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 일대
언제부턴가 여름은 음악팬들에게 기다려지는 계절이 되었다.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과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에선 매년 록 팬들의 잔치가 열리며, 올해로 벌써 10주년을 맞이한 '서울 재즈 페스티벌'도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울트라 뮤직 페스티벌(UMF)'의 흥행과 올해 처음 주최되는 '스펙트럼 댄스 뮤직 페스티벌'과 '아카디아 코리아 2016'의 등장은 근래 부쩍 솟은 일렉트로니카의 인기를 간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지표. 그러나 희한하게도 R&B와 소울 그리고 힙합, 총칭 블랙 뮤직을 사랑하는 팬들을 위한 페스티벌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서울의 소울을 깨워라!'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올해 깜짝 등장한 서울 소울 페스티벌의 라인업은 소외받던 블랙 뮤직의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헤드라이너인 네오 소울의 황제 맥스웰과 필라델피아 소울의 대표 그룹인 스타일리스틱스를 포함하여 에릭 베넷, 라울 미동, 뮤지크 소울차일드, 비제이 더 시카고 키드, 타이 달라 싸인과 갤런트 등의 해외 뮤지션과 딘, 크러쉬, 서사무엘, 어반 자카파, 딥플로우와 넉살 등 국내 뮤지션까지.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서울의 소울을 깨우기 위해 한 곳에 모였다.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스 캐리어의 묘가 있는 방향으로 절이라도 하고 싶은 더위였다. 썬캡과 양산, 미니 선풍기 등 더위와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저마다가 준비한 아이템들은 전부 무용지물. 보통 후기라면 '공연에 대한 기대감에 관객들은 전부 상기되어 있었다.'라 적어야 옳겠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관객들의 얼굴은 작열하는 태양에 빨갛게 그을려있었다. 더위가 정점을 찍은 정오가 되자 국내 레게 음악의 두 베테랑인 스컬, 김반장과 윈디시티의 무대가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역시 더위엔 레게가 적격. 정말 미동도 하고 싶지 않은 더위에 관객들이 흥겨운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기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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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을 파고든 매서운 열기가 조금씩 식어갈 즈음 소울 싱어송라이터 라울 미동(Raul Midon)이 메인 스테이지 위로 등장했다. 그의 무대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Sunshine'을 시작으로 'State of mind'와 내년 발매 예정인 신곡 'Pedal to the metal'까지,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아무 도움도 없이 직접 기타와 봉고를 연주하는 동시에 노래까지 소화하는 모습에 관객들의 환호성이 끊이질 않았다. 넓은 메인 스테이지가 전혀 비어 보이지 않았던 멋진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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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스테이지 저편에선 더위와 힘을 겨루며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들로 가득했다. 바로 올해 < Ology >로 인상적인 데뷔를 치른 신예, 갤런트(Gallant)의 순서. 신인답지 않은 출중한 라이브 실력으로도 유명한 갤런트는 명성에 걸맞은 안정적인 퍼포먼스로 관객들의 시선을 훔쳤다. 50분 동안 'Bourbon'과 'Talking to myself', 'Weight in gold' 등 < Ology >에 수록된 주요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특히 특유의 시원한 팔세토 창법이 정점에 오르는 'Jupiter'와 관객과 함께한 'Weight in gold'은 공연의 하이라이트. 그러나 보컬 음향이 묻힐 정도로 강한 베이스 음향은 공연의 유일한 아쉬운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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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무대에 오른 메이어 호손(Mayer Hawthorne)은 이 날 가장 알찬 공연 구성을 선보였다. 비교적 낮은 인지도에 그리 많지 않은 관객들과 함께했지만, 성의 있는 퍼포먼스와 펑크와 소울, 록을 아우르는 선곡으로 관객석을 춤판으로 만들었다. 메이어 호손의 재기 발랄함이 그루브 스테이지에 춤판을 벌였다면, 반대편 소울 스테이지에 등장한 더 스타일리스틱스(The Stylistics)는 관록의 무대로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비록 중심 멤버인 러셀 톰킨스 주니어(Russell Thompkins Jr.)는 없었지만,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오른 'You make me feel brand new'와 토큰스의 곡을 리메이크한 'The lion sleeps tonight'와 등, 우리에게 친숙한 선곡들과 50년이 넘는 활동기간에 걸맞은 무대매너로 감동의 순간들을 연출, 헤드라이너다운 무대를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사실 축제가 시작되기도 전 문제가 많았던 둘째 날이었다. 둘째 날 라인업에 포함되며 수많은 힙합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래퍼 타이가(Tyga)가 공연 비자 발급 문제로 타임 테이블에서 제외되고, LA 출신의 래퍼 타이 달라 싸인(Ty Dolla Sign)는 개인 사정으로 인해 공연 시간을 앞당겨 다수의 원성을 샀다.
