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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보다 쌀쌀했던 저녁, 서교동 예스24 무브홀 앞엔 3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그라임스를 보기 위한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다. 독특한 아티스트의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인 만큼, 강한 색으로 물들인 머리, 형형색색 옷 등 시대를 뛰어넘은 개성 넘치는 패션들이 즐비했다. 특히 외국인 관객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 마치 지구촌의 축소판을 보는 듯 했다. 700석의 관객석을 가득 채운 관중들의 상기된 얼굴들에서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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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 입장한 관중들은 그라임스의 절친이자 스페셜 게스트인 하나(HANA)의 몽환적인 음색에 기대어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하나의 공연이 끝난 뒤 20여분의 대기시간이 지나고, 해맑은 미소를 띤 그라임스가 등장했다. 길었던 대기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환호성은 실로 대단했다. 'I Love You, Grimes!' 관중에서 터져 나온 사랑고백에 그는 수줍은 듯 손짓으로 대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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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뮤직비디오로도 인기를 얻은 'Flesh without blood'와 무대에 주저앉아 괴성을 지른 'Scream', 전주만으로도 관중들을 열광케 한 'Oblivion'와 'Genesis', 공연은 신보 < Art Angels >와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음반 < Visions > 위주로 꾸며졌다. 그 중 관중과 함께 호흡했던 'Realiti'는 공연 중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 말괄량이 소녀처럼 수줍게 곡을 소개하고, 음악이 나오자 바로 광기로 돌변하는 퍼포먼스는 음악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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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몇몇 아쉬움이 남은 공연이었다. 'Butterfly'를 부르는 도중 가사를 까먹어 당황하는 모습은 사랑스러움으로 눈감아주기엔 너무나 아쉬운, 프로답지 못한 모습이었고, 관객들의 수군거림이 들릴 만큼 텐션을 처지게 한 'Ave Maria'는 의외의 선곡이었다. 열약했던 음향장치는 그라임스 음악 특성상 강한 베이스와 드럼 사운드를 온전히 담아내기엔 부족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곡인 'Kill V Maim'이 끝나고 그는 무대에서 사라졌다. 앙코르를 외치는 관객들이 함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무대로 등장하지 않았다. 13곡, 한 시간이 안 되는 짧은 공연이 남긴 여운에 몇몇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무대 앞을 지켰다. 무대에 올라가 바닥에 붙여있던 셋리스트를 뜯어갈 만큼 여운을 표현한 열성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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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sions >와 < Art Angels >에 쏟아진 찬사에 힘입어 부상한 그라임스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열약한 환경에도 두 명의 댄서와 하나 그리고 그로 구성된 단출한 무대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엄청났다. 공연장을 나서자마자 마주한 날카로운 바람이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그라임스의 무대는 후끈했다.
사진제공 및 취재협조 : 페이크 버진(FAKE VIR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