물론 본 무대에 들어서자마자 소년 소녀들은 언제 수줍었냐는 듯 여유롭고 대범한 몽환의 카리스마로 객석을 장악해나갔다. 스테이지를 거의 꽉 채운 팬들에게 밴드는 더욱 자신감 있는 연주와 애드립으로 무대를 즐기며 더욱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을 약속했다. 특히 황소윤의 존재는 언제 보아도 참, 멋있다.
|
후바스탱크(Hoobastank) : 사춘기 추억을 현실에서 조우하다
'The reason'과 'Crawling in the dark'에 울적한 반항기를 달래던 사춘기 시절이 언제였던가. 2004년 ETP 페스티벌과 2007년의 내한, 2014년 현대카드 시티브레이크에서의 무대보다도 더욱 추억의 이름이 되어버린 그들이었다. 'Same direction'의 후렴부를 함께 달리고 사운드 체킹에 아이처럼 기뻐하는 밴드의 모습은 자꾸만 과거의 어린 나, 음악을 처음 듣기 시작하던 시절의 나를 깨워냈다.
사실 썩 인상 깊은 무대는 아니었다. 긴 공백기와 원 히트의 한계로 제한된 셋 리스트를 알고 있던 올드 팬들은 '그 시절 좋아했던 밴드' 정도의 감상을 가졌고, 새 시대의 음악 팬들에겐 흥은 돋울지언정 그들이 어떤 밴드인지를 다 이해하긴 어려운 시간이었다. 지나가던 발걸음도 돌리고 다 같이 합창해야 했을 'The reason'을 따라 부르는 사람도 드물었다. 하늘로 활짝 팔을 벌리는 내가 오히려 묘하게 어색하기도. 추억의 한 페이지와 조우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
서치모스(Suchmos) : 우리는 서치모스! 대세의 훌륭한 쇼케이스
'일본의 자미로콰이'라 극찬받는 서치모스의 무대. 인터뷰 말미 '공연장에서 봐요!'라 즐겁게 인사하고 온 터라 그 기대가 더욱 남달랐다. 의외로 적었던 관객들 사이를 거쳐 앞쪽으로 이동하다 보니 이미 밴드는 리허설로 미리 한 곡 부르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그 이후는 정말 대단했다!
치밀하면서도 여유로운 바이브 위에 '우리는 서치모스입니다. 신나게 놀아요~'라며 한국어로 애드립하는 보컬 욘스의 퍼포먼스에 장내는 순식간에 열광의 장. 자국 내선 좀체 선보이지 않는 'Stay tune'부터 '808', 'Volt-age' 까지, 첫 해외 공연을 위한 확실한 라인업과 열정적인 라이브의 협연은 필자 바로 뒤 거대한 슬램 존을 만들 정도의 에너지를 뿜어냈다.
함께 공연을 본 일본 음악 전문가, 황선업 평론가가 '작년 록인 재팬에서 봤을 때는 워낙 큰 공연장에서 멀리 떨어져서 봤던지라 노래나 사운드가 다소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오늘은 보컬과 연주 모두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완벽한 모습이었다. 특히 volt-age는 올해의 퍼포먼스로 꼽을 만.'라며 감격할 정도였으니. 이번 펜타의 훌륭한 반전 확정.
|
혁오 : 메인 스테이지가 좁다. 거대해진 이름
'위잉위잉'의 간결함으로부터 혁오 밴드는 점차 몸집을 불려 나갔고 그 팽창은 이들을 여름날 록 페스티벌의 메인 스테이지로 인도했다. 확실히 이제 그들에겐 메인 스테이지가 어울린다. 아니, 이 날 '완리'의 웅장한 코러스와 'Citizen Kane'의 끓어 넘치는 아드레날린 폭주를 보건대 메인 스테이지도 좁게 느껴졌다. 헤드라이너로의 자격을 증명하려는 밴드와 한국에서 가장 열정적인 페스티벌 팬들은 저물어가는 태양을 여느 때보다도 멋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감성적인 초창기의 '멋진 헛간'과 'Panda bear'를 강력하게 바꿔놓은 것은 물론 새 앨범의 사이키델릭한 'Graduation'과 'Goodbye seoul'까지 근사하게 연주해냈다. 불안한 청춘의 송가 'Tomboy'로 대규모 합창까지 이끌어내는 모습은 여타 해외 밴드들의 내한 공연이 부럽지 않을 정도. 오혁의 멘트는 어수룩했지만 밴드의 에너지는 정교하고도 강력했다.
