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시한 기준들 중 최우선 기준은 시대적․역사적 의의다. 그밖에는 영화가 선사하는 지적 얼얼함․자극과 정서적 울림․감흥, 감각적 떨림․재미, 그리고 영화 전반의 미학적․예술적 수준, 해당 영화만의 개성, 평론가․관객으로서 내 특유의 영화적 취향 및 지향, 감독의 어떤 가능성 등을 중시했다. 선정 사유는 이미 발표된 대다수 영화들의 경우 발표 리뷰나 칼럼,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노트, 매체 코멘트 등을 적극 활용해 비교적 상세히 밝혔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이 목록을 위해 새로 썼다.
6. 가시꽃, 이돈구 감독
돈이 없으면 영화를 만들 수 없는 것 명백하지만, 그저 돈만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소중한 교훈을 일깨워준 기적의 극 저예산 수작이다. 2012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프로그래머 노트에서 영화를 가리켜 “이창동 감독의 <시>의 주제의식과 상통하는 문제적 소품”이며 “감히 그 걸작의 '초 저예산 인디 버전'이라고 평"했던 건 그래서다. ”성장담이라는 점에선 다소 다르지만, <시>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는 죄와 양심, 책임감 등 인간 본성과 직결되는, 하지만 너무나도 빈번히 외면되곤 하는 육중한 이슈를 짚는다. 10년 전 고등학교 시절 강압적으로 가담했던 성폭행 사건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스물여덟 살 주인공의 속죄담이라는 틀을 빌려. 스물여덟이라는 같은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감독의 분신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주인공의, 나아가 영화의 진정성이 남다르게 다가서는 연유다.” 그 “비극적 결말과, 그 결말로 향하는 주인공의 파격적 선택들이 뇌리에서 좀처럼 떨쳐내길 힘들 충격·여운을 안겨준다. 영화 미학적 견지에서 이 영화의 으뜸 미덕은 신예의 그것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완숙한 연기 연출이다. 연기 전공이란 이력이 작용했을 터. 주·조연 가릴 것 없이 가히 '연기의 발견'이라 할 만하다. 그 연기자들을 포함, 전 스태프의 헌신이 있었기에 300만원이라는 극 저예산으로 이 발견의 영화가 탄생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통해 그야말로 혜성처럼 부상한 감독은 “동아방송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졸업 작품으로 연출한 <무엇이든 해결해 드립니다>(2006)로 인디붐 온라인독립영화제에서 네티즌작품상을 수상했다. 단편 영화 <개의 삶> 등을 연출했다.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호환마마>, <할아버지 필통> 등에 출연했다. 큐브엔터테인먼트 영상팀 팀장 및 PD로 활동하기도 했다. 2년여의 시나리오 및 작품 구상 등을 거쳐 첫 장편 영화 <가시꽃>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현재는 전작의 1백 배 예산인 3억 원을 투하해 김영애, 송일국, 도지연, 김소연 등과 함께 빚어낸 두 번째 장편 <버티고>의 후반 작업을 진행 중이다.
7. 무게, 전규환 감독
장편 데뷔작 <모차르트 타운>(2008)을 필두로 <애니멀 타운>(2009), <댄스타운>(2010)으로 이어지는 '타운 3부작'과 <불륜의 시대> 등을 통해 축적된 감독의 “독자적 영화세계를 입증하는 문제적 휴먼 드라마다. 부제 “정씨의 슬픈 이야기”가 영화의 성격을 단적으로 지시한다. 조재현이 분한 정씨는 꼽추다.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가 떠오르나, 외모적으로 그처럼 추하진 않다. 무표정 속에 드러나는 애조 띤 눈빛이 특히나 인상적이다. 때문에 아마추어 화가인 정씨의 슬픈 이야기가 더욱 더 궁금하다. 정씨의 사연을 축으로, 그를 에워싸고 펼쳐지는 다양한 주변 인물들의 사연들을 좆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격적이다. 포르노그래피 적 묘사를 마다하지 않는 감독 특유의 거침없는 표현이 보태져, 충격을 넘어 '극한 영화'로까지 가 닿는다. 감독의 극단성은 그러나 여느 다른 극한 영화들과는 그 차원이 판이하게 다르다. 지독히 자극적이되 선정적이지 않고, 불편하되 불쾌하지 않으며, 도발적이되 맹목적이지 않다. 내러티브가 철저하게 확고한 문맥 안에 자리해서다. 이 문맥성야말로 감독 전규환의 영화세계를 규정짓는 결정적 인자요 으뜸 덕목이다.“(2012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프로그래머 노트) 2012년 제69회 베니스영화제 베니스 데이 부문에 공식 초청돼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퀴어 라이온 상을 수상하기도.