선선해진 날씨와 적당한 양의 햇빛은 전날보다 더욱 쾌적한 공연 관람 환경을 조성했다. 메인 스테이지에선 하이라이트 레코즈의 수장 팔로알토가, 바이브 스테이지에선 올 초 싱글 'Do'로 주목을 받은 신예 민제가 입장하는 관객들을 환영했고, 이어 EP < FLIP >을 발매한 래퍼 식케이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그대에게'와 '이럴거면 헤어지지 말았어야지'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박원, 15년차 연습생에서 실력파 싱어송라이터로 우뚝 선 지소울이 축제의 뜨거운 열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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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타이 달라 싸인의 무대는 그의 즉흥적인 공연 시간 변경에 실망한 팬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작년 첫 정규앨범 < Free TC >를 발표하며 성공의 궤도에 오른 그는 상의 탈의는 물론이고 무대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Westside', 'Long time', 'Only right'과 피처링으로 참여한 피프스 하모니(Fifth Harmony)의 'Work from home' 등 신나는 레퍼토리로 70분간의 긴 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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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내 알앤비의 흐름을 책임지고 있는 딘, 크러쉬과 서사무엘은 각각 헤드라이너 못지않은 인파를 형성했다. '가끔', '잊어버리지마' 등 다수의 히트곡을 부른 크러쉬와 'D (half moon)', '풀어(Pour up)'과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You know i'm no good'을 선곡한 딘은 부드러운 보이스와 감미로운 애드리브를 수놓으며 최근 급격히 상승한 인기의 이유를 입증했다. 한편, 앞의 두 아티스트의 무대에 비해 비교적 작은 바이브 스테이지의 서사무엘은 발군의 공연을 펼쳤다. 펑키한 리듬의 'B L U E'와 힙합과 접목한 'DO:OM', 'Samuel, last name Seo' 등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음반들과 탄탄한 라이브 실력으로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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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질 무렵 등장한 뮤지크 소울차일드(Musiq Soulchild)의 무대 또한 인상적. 2000년, '네오소울의 계보를 잇는 신성'이란 타이틀과 함께 데뷔한 뮤지크 소울차일드는 특유의 밝은 음색과 긍정적인 에너지로 관객석을 들썩이게 했다. 코러스 세션들과 함께 'IfUleave', 'Just friends', 'love' 등의 대표곡들을 선보인 공연에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무대의 좌우 측에 위치한 스크린의 상당 시간을 뮤직비디오에 할애해 뮤지션의 모습을 클로즈업해 출력해주었던 다른 공연들에 비해 현장감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뮤지크 소울차일드의 공연이 끝나자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졌다. 몸을 피하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곧 이어지는 맥스웰의 공연를 기다리기 위해 비를 맞으며 무대 앞을 떠나지 않았다. 맥스웰이 태극기를 펄럭이며 무대에 오르자 관객석에선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4년 전 무산되었던 내한 공연에 대한 아쉬움과 데뷔 20년 만에 아시아에서 열리는 최초의 공연이란 기대감 때문일까, 그 소리는 엄청났다.
공연은 'The Urban Theme'을 시작으로 'Sumthin' sumthin'', 'Ascension (Don't ever wonder)' 등 초기작들과 비교적 최근작인 'Bad habits'과 'Lake by the ocean'까지, 디스코그래피 전반을 아우르는 선곡들로 구성되었다. 그는 곡을 부르는 중간중간에 '서울'과 '코리아'를 반복적으로 외치며 내한의 기쁨을 표현했는데, 특히 그가 '내 인생의 모든 것'이라며 존경을 표한 적 있는 프린스의 'Adore'을 부르고 양측의 스크린엔 프린스부터 무하마드 알리, 노토리어스 비아이지 등 세상을 떠난 흑인들과 고 신해철까지 교차해 비추던 순간은 관객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선사했다.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이틀간의 소울 축제는 끝이 났다. 불참한 타이가와 갑작스럽게 공연 시간을 조정한 타이 달라 싸인 아티스트에 관련된 트러블과 공연장 간의 짧은 거리 때문에 발생한 음향 문제들, 부족한 화장실의 수와 열약한 휴식 공간 등 기존의 시설을 이용함으로써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페스티벌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우리나라 공연시장에서 외면받았던 소울과 알앤비, 즉 흑인음악 장르들을 도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는 것으로도 가치가 있다. 뜨거웠던 서울의 여름날, 문득 찾아와 우리의 소울을 깨워준 서울 소울 페스티벌을 내년에도 만나 볼 수 있길 소원한다.
사진제공 및 취재협조 : 에스투이엔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