|
스타세일러(Starsailor) : 10년의 공백에도 잊히지 않은 별사공들의 낭만
긴 휴지기 끝에 2017년 신보를 발표하며 돌아온 스타세일러는 기대 속에선 후바스탱크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스타세일러의 무대에는 후바스탱크 차례에 없었던 감동이 있었다. 제임스 월시의 목소리는 전성기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호소력이 있었고, 'Alcoholic'과 'Poor misguided fool'의 대표곡으로 추억을 환기하면서 '모두가 즐기는 분위기'를 형성한 것 역시 주효했다. MGMT의 'Kids'와 본인들의 대표곡 'Tell me it's not over'를 섞어 감동을 배가한 것도 절묘한 한 수. 별사공들의 감성은 긴 시간의 바다를 헤엄쳐와 여전히 마음에 다다를 힘을 갖추고 있었다.
|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My Bloody Valentine) : 광포한 우아함의 대폭주
일단은 사과부터 해야겠다. 2013년 첫 내한 공연의 까탈스러움만 기억하고 있던 터라 '완벽하지 않을 공연'이라는 불신이 깊이 자리했었고, 때문에 지난번처럼 곡을 중간에 멈춘다거나 연주를 두 번 한다거나 하면 곧바로 자리를 떠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폭발적인 노이즈 속에 귀를 찢을 듯 솟아오르는 'I only said'의 황홀한 멜로디가 들리는 순간 모든 불순한 생각들은 깨끗이 마음속에서 휘발되고 말았다.
'사운드 깎는 장인' 케빈 쉴즈와 그 멤버들은 매번 상상만 했던 광폭한 노이즈를 현실에 짙게 펼쳐놓으며 모두의 혼을 앗아갔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소리의 광풍 속 희미하게 찾아온 가녀린 목소리는 두 귀가 멀어버릴 굉음 속 단 하나의 구원처럼 여겨질 정도. 실수도 없었고 리플레이도 없었다. 혁신가 마이 블러디 밸렌타인의 황홀한 플레이만이 있었다.
그 거대한 출력에 객석은 장르 이름대로 신발만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드는 편과 초창기 펑크 록 라인업의 잔인한 질주에 마지막 힘을 슬램 존으로 던져버리는 편으로 양분됐다. 어떤 의미로든 록 페스티벌 마지막 무대에 걸맞게 모두의 진을 빼놓는 모습. 최후의 트랙 'Soon'에서도 그들은 부려 5~8분가량의 노이즈 안개를 깔며 최후를 억제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질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누군가에겐 천국이었으나 누군가에겐 지옥이었을 마이 블러디 밸렌타인의 피날레. 다행히도 난 잠시 하늘나라에 다녀온 쪽이었다.
|
총평
마지막 한 방이 아쉽긴 했어도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라인업이다. 2018년에 후바스탱크와 스타세일러를 보는 괴리감, 카사비안과 위저가 장식했던 지난날의 피날레가 자꾸 머릿속을 스쳤지만, 한정된 예산과 전만 못한 수요를 감안했을 때 나름 신구의 조화를 잘 맞춘 조합이라 생각했다. 다만 꼭 지적해야 할 부분은 음향이다. 몇 년째 고질적으로 지적되는 문제임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워크 더 문의 신디사이저와 새소년의 보컬은 흐릿했고, 서치모스 무대에선 밸런스를 지키지 못했다. 혁오의 초반부 역시 메인 스테이지로는 미달. '소리 장인'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무대에서야 사운드 이슈에서 신경을 끌 수 있었다.
올해로 13회 차를 맞는 펜타포트의 가치는 '여전히' 또는 '그대로' 일 것이다. 2010년대의 음악 씬이 록에 사망선고를 내려야 할지 말지를 아무리 갑론을박해도 펜타포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훌륭한 부지와 편의시설, 전국에서 가장 열광적이고 친절한 마니아들, 그리고 그들의 성원에 깊은 영감을 얻어 더욱 큰 무대를 꿈꾸는 밴드들과 아티스트들이 있다. 뚝심과 열정으로 올해도 고맙게 버텨준 펜타포트, 고맙다!
취재 및 자료 제공 : YESCOM 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