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그래프 같았다. 헤이터들 사이에서 살아남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에픽하이. 그동안의 삶을 공연에 담다보니 음악보다 사람을 만나고 온 기분이다.
11월 16일 오후 6시,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서울 단독 콘서트 'PARADE 2014'가 마무리되었다. 오는 22일 중국 상하이를 시작으로 전국과 아시아 투어를 진행하는 에픽하이는 각 지역별로 노래 구성과 콘셉트가 다르다고 했으나 이번에는 자세한 구성 및 곡의 순서가 포함되어 있다. 약 세 시간동안 진행된 러닝타임을 세 테마로 나누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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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발자국과 발자취를 여기 신발장에 넣고.
그리스 신전처럼 꾸며진 세트와 흘러나오는 클래식, 스크린 뒤로 비치는 에픽하이 마네킹까지, 웅장한 세트가 두근거림을 불러왔다. 배우 장현성의 내레이션이 끝나자 조명이 암전되고, 멤버 세 명이 만난 과거부터 현재를 담아낸 오프닝이 흘러나왔다. 짧은 영상 속 많은 사건들이 말해주듯, 이들의 지난날은 다사다난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여러 번 지나와서 일까. 콘서트를 통해 자축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현악기 선율이 시작을 알렸다. 넓은 공간 가득 울려 퍼지는 타블로의 또박또박한 랩은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강했다. 10대 후반에서 3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도 환호로 에너지를 보냈다. 관객과 가수가 서로를 처음 마주할 때의 설렘, '막을 올리며'는 그 순간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곡이었다.
곧 축제에 어울리는 인사가 이어졌다. 투컷과 미쓰라진은 21th Century Fox의 화려한 오프닝 음악에 맞춰 자신을 소개한 반면 타블로는 '사랑과 전쟁' 테마곡에 맞춰 등장했다. 아빠가 되고 나이가 들었어도 세 멤버가 뭉쳤을 때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했다. 이 순간에도 팬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에픽하이의 노력은 돋보였다.
타블로의 딸 하루의 깜짝 방문은 시작 전부터 화제였다. 타블로는 하루가 방문한 것을 인지하여 'BORN HATER' 비속어 'Fuckin'을 'Father'로 재치 있게 바꿔 불렀고, 리틀 타블로는 전광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어리둥절하며 두 팔을 들어 올려 관객들을 엄마 미소 짓게 만들었다.
데뷔 전부터 이들과 음악을 해왔던 얀키, 독립 레이블 맵 더 소울 설립 당시 활동했던 MYK가 게스트로 함께 해 초기 에픽하이의 향수가 느껴졌다. 그간의 행보가 하나의 맥락처럼 느껴진 초반부는 만남의 흔적을 간직한 < 신발장 >의 성격과 가장 잘 연결된 무대였다. 뮤직비디오에서 간간히 보였던 투컷의 끼는 콘서트에서 폭발했다. 지드래곤이 등장할 거라 반신반의하면서 한껏 들뜬 관객 앞에 나타난 컷드래곤, 자신 있는 그만의 몸짓으로 'One of a kind'를 끝까지 소화했다. 이 날 투컷은 디제잉은 물론 무대의 가장 높은 곳에서 춤을 추고, 성실한 연출로 무대와 관객석의 거리를 좁혀주었던 일등공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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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차가운 세상에 대한 미움과 원망
한바탕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고 나서 에픽하이는 이때부터 자신들이 그동안 겪어온 진통 탓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화자가 된다. '헤픈 엔딩'부터 '우산'까지 모두 4곡에서 호흡을 맞춘 윤하는 이별 후의 나약한 정서를 표현하며 신파적 분위기에 힘을 더했다. 윤하만 등장한 '우산'에서는 스크린을 통해 비가 오는 효과를 주었고 타블로와 미쓰라가 영상 안에서 랩을 했다. 무대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과 공허함 사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을 들인 부분이다. 얇은 커튼과 거울 속 발레리나로 꾸며진 '집' 역시 고독의 몸부림을 극대화하기 위한 적절한 장치였다.
네 번 연달아 게스트로 참여한 윤하의 굴욕 사진 역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과거를 덮기 위해 준비했다는 포토타임은 도리어 촬영이 금지되어 생생함을 남길 수 없는 관객의 아쉬움을 해결해주었다. 이들의 과거 사진은 '윤하 에픽하이 굴욕'을 검색하면 친절하게 편집되어 올라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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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불행에 리듬과 템포를 얹고, 행복으로 바꾼다.
후반부의 흥을 견인한 것은 타이트한 일렉트로닉. 몇 장의 앨범들을 거치며 체득한 일렉트로니타 스타일을 흥겹게 활용했다. 히트곡 행진을 즐기며 이들의 음악에 신나는 노래들이 더 많았음을 다시 느꼈다. 특히 'Kill this love, High technology, New beautiful'은 음원에서 흥미를 갖지 못했지만 콘서트를 통해 재발견한 곡들이다. 후렴의 어절이 리듬 틈새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덕에, 따라 부르면서 점프하는 스탠딩 석이 고마웠다.
엔딩 곡은 '당신의 조각들'이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모든 것이 달아날까봐 밀려오는 두려움 때문일까. 타블로는 의지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내뱉었다. 쏘아내리는 레이저가 관객 하나하나를 비추었고 관객들은 손을 뻗어 공간을 끌어안았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커튼콜을 받았다. 공연에 대한 고마움도 섞였겠지만 상처를 이겨낸 멤버들에 대한 응원과 위로의 외침이었다. 오랜 시간 앵콜을 외쳐 지칠 법 했어도 1층과 2층 관객이 번갈아가며 목소리에 힘을 더했다. 호응에 응하듯 이후의 곡 모두 퍼레이드를 있게 해준 팬들에게 바치는 선물이었다. 일부 관객이 나간 뒤에도 리앵콜로 '비켜', '평화의 날'까지 함께 했다. 타블로는 스탠딩 뒤쪽까지 내려와 관객과 뒤섞여 호흡했고, 게스트들 모두 나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겼다. 가수도 관객도 끝난 줄 모르고 공연장에 머무르며 하나의 쇼가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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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에픽하이의 모든 곡이 차트 줄 세우기를 했지만 결핍과 폐쇄적인 순간들을 잡아낼 때 가장 사랑받고, 그들다운 모습이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확실한 팬들이 보이는 감정 이입의 근원도 타블로로 대표되는 예민하고 사색적인 일기장 식의 내러티브에 있다. 이것이 음악 스타일을 응고했고, 신보 < 신발장 >은 고민의 해답이 어디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공연에서 이들은 열정과 열병, 그 어느 한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초기 시절의 천진난만함을 보이다가도 수많은 관객이 위로해줄 수 없을 만큼 쓸쓸해지기도 했다. '헤픈 엔딩'과 'BORN HATER'에는 에픽하이의 그런 양면적 삶이 투영되어 있다. 이것이 서로 다른 질감의 둘을 나란히 1,2위에 오르게 만든 핵심이다. 11주년을 집대성한 추억 퍼레이드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에픽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