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아티스트 척 베리는 단지 주름 많고 그리 볼품없는 아프로 아메리칸 뮤지션일지 모른다. “그와 그의 음악은 분리할 수 없다. 둘 다 전적으로 새로웠고 참으로 '미국적'이었다. 그렇게 척 베리는 우리나라와 대중음악의 역사를 바꿔놓았다.”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진심 어린 헌사가 말해주듯 서구는 음악가든 일반 음악인구든 가릴 것 없이 모두 가벼이 여기기는커녕 총력으로 그를 숭배한다. 그 자체로 록 음악의 역사이자 선구자였던 척 베리가 2017년 3월 18일, 90세의 나이로 영원히 눈을 감았다.
척 베리는 음악으로 흑백의 화합을 실천했다.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그가 영원히 기억될 가장 중요하고도 위대한 업적이다.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따로 놀던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흑인음악을 부르고 연주하는 백인은 있었지만 백인음악을 하는 흑인 뮤지션은 거의 없었다. 척 베리는 이 보이지 않는 금기를 깬 최초의 로큰롤 싱어송라이터다. 컨트리의 고전 'Ida red'를 기초로 해서 척 베리가 직접 만든 'Ida May'가 그 용기와 배짱의 실체다. 체스 레코드의 사장 레너드 체스가 'Ida May'를 듣고 20대 후반의 흑인이 어떻게 이런 컨트리풍의 노래를 만들고 불렀는지 놀랐다고 할 정도로 'Ida May'는 당시에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Ida May'는 척 베리의 데뷔 싱글이자 첫 히트곡이 되는 'Maybellene'의 원형이다. 이후 발표한 'Johnny B goode'과 'Roll over Beethoven'의 기타 리프는 록의 형태를 확립한 연주로 격상되었고, 척 베리의 오리걸음이나 다리 하나를 들고 기타를 연주하는 쇼맨십은 리틀 리차드, 제리 리 루이스,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다른 가수들에게도 암암리에 영감을 주었다. 10대의 감성을 담은 세심하고 예리한 가사와, 독창적인 음악 그리고 독보적인 제스처는 '로큰롤다운 것'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흑인처럼 노래를 부른 엘비스 프레슬리도, 자신의 노래를 만들고 불렀던 버디 홀리도, 컨트리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흑과 백의 조화를 이룬 레이 찰스도, 'Rock and roll music'을 커버한 영원한 1인자 비틀즈도 척 베리에겐 채무자가 아닐 수 없었다. 흑인의 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가 잉태한 로큰롤은 척 베리를 통해 거대한 '협치'의 장을 열었고 흑과 백의 진정한 문화적 대연정을 완수했다.
하지만 1959년에 14살짜리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사건이 불거지면서 1962년 2월부터 1963년 10월까지 18개월 동안 수감되는 바람에 음악적 영감은 타격을 입었고 자신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영국 뮤지션들의 대공세와 미성년자 성추행범이라는 주홍글씨는 척 베리의 음악 활동을 제약했다. 10여 년이 흐른 1972년에 알앤비 가수 데이브 바솔로뮤의 원곡 'My ding-a-ling'을 부른 라이브 버전이 싱글로 나와 빌보드 정상을 차지하면서 비로소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전설에 대한 예우가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로 척 베리의 인기 퍼레이드는 종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아티스트도 척 베리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뮤지션은 없다. 존 레논은 “만약 로큰롤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척 베리'일 것이다”라고 했고, 밥 딜런은 “척 베리는 로큰롤 음악계의 셰익스피어다”라고 칭송했으며 기타리스트 테드 뉴전트는 "척 베리를 모르면 기타를 연주할 수 없다"라고까지 언급했다. 위대한 로큰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직후 빌보드지는 '척 베리는 로큰롤을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로큰롤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태도'로 형체를 바꿔놓았다'라며 그의 업적을 명료하고 단호하게 정의했다. 2017년 3월 18일, 우리는 록의 대부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