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니, 어째서 우리의 감동은 다른가.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 역시 내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감동은 나의 고유한 영역이며 당신의 감동은 당신의 고유한 영역이다. 당신이 꾼 꿈에 대해 아무리 설명한다 한들 내가 그 꿈의 배후를 짐작할 수 없듯 내 마음이 툭 건드려진 순간의 이유를 나 역시 설명하기 어렵다. 들어보라고, 좋지 않냐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내 마음이, 당신의 마음이 아무리 요동을 쳤다 해도 서로의 마음이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서로의 이명(耳鳴)을 설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 우리는 음악보다 멀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음악은 소리로 재현되고 귀로 체감되는 예술이다. 당연히 듣기 좋은 소리에 귀가 열릴 수밖에 없다. 다시 묻자. 어떤 소리가 듣기 좋은 소리인가? 숙련된 연주, 온전한 전달, 선명한 멜로디, 인상적인 사운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공감할 수 있는 노랫말도 중요하다. 이런 것들을 통해 감정이 건드려질 때 우리는 좋다고 느낀다. 이 모든 판단은 직관적이고 주관적이다. 소리는 금세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흘러가는 소리를 통해 한 곡의 음악이 담고 있는 정서와 주제를 집처럼 재구성 할 줄 안다. 희노애락, 그 중의 하나가 소리를 통해 발현될 때 우리는 그 집이 얼마나 튼튼한지, 그리고 얼마나 우리를 감성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지를 본능처럼 알아차린다. 음악은 대사나 씬으로 재현되는 예술이 아니라 소리로 재현되는 예술이다. 그래서 좋은 사운드가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시적인 가사, 독보적인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해도 듣는 순간 우리의 귀를 잡아 챌 수 있는 사운드를 통해 발현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음악은 문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의미는 감동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사운드가 전부는 아니다. 좋은 사운드와 좋은 음악은 다르다. 좋은 사운드는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을 잡아끌고 우리를 무장해제 시켜 설득 당하게 하지만 좋은 음악은 좋은 사운드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좋은 사운드는 얼마든지 많다. 숙련된 연주와 깨끗한 소리는 노력으로 가능하고 많은 음악들은 선명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쉽게 들리고 쉽게 파악되는 음악들은 쉽게 마음으로 침투한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들리는 음악이 좋은 음악은 아니다. 쉽게 들리는 음악이 모두 좋은 음악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좋은 음악은 쉽게 들리건 쉽게 들리지 않건 상관 없다. 좋은 음악은 친절함과 관계없이 소리를 통해 소리 그 이상을 보여주는 음악이다. 소리 그 이상을 보게 만드는 음악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꼭 음악이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아니다. 음악이 사회에 대해 논해야 한다거나 철학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자적으로 좋다고 느끼게 하는 음악이건, 쉽게 다가오지 않는 음악이건 관계 없다. 그 음악을 통해 음악을 듣는 자신에 대해 다시 묻게 하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는 얘기다. 음악은 하나의 사건이며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그 사건을 자신의 마음 속에서 폭발시키는 일이다. 음악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폭발을 일으킬 때 터지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과학수사대가 현장에 남은 잔해를 수거하듯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지금 우리 곁에는 그렇게 자신을 직시하고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음악들이 그리 많지 않다.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흘러나오는 다수의 음악들은 우리를 거쳐 빠져나가며 흘러가버린다. 청량음료 같은 자극, 한 번 톡 쏘고 지나가는 음악은 아무런 질문도 남기지 않는다. 그 순간 잊혀질 뿐이다. 우리는 어쩌면 기억하기 위해 듣는 것이 아니라 잊기 위해 듣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음악은 끝내 우리의 태도를 묻고 우리의 자세를 묻는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네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되묻는 음악은 흘러가며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에 우리를 주저 앉힌다. 좋다는 느낌, 혹은 싫다는 느낌. 신나거나 따뜻하거나 슬프거나 편안하거나 아프거나 생경하거나. 좋은 음악은 감정으로 사무친다. 그리고 그 사무침을 통해 자신을 대면하게 하며 자신을 거울처럼 현미경처럼 망원경처럼 멀고 가까이서 다시 보게 만든다. 우리는 자신을 자기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다 말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은 자신을 보고 싶은대로만 본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오해가 아니면 성립할 수 없는 가련한 존재들이다. 좋은 음악이 등장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익숙함 대신 새로움을, 새로움만큼의 낯섬을 손톱만큼이라도 제시하며 음악이 우리를 후려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익숙함과 즉자적인 반응에 몰두하고 있는 음악들이 난무하고, 기술적 완성도가 음악의 본질인 것처럼 본말이 전도되는 현실은 음악에 대한 사기이다. 주체와 세계에 대한 반문과 고투가 갈수록 외면 당하는 현실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이제는 피곤한 일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기획된 상품들, 기술을 벗어나지 못하는 음악은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반복하고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말하는 것이며, 새로움을 통해 직시하게 하는 것이며, 끝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가령 나윤선에게서, 윤영배에게서, 할로우 잰을 통해 비로소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이 음악들은 나에게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진다. 이런 음악들이 아니라면 오늘의 음악은 그저 상품과 유행의 척도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자본이 예술을 대체하는 시대, 삶마저 상품이 되는 시대, 안간힘 같은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묻는다. 당신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