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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을 기억하는 사람은 분명 팝가수 신디 로퍼(Cyndi Lauper)도 함께 기억한다. <킹키부츠> 관객들 가운데 40대 이상의 기성세대라면 웃고 울고 흥얼거리면서 잠시나마 신디 로퍼가 있던 1980년대 중반 그 시절에 대한 회상에 젖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잘 결부되지 않았던 '여자'와 '재미'를 묶어 여성권리에 눈뜨게 했던 노래 'Girl just want to have fun'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 곡이 빌보드차트 2위의 스매시 히트를 기록한 뒤 이어서 'Time after time', 'She bop', 'All through the night' 등 신디 로퍼 네 노래가 한해 줄줄이 전미차트 상위권을 누비며 포효했다. 2011년 복고 영화 <써니>의 마지막 엔드 크레딧에 흐르는 곡이(비록 신디 로퍼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Time after time'였으며 훨씬 전인 2000년, 여가수 왁스의 빅 히트 곡 '오빠'는 'She bop'을 원곡으로 다시 만든 노래였다.
신디 로퍼의 울림이 컸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음악인구의 가슴에 저장되었음을 증거 하는 예들이다. 'She bop'은 '니 밥 니 밥은 내 밥/ 내 밥 내 밥은 내 밥/ 니 밥 니 밥은 쉰 밥/ 내 밥 내 밥은 찬 밥...'으로 장난스럽게 '노가바'했던 걸 기억하는지. 돌이켜보면 그해 1984년에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라이벌' 마돈나는 한참 뒤처져있었다. 사람들은 앞선 신디 로퍼만을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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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컬러풀한 헤어와 메이크업, 장난기 넘치는 파안미소, 프로레슬러 헐크 호간과의 제휴(결과적으로 프로레슬링을 엔터테인먼트 쇼로 부흥시키는데 기여했다) 등 당대 연예 토픽은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슈퍼스타로 등극한 마돈나와는 결국 한판 붙어야 했다. 1986년 신디 로퍼가 앨범 < True Colors >를, 마돈나는 앨범 < True Blue >를 출시해 '트루(True)' 전쟁이 벌어졌다. 신디 로퍼의 타이틀이 1위를 차지하는 등 부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인기파장이 컸던 마돈나의 승리였다.
이때부터 하향세를 보이던 신디 로퍼는 1989년 빌보드 6위의 'I drove all night'를 끝으로 인기차트에서 사라졌다. 마돈나가 1990년대는 물론 2000년대, 2010년대에도 펄펄 나는 동안 신디 로퍼의 신곡, 새 음반을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가 살아있는 시제는 오로지 '과거'였다. 그걸로 끝인가 했지만 신디 로퍼는 끝내 다시 돌아왔다. 뮤지컬 <킹키 부츠>는 극적이고 화려한 귀환이었다.
따지고 보면 신디 로퍼와 <킹키부츠>의 연관은 숙명일 수밖에 없다. 'Girl just wanna have fun'을 부른 주인공답게 그는 오랫동안 평등 이데올로기를 실천해온 인물이다. 1997년에 만든 곡 'Ballad of Cleo and Joe'는 드랙퀸의 이중생활을 다뤘다. 성적 소수자들(LGBT)의 권리를 주창하면서 지금도 전 세계를 돌며 자선활동과 게이 프라이드 이벤트참여에 여념이 없다. 그가 동성애자 해방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친언니 엘렌이 레즈비언이고 자신은 열성적 평등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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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브로드웨이 초연에서 < 킹키부츠 >는 경쟁 작품인 < 마틸다 더 뮤지컬 >에 비해 조금 밀렸지만 개막 1개월이 채 안 돼 모든 상황을 갈아엎으며 흥행을 리드했고 토니상에서 작품상, 음악상, 남우주연상 등 6개 부문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짧은 시간에 가장 '핫'한 뮤지컬로 등극한 것이다. 실화에 바탕을 둔 드라마, '편견과 차별에서 인정과 소통으로'라는 '힙'한 주제가 이러한 대도약을 견인한 게 사실이지만 아마도 으뜸 승인(勝因)은 신디 로퍼의 뻬어난 음악일 것이다. 그는 여성 작곡가로서는 토니 역사상 최초로 음악상부문을 수상했다. 게다가 그에게 <킹키부츠>는 뮤지컬 처녀작이다.
