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음악은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지금 음악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실, 막막한 현실, 답답한 현실 앞에서 음악은 무엇이어야 할까.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적이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지난 대선 때 공정해야 할 국가기관이 나서서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개입했다는 의혹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잊혀져 가고 있다. 변변한 증거도 없는 탈북자에게 간첩이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국가기관이 증거를 조작한 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장관에게 제대로 보고조차 되지 않은 무인기 사건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그 사이 공천제 폐지 약속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이렇게 정치와 행정이 무너지는 사이 날마다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마지막 월세를 남기고 세상을 버린 세 모녀 사건이 우리에게 충격을 준 이후에도 빈곤층의 자살은 끊임이 없다. 못 살겠는 것은 빈곤층만이 아니다. '지난해 1분기 8.3%이던 청년 실업률은 올해 1분기 9.7%로 치솟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재벌 임원들의 연봉은 수십, 수백억원대에 이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한 나라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 정도라면 민주공화국으로서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행복도도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이런 현실을 직시한 노래는 그리 많지 않다. 민중가요처럼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는 노래가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떻게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신문에 사설을 쓰고 칼럼을 쓰는 것처럼 노래를 만들 수 있겠는가. 노래는 사실 현실보다 사건보다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음악인들이 사회문제에 눈 감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의제에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음악인들이 함께 하고 있다. 대중적 반향은 적지만 민중가요 진영의 음악인들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인디 뮤지션들의 참여도 늘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현실을 좀 더 근본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기록하고 증언하고 성찰하는 노래는 그다지 많지 않다. 단지 현실의 문제를 노래로 담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노래는 그렇게 만들어질 수도 없고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는 노래가 아니라 구호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1990년대의 민중가요들 중에는 그렇게 기계적이고 감동 없는, 구호 같은 노래가 적지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에만 지나치게 집착한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문제를 노래로 담는 것만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 다시 보게 하고 더 깊게 보게 하고 자신의 삶으로 보게 하는 것일 것이다. 단지 앞서 언급한 사회적 부조리와 구조적 문제를 노래로 만드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사건들로만 절망적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부조리한 사건들은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우리 모두를 정상적이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서로를 믿고 선의로 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착하게 살면 그만한 보상을 받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별로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래봐야 안된다고, 나와 내 가족을 이기적으로 챙겨야 한다고, 더 이상 다른 이들과 정치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관심을 끊고 있다. 그러면서 착하게 살려는 사람, 무언가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을 외면하다 못해 비웃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이 절망적인 이유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지금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감정은 모멸감이다. 모든 강자들은 약자들을 무시하고 짓밟고 있으며 그리하여 모든 약자들은 날마다 모멸감을 곱씹으며 버티고 버텨야만 한다. 그리고 이제는 약자들마저 서로를 모멸하며 견디고 있다. 브로의 <그런 남자>가 나오고, 인기를 끄는 현상이 바로 그 증거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는 노래는 바로 브로의 노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로 이런 현실과 사람들의 안팎을 각자의 시선과 음악으로 담아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랑과 이별의 낭만도 좋고, 행복한 하루의 기쁨도 좋지만 사실 음악인의 일상부터가 불안하고 불확실하지 않는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지 않는가. 그런데도 많은 음악인들은 바로 그렇게 눈에 뻔히 보이는 현실 대신 근사하다고 생각되는 낭만만을 천편일률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원래 대중예술이라는 것이 그렇게 환상을 통해 대리만족을 주는 역할을 해왔지만 현실을 똑바로 보고 현실을 넘어설 가능성과 전망을 만들어내는 것도 예술의 역할이다. 단지 정권을 비판하고 자본을 비판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리얼리즘이든 아방가르드든 어떤 방법론이든 좋다. 현실에 대한 즉각적인 반영과 기계적인 비판에 그치지 않고 이 시대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자화상을 음악으로 풍부하게 담아내고 그들의 기저에 있는 욕망과 좌절과 상처를 기록하고 위로하고 성찰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함께 찾고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적 사건들을 담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인간형을 총체적으로 날카롭게 재현하면서 우리가 날마다 느끼는 모멸감과 패배감과 절망을 정직하게 직시해야 하지 않겠는가. 단지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그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오늘을 넘어설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사로 담는데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음악 언어로 표현해냄으로써 음악다운 음악으로 현재의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야 하지 않겠는가.
작가정신이라는 말로 이 모든 책임을 예술가 개인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다.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자립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작가정신까지 발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독하게 이상적인 이야기를 강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스스로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씨앗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현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 누군가는 <광장>이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태백산맥>, <그날이 오면> 같은 작품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참담한 현실은 사실 우리가 만든 것이다. 이 냉정한 진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현실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생산자이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현실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우리들 모두에게 되돌아온다. 지금 음악은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음악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음악은 무엇이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