전규환 감독은 영화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애당초 감독의 꿈을 꿨던 것도 아니다. 매니저 일을 하는데, 영화도 잘 못 만들면서 잘난척하곤 하는 감독들이 꼴 보기 싫더라고. 그래 그들에게 자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작정 연출 세계로 투신했다. 그것이 불과 5년 여 전, 그 이후 게릴라마냥 '무대뽀'로 제작비를 조달해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2013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마이 보이>와 아직 영화제에서도 선을 보이지 않은 <소리없는 남자>까지 그 새 7편을 연출했으며, 지금도 새 영화 후반 작업 중이다. 그는 이 땅의 감독들 가운데 '헤어 누드' 따윈 우습다는 듯 자유롭게 연출을 하는 극소수 예외적 감독 중 한명인바, 그 거침없음 탓에 대개의 영화들이 등급 논란을 일으켰다. 그 논란에선 김기덕 감독도 그에 견줄 바 못 된다. 다름 아닌 그 거침없는 자유로움이랴 말로 전규환 영화세계의 소중한 덕목이다.
8. 용의자, 원신연 감독
조국에 의해 버림받고 가족까지 잃은 채 남한으로 망명한 최정예 특수요원 '지동철'(공유 분).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아내와 딸을 죽인 자를 찾는 것뿐이다. 놈의 행적을 쫓으며 대리운전을 하며 살아가던 동철은 유일하게 자신과 가깝게 지내던 박회장(송재호 특별 출연)의 살해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죽기 전 박회장이 남긴 물건을 받아 든 동철은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모두에게 쫓기게 된다. 피도 눈물도 없이 타겟을 쫓는 사냥개 '민대령'(박희순)까지 투입, 빈 틈 없이 조여 오는 포위망 속에 놓이게 된 동철. 하지만 자신만의 타겟을 향한 추격을 멈추지 않는데…
자료를 빌려 소개해본 간략한 줄거리만 보면, <베를린>(류승완 감독), <은밀하게 위대하게>(장철수), <동창생>(박홍수)의 연장선상에 놓일, 또 한 편의 '2013년의 분단영화'다. 한 중앙일간지 기자(중앙일보 정현목)의 진단처럼, “올해 한국영화에는 유독 간첩이 메인 캐릭터로 자주 얼굴을 내밀었”는데, “남과 북, 양쪽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경계인으로서의 비애에 무게를 실었다. <쉬리>(1999, 강제규) 등 예전 영화와 달리 이념적 갈등이 줄어든 것도 한 특징이다. 북한의 정권교체, 정보당국 안팎의 갈등 같은 현실 정세를 반영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간첩영화가 할리우드의 '본 시리즈' 같은 액션첩보 장르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의 평처럼, “영화 속 간첩은 최고의 살인병기인 동시에, 소속과 가족을 잃은 남자로서의 비극적 신파성을 지녔다.
지동철의 성격화나 인물 해석이나 공유의 액션 연기 등에서 <용의자>는 위 세 영화는 물론 동류의 첩보 액션 드라마 중 최상의 수준을 뽐낸다. <구타유발자들>(2006), <세븐 데이즈>(2007) 등을 통해 탄탄한 연출력을 선보여 왔던 감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최강 액션을 선보이면서도 주인공 동철을 비롯한 중심 캐릭터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덧입히는데 성공한다. 인간적 향취를 겸비한 수준급 첩보 액션물, 그것이 이 영화를 다른 수많은 영화들을 제치고 10선 중 8위에 위치시킨 큰 이유다.
