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음반심의위원회에서 싸이의 '행오버(Hangover)'를 심의한다면 어떨까. 지금은 여론 때문에 많이 달라졌지만 2011년만 해도 음반심의위원회는 음주를 표현한 가사만 들어가도 모두 청소년 유해물 판정을 내리곤 했다. 싸이의 '행오버'는 아예 대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탕 마시는 노래다.
노래가 얼마나 새롭고 흥미로운 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댄스가 아닌 힙합이 주는 낯설음이 있는 반면, 반복되는 '행오버'라는 가사가 마치 제목 그대로 숙취처럼 머리를 둥둥 치는 듯한 중독성은 분명히 있다. 게다가 태평소 소리가 이토록 음주가무에 적합한 소리인지도 싸이를 통해 제대로 알게 된 느낌이다.
힙합장르가 가진 주저리주저리 가사를 늘어놓는 스타일 때문인지 “오빤 강남스타일!”이나 “마더 파더 젠틀맨!”처럼 고조되는 음 끝에 무언가 빵 터트려주는 속 시원함은 아무래도 덜하다. 하지만 “받으시오-”라고 흐늘흐늘 풀어지는 듯 유혹하는 싸이의 목소리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아마도 누구나 술자리에서 한 번은 느껴봤을 감정이 거기에는 걸쳐져 있다. 사는 게 복잡해? 다 잊어버리고 한 잔 쭉-
음악의 본령은 귀로 듣는 노래라고들 얘기하지만 싸이의 음악은 눈으로 보는 뮤직비디오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싸이는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구촌 시대의 새로운 음악듣기 방식을 표징하는 유튜브 스타다. 유튜브에서 이제 빼놓을 수 없는 건 보는 즐거움이다. 싸이는 물론 자신만의 '한 번 놀아보자'는 그 흥을 바탕으로 한 똘끼의 음악스타일을 갖고 있지만 '강남스타일'을 통해 자신만의 뮤직비디오 스타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의 뮤직비디오에는 한국이 배경이고, 한국문화가 화두다. 그리고 그 문화의 이면을 헤집고 조롱하며 그 본능적인 부분을 끄집어내 한바탕 마당놀이의 놀이판으로 끌어내는 작업을 보여준다. '강남스타일'은 춤으로 이걸 끄집어냈다. 싸이는 말춤을 추고, 유재석은 메뚜기춤을 그리고 노홍철은 하체를 튕기는 저질댄스를 보여준다. '강남스타일'에서 짧게 등장했지만 유독 노홍철의 저질댄스가 주목을 끌었던 것은 그것이 보여준 노골적인 모습이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배반하는 쾌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강남스타일'의 국제적인 인기 때문에 그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낸 '젠틀맨'은 그 이미지의 배반을 더욱 전면에 끌어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나라에서 노인들을 하인처럼 데리고 다니고, 의자를 갑자기 빼서 앉으려는 여자를 넘어뜨리고, 도서관에서 하품하는 여자에게 방귀를 먹이는 행동은 예의 뒤편에 놓여진 또 다른 본능적 욕망을 끄집어냈다. '젠틀맨'의 후반부에 가인과 함께 포장마차에서 가래떡을 씹고 오뎅 바를 먹으며 끈적한 춤을 추는 장면은 어쩌면 차기작인 '행오버'로 이어지는 단초일 수 있다.
예의를 그렇게 중시한다는 나라에서 이처럼 놀라운(?) 술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술을 마셔도 '폭탄'을 제조해 마시고, 각자 알아서 마시는 게 아니라 '모두가 원샷'을 해야 직성이 풀리며, 2차에 3차로 이어지는 '달리고 달리고 달리는' 우리네 술 문화는 조직문화의 예의 뒤편에서 한없이 억압되고 있는 응어리를 감지하게 만든다. 무엇이 이런 폭발력을 만드는 것일까. 누르고 누르고 또 누르는 그 무엇이.
'행오버'의 뮤직비디오는 자고 일어난 싸이가 변기에 얼굴을 박고 토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섭취했던 것들을 토사물로 확인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우리네 삶의 실체를 마주하는 장면일 수 있다. 속 시원함과 숙취가 뒤섞인 그 경험은 그저 넣는 대로 앞으로 꾸역꾸역 넘어가지 않고 역류하는 정신의 반항처럼 보일 때가 있다. 싸이는 토하면서 변기를 두드리며 리듬을 맞추고 스눕독은 싸이가 변기를 두드리듯 싸이의 등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다.