하나의 스토리틀 내에서 곡을 만들어내야 하는 뮤지컬의 영역은 팝 작곡가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게다가 그가 처음 손댄 뮤지컬 음악이라는 점에서 토니대첩은 기적에 가깝다. 그래서 신디 로퍼가 이 뮤지컬의 음악을 썼다고 믿기 어렵다는 일반의 선입관이 터무니없지는 않다. 그는 1985년 그래미 최우수신인상을 탔고 1995년에는
'큰 그림'을 염두하고 썼다는 팝과 소울 스타일의 16곡은 신나는 리듬과 템포로 '흥'과 동격인 뮤지컬 음악의 정수를 구현한다. 유쾌하고 전개 또한 빠르고 유려해 첫 도전이 아닌 '뮤지컬 도사'가 쓴 느낌이다. 드랙 퀸 롤라의 찬가 'Land of Lola'를 비롯해 'Step one', 'Sex is in the heel', 'Everybody say yeah', 'What a woman wants', 'In this corner', 그리고 마지막 'Just be'까지 연신 관객들의 어깨를 들썩이고 발을 구르게 만든다. 쉴 새 없는 터져 나오는 댄스음악에 객석은 가만있을 수가 없다. 수시로 일어나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합창하고 싶은 충동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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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디 로퍼의 재능은 업 템포가 아니라 오히려 느린 발라드에서 빛을 발한다. 마치 “원래 내겐 'She bop'만이 아니라 'Time after time'이 있다”는 듯 발라드도 뮤지컬적으로 소화해낸다. 로렌의 짝사랑 고백 'The history of wrong guys', 찰리와 롤라가 제각각 아버지의 못난 아들임을 확인하면서 소통으로 가는 대목의 'Not my father's son', 찰리의 심기일전 'Soul of a man', 버림받은 롤라의 비가 'Hold me in your heart' 등 감성을 실어 나르는 처연한 선율들은 백미에 해당한다. 토니상의 음악부분 심사위원들이 여기서 항복(?)하지 않았을까.
특히 멜로디의 격조와 애절함 그리고 친숙함이 돋보이는 'Not my father's son'은 팝 싱글 차트 아니면 백캐덜로그에 충분히 명함을 내밀 곡으로 생각된다. <킹키 부츠>가 레전드가 된다면 이 곡도 'Send in the clowns', 'Memory', 'All I ask of you'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질주하는 댄스리듬이 전체적 중심을 잡지만 이러한 발라드의 배치로 인해 '강약', '완급', '장단', '위아래'가 심해 가창력과 연기력을 겸해야 할 배우들의 노고가 심한 작품이다. 김호영 이석훈 박강현(찰리) 정성화 최재림(찰리) 김지우(로렌) 고창석 심재현(돈) 등 캐스트는 일대 분발 중이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번쩍이는 빨강(부츠) 컬러부터 시선을 사로잡지만 눈만을 사로잡는 게 아니라 댄스의 향연이자 발라드의 매혹을 전하는 음악은 귀를 포박한다. 시청각이 행복하다. 30년 전 팝의 아이콘에서 장르이동을 통해 이제는 뮤지컬 영토에 깃대를 꽂은 신디 로퍼 덕분이다. 그의 '뮤직 쇼'가 힙하고 핫한 뮤지컬을 주조해냈다. 롤라가 'Hold me in your heart'을 부를 때 왠지 모르게 저 옛날 노래가 생각났다. '밤, 밤, 밤 밤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 똑, 똑, 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빨간 구두는 언제나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