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내의 좌석이 모두 찰 때까지 스크린에 걸쳐있던 장막은 끝내 거두어지지 않았다. 약 1시간 50분가량 진행된 눈앞의 무대에 오롯이 집중해야만 했기에 밥 딜런만이 아닌 그의 밴드(His Band)를 눈여겨볼 수 있었다. 그가 의도한 바였는지, 이번 공연은 그저 밥 딜런의 연주와 노래가 아닌 드럼, 콘트라베이스, 전자 기타, 피아노, 페달 스틸 기타 등 다양한 악기들의 합주가 빛을 발했다.
오후 8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어두운 무대 위에서 강렬한 전자 기타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제멋대로 튕겨져 나오는 밥 딜런의 기타 연주와 밴드 사운드는 흡사 튜닝 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칠었다. 'All along the watchtower'의 연주를 듣고 그제야 눈치챘다. '아, 시작이구나!' 약 1~2분 정도의 짧은 연주가 끝나자 바로 'Don't think twice, it's alright'이 흘러나왔다. 곡과 곡 사이에 잠깐 꺼지는 조명을 제외하면 공연은 마지막까지 쉴 틈 없이 진행됐다. 인사나 멘트 따위는 '음유시인'의 성질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였다.
라이브 무대에서 원곡을 비틀고 전혀 다른 노래로 편곡하는 밥 딜런의 괴짜 같은 면모가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Highway 61 revisited'와 'Honest with me', 'Thunder on the mountain'처럼 원체 시끄러운 로큰롤 노래는 더욱 사운드를 키워 1960년대 로큰롤 붐과 이후의 하드 록 행보를 드럼 주자를 통해 그대로 재현했을 뿐만 아니라, 블루스를 기반으로 신나는 홍키 통크 느낌을 살린 'Duquesne whistle', 밥 딜런의 즉흥적인 재즈 피아노 연주가 돋보이는 'Pay in blood'는 핵심 가사를 들어야만 원곡을 알 수 있었다.
블루스를 향한 집착 중 단연 압권은 'Tangled up in blue'였다.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되던 흥겨운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재지(Jazzy)한 공기에 장조와 단조를 왔다 갔다 하는 기이한 반주가 혼을 빼놓았다. 거기에 리듬 기타처럼 들리는 하모니카라니, 그야말로 원작 파괴의 현장이었다. 공연 내내 독백하듯 가사를 읊조리던 밥 딜런이 크고 정확한 목소리로 'Tangled up in blue!'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미지의 곡으로 남아있었을 테다.
사실 이때 관객이 많이 빠져나가기도 했다. 공연 중에 짐을 싸서 나가는 여러 무리는 물론이고 공연자 측에서 촬영을 삼가 달라고 사전 공지를 했음에도 휴대폰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을 찍는 참사(?)까지 발생해 상당히 수준 이하의 관객 매너를 드러냈다.
밥 딜런의 무대를 처음 봤다면 랩처럼 쏘아대는 그의 창법이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음정을 죄다 무시하는 대신 박자를 밀고 당기며 긴 가사를 쪼개 소화하고, 때로는 창을 하듯이 큰 소리를 내기도 했다. 특히 앙코르 곡을 뺀 마지막 노래 'Gotta serve somebody'에서는 가스펠 코러스만 없었을 뿐 < Slow Train Coming >의 계시적인 자취를 그대로 표출할 만큼 77세 노장의 목소리는 힘차고 완고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무대에 모종의 기력을 느끼고 있을 때, 피아노 뒤에서 묵묵히 노래하던 밥 딜런이 대뜸 무대 중앙으로 나와 스탠드 마이크를 잡자 여기저기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굴을 잘 내비치지 않던 그가 마이크 기둥을 사선으로 기울이는 퍼포먼스를 하다니! 때마침 흘러나오는 끈적한 'Autumn leaves'와 이에 맞춰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 밥 딜런은 완연한 재즈 싱어였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Make you feel my love'에 이어 그의 보컬이 전혀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데 무리가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밥 딜런의 현대적인 감성을 포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편안한 컨템포러리 재즈 스타일로 재편성한 'Trying to get to heaven'과 'Simple twist of fate'의 잔잔한 페달 스틸 기타가 주조하는 부드러운 분위기는 눈을 감고 감상해도 좋을 만큼 부드럽고 익숙한 멜로디였다. 그래서 말을 건네듯 노래하는 밥 딜런의 창법이 더욱 심금을 울렸는지도 모른다.
공연이 공식적으로 끝나자 관중석은 환호와 휘슬 소리로 가득 찼다. 큰 소리로 앙코르를 외치고 기립박수를 치며 그가 다시 나타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멈추지 않는 박수갈채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피아노로 직진하는 밥 딜런의 인영을 보고 나서야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안심하고 착석했다. 이윽고 공연 내내 처음 듣는 바이올린 소리가 등장해 노래를 주도하고 밥 딜런 전설의 시작인 포크록 사운드가 들려왔다. 'Blowin' in the wind'의 목가적인 연주에 이어 마지막 곡 'Ballad of a thin man'에서는 에너지 넘치는 밴드 멤버들의 합주와 밥 딜런의 자유로운 하모니카 연주가 화룡점정을 이루며 끝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밥 딜런은 분명 관객과 소통했다.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거나 따라 부를 수 있도록 관객을 유도하는 것만이 소통은 아니다. '거장', '50년이 넘는 음악 활동', '노벨 문학상' 등 밥 딜런을 수식하는 거대한 표현들을 격파하듯 그는 소박한 옷차림에 수수한 그러나 강단 있는 목소리로 에너지를 전해주었다. 무대 위에서 순수히 음악으로 우리와 교감할 수 있기에 그는 '음유시인'이다.
사진 : 정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