숙취를 벗어나기 위해 분노의 칫솔질을 하고, 섹소폰을 부는 장면은 그대로 병나발을 부는 장면과 겹쳐진다. 폭탄주 제조 장면은 장관이지만 여러모로 서구인들을 배려한 듯하다. 맥주잔 위에 놓여진 건 소주잔이 아니라 위스키 잔인데 그 안에 들어있는 건 하얀 색인 걸로 보아 소주처럼 보인다. 즉 폭탄주 문화를 제대로 보여주면서도 소주잔보다는 위스키 잔을 사용해 서구에서도 시도할 수 있는 유행의 단초를 심어놓은 셈이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숙취해소음료를 마시고 삼각김밥을 먹으며 또 목욕탕 사우나에서 땀을 빼는 풍경. 서구에서는 신기할 풍경이지만 우리로서는 술 마신 다음날 익숙한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안 예쁘면 예쁠 때까지 빠라삐리뽀”라는 가사나 “받으시오” 같은 우리말 가사가 살짝살짝 들어간 것은 '강남스타일'이나 '젠틀맨'의 우리말 가사 전부에 살짝 들어가는 영어가사와는 정반대 선택이다. 국내 시장보다는 해외 시장을 노린 흔적이 역력해 보이지만 그 짧은 가사가 주는 임팩트는 결코 작지 않다. 흥미로운 건 이 모든 우리에게 익숙한 음주문화의 장면 장면들이 '행오버'라는 뮤직비디오를 통해 보여질 때 우리는 살짝 낯설음을 느끼기도 한다는 점이다. 저게 우리의 모습이었던가.
술 마신 뒤 노래방에서 노래하며 블루스 타임을 갖는 장면이나 놀이공원에서 뱅뱅 돌아가는 놀이기구에 탄 싸이와 스눕독의 모습은 술 취한 상태를 극대화해 보여준다. 또 마치 무술 같은 술내기 당구와 <사망유희>를 패러디한 듯한 술 마시기 대결 역시 우리네 술집에서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낮술에는 애비 에미도 없다는 말을 확인시키는 듯한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엔딩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많은 장면들을 우리가 술을 마시면 연출하고 있다는 건 마치 먼 나라 이야기처럼 낯설다. 술 깨고 나면 술 마신 기억이 아른아른해지는 것처럼.
싸이의 B급 정서 때문일 것이다. 싸이는 늘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네 문화가 가진 막연한 이미지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 이면에 숨겨진 본능적이고 솔직한 것들을 끄집어낸다. 그것이 '강남스타일'의 하체를 들썩이는 춤일 수 있고, '젠틀맨'의 시건방춤과 예의 실종의 장면들일 수 있으며, '행오버'의 음주문화일 수 있다. 그것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마치 뻘밭에 들어갔을 때 그 뻘이 묻는 걸 피할 때는 한없이 불편하다가, 막상 여기저기 뻘이 묻어 포기하고 나서는 무한한 자유를 느끼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싸이가 제공하는 디오니소스적인 난장에 빠져든다.
이것은 싸이의 음악에 대해 대중들이 느끼는 이중성일 것이다. 그의 음악은 일단 우리의 숨겨진 실체를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 난장을 한없이 꺼내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흥분시킨다. 이것은 디오니소스를 대하는 이중성이기도 하다. 아롤론적인 사고관을 가진 자라면 디오니소스가 주는 난장을 견딜 수 없는 혼돈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정돈되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무한한 다양성은 그 넘쳐나는 풍요로움으로 즐길 것이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때 '술 한 잔'이라는 가사 하나만으로도 청소년 유해 판정을 내는 이 엄격한 나라에서 곡 하나 전체가 온전히 술 마시는 가사로 채워진 이 '행오버'라는 곡은 그래서 싸이 다운 도발이라 여겨진다. 어쩌면 해외에서는 우리네 음주문화가 가진 이 흥을 아련한 오리엔탈리즘이 주는 판타지로 바라볼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