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김현철이라는 이름은 가수로서만 각인되어 있지는 않다. 그는 능력 있는 프로듀서로, 작곡가, 또 연주인으로서 본업 이상의 명성을 획득해왔다. 그의 이런 다재다능함은 <그대 안의 블루>, <시월에>등 영화음악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나, 영화 자체보다 음악을 더 주목대상으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주류와는 거리를 둔 실력파 음악인들의 집합소 <동아기획>의 일원으로 데뷔해, 서정미에 기반한 독특한 퓨전 사운드로 골수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초창기 소박하고 세심하게 짜여진 곡들로 컬트적 지지를 확보한 그는 3집 <달의 몰락>으로 메인스트림에 착륙하며 대중적 아이콘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런 그가 조금은 흔들리기 시작하게 된 것은 개운치 않았던 표절 시비와 조금은 도식적으로 변해 버린 곡들 때문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주목받았던 탓일까? 언제나 순탄한 길만을 걸어 왔던 그였기에 최근 몇 년간의 저조함은 그를 아끼는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비상을 꿈꾼다. 스튜디오 앨범으로는 3년만에 발표되는 김현철의 통산 8집 <...그리고 김현철>은 그간의 부진을 일순간에 만회하려는 강한 의지가 투영된 작품이다. 치밀하게 준비된 신보가 들고 나온 컨셉은 바로 '듀엣'이다. 수록곡 13곡 중 타이틀 넘버 '러빙 유'를 제외한 전곡이 다른 가수들과 함께 부른 공동 작품이다(이전까지 공일오비, 토이가 추구했던 객원 싱어 시스템이 있었지만 이번 경우와 같은 본격 듀엣 앨범은 없었다). 일단 그 기획 의도의 참신함이 돋보인다. 초빙한 가수들의 스펙트럼도 다채롭기 그지없다. 모던 록 계열의 불독 맨션, 롤러코스터부터, R&B계의 박효신, 에즈 원, 브라운관 스타가 아닌 윤상과 김광진에 이르기까지 그 진폭이 넓고도 깊다. 다양한 표현의 선(線)이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김현철은 게스트들에게 무모한 변신을 요구하기보다는 그들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초점을 잡았다. 주인으로서의 특권의식을 최소화해 균형감을 50:50으로 맞추는데 성공했다. 듀엣의 묘미는 양쪽으로 잘 배분된 하모니에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롤러코스터의 보컬리스트 조원선이 함께 한 '봄이 와', 에즈 원과의 접점 'Is it love?'는 그 평형상태의 미학을 잘 입증해주는 좋은 예시이다. 지영선과의 'Going to paradise', 이선정과의 'What can't we'도 뒤지지 않는 흡입력을 발휘한다.

한곡 한곡 정성스레 세공된 이번 작품은 그에게 다시 한번 '작은 거장'의 칭호를 안겨줄 수 있을 법할 완성도를 뽐낸다. 최근에 나왔던 어느 음반보다도 멜로디가 살아 있으며 생기가 넘쳐난다. 총기 넘치는 그의 전성기를 그리워했던 팬들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열 두 빛깔의 목소리와 함께, 그리고 김현철과 같이 떠나는 열 세 가지의 매력적인 행로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