실은 그 정도가 아니다. 영화가 첩보 액션이란 외양에, 그 어떤 진지한 드라마 못잖은 야심을 숨기고 있다면 어떨까? 겉보기엔 철저한 오락용 액션물이지만, 그 속내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 현실 정치사회를 향해 통렬한 한방을 먹이려는 야심을 지니고 있다면? 영화의 반전성 결말이 그 증거로 손색없다. 위 중앙일보에 “국가·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개인을 주목”한 <변호인>, <집으로 가는 길> 등이 “정치·사회 이슈와 접점을 가진 오락영화들이 사회 공론장(Public Sphere)의 역할을 해왔다. 정치가 해야 할 기능을 일정 부분 영화가 담당한 셈”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는바, <용의자> 또한 그런 공론장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고 싶기 때문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9. 집으로 가는 길, 방은진 감독
여기 이즘의 내 고정 란, '영화평론가 전찬일의 문화탐방' 그 첫 번째 이야기 “아시아 영화로서 <집으로 가는 길>의 어떤 가능성”을 참고할 것. 그래도 다시 몇 마디 부연하면, 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는 “우리들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자화상”이다. 이 영화가 최루성이라고? 천만의 말씀. 감상은 물론 최루로 새길 마다하지 않는 <변호인>과 달리, 감독은 그 가슴 아픈 자화상을 지독한 절제로 형상화했다. 그 절제가 가슴 저리도록 아름답다. 다시 강조컨대 “감독은 최루성 드라마로 흐르지 않으려고 애쓰고 또 애쓴다. 그럴 법한데도 감독은 주인공들의 억울함을 그들의 입을 통해 좀처럼 토로시키지 않는다. 영화 말미 한, 두 차례 주인공들이 분노를 터뜨릴 때조차도 절제를 완전히는 버리지는 않는다. 그 지독한 절제로 인해 영화를 보며 심심치 않게 눈가에 눈물을 머금긴 해도, 실컷 눈물을 흩뿌리긴 어렵다. 영화의 으뜸 미덕으로 평가되고 있는 전도연의 인물 해석 및 연기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절제미는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다.
10. 명왕성, 신수원 감독
병들대로 병든 한국 교육계의 어떤 실상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문제적 소품이다. “2012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단편 <순환선>이 카날플뤼 상을 수상하면서 급부상한, 교사 출신 신수원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명문대학 입학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마다치 않는, 성적 상위 1% 이내 고3 우등생들 이야기다. 한 명문고 전교 1등을 차지해오던 한 학생이 산 속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영화는 그 죽음의 연유와 과정, 여파를 스릴러의 틀을 빌어 흥미진진하게 담았다. 정교한 플롯을 거쳐 도달되는 결말은 가히 충격적이다.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 고 말한들 과장은 아니다.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가는 극 구조나 이다윗, 성준, 김꽃비, 조성하 등 혹할 만한 연기진의 호연 등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나, <명왕성>의 주제 내지 메시지는 그 영화적 재미를 넘어 사회로 향한다. 감독의 출신배경에서 짐작되듯, 경쟁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다. 그런 짙은 사회성이 영화를, '여고괴담 시리즈' 유의 공포물이나 <파수꾼> 유의 성장영화와 일정 정도 갈라놓는다. 영화감독이 되기 전 중학교 교사로 10여 년간 몸담았던 학교에서의 경험이 상당 부분 반영됐음은 물론이다.”
감독은 “서울대학교 독어교육과 졸업 후 공립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 들어가 시나리오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단편 <면도를 하다>(2003)로 제14회 브리즈번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됐다. 첫 장편 <레인보우>(2010)로 제23회 도쿄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상 등을 수상했다. MBC 다큐멘터리 <여자만세>(2011)를 만들고 장편상업영화 <푸른소금>(2011)을 각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 단편 <순환선>(2012)으로 제65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카날플뤼상을 수상했다.” (2012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프로그래머 노트). <명왕성>은 <레인보우>(2009)에 이은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영화 평론가 전찬일의 2013년 '나만의 한국영화 10선'
1. 설국열차, 봉준호 감독
2. 변호인, 양우석 감독
3. 창수, 이덕희 감독
4.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오멸 감독
5. 우리 선희, 홍상수 감독
6. 가시꽃, 이돈구 감독
7. 무게, 전규환 감독
8. 용의자, 원신연 감독
9. 집으로 가는 길, 방은진 감독
10. 명왕성, 신수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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