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대한 전설은 그가 우리네 가요사에서 해온 일련의 역사들이 '조용필'이라는 이름 하나에 응축되고 직조되면서 생겨난 것들이다. 득음을 향한 그의 전설적인 노력이라던가, 우리네 민요에서부터 록, 블루스, 팝, 재즈 등등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자신의 목소리로 통과시켰다는 것, 무엇보다 그렇게 그가 만들어낸 소리와 음악이 당대를 살아낸 대중들에게 특별한 기억과 향취로 남겨졌다는 것이 위대한 전설의 탄생의 기원이다. 하지만 전설은 현재가 될 수 없다. 멀리 떨어뜨려 놓고서야 비로소 고개를 조아리는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조용필이 들고 온 'bounce'는 '전설'이라 불리는 것조차 원치 않는 현재형 가수로 불리고픈 그의 욕망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늘 현재진행형이었지 않은가.
하지만 방송과 인터넷과 라디오와 음원들로 뒤덮인 복제가 일상화된 시대에 전설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최근 일어난 전설(레전드) 붐은 어찌 보면 디지털의 극단에서 역방향으로 흘러간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와 문화 주요 구매층으로 자리한 중장년층의 추억이 그 사라져가는 과거를 현재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결과이기도 하다. 세시봉 열풍은 그 진원지이고, <써니> 같은 영화는 그 저변에 대한 확신이었다. <슈퍼스타K>로부터 시작한 오디션 열풍은 새내기들의 전설에 대한 경의를 통해 추억의 명곡들을 현재화했고, <나는 가수다>는 과거의 전설을 불러내기 위해 한 판 살벌한 '신들의 제전'을 만들었다. <불후의 명곡2>는 그 전설들을 현재화하기 위해 전설을 모셔놓고 트리뷰트 형태의 무대를 세웠다. 사라져가던 전설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귀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과거의 전설들이 그 권위를 탈각시키고 현재의 일상으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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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조용필이 'bounce'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 같이, <꽃보다 할배>의 어르신들은 청춘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배낭여행을 하는 한 청년에게 신구가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프로그램이 가진 색깔을 제대로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은 어르신들의 권위나 경륜을 젊은이들에게 설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젊은이들이 가진 청춘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어르신들이 찬사를 보내는 것. 이처럼 전설들이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가치가 아니라 현재의 가치를 던져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설은 일상화되기 마련이다.
<꽃보다 할배>의 어르신들이나 조용필처럼 당대의 공기와 역사를 몸으로 체현한 인물들은 이 즈음에서 두 가지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된다. 전설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현재를 살아갈 것인가. 싸이처럼 자신이 나온 뮤직비디오가 무한 복제되어 전 세계로 제 위상을 떨치는 시대에 신격화되는 전설은 어딘지 시대와 맞지 않아 보인다. 싸이의 무한 복제 배포되는 뮤직비디오는 지금 우리네 현재의 삶을 제대로 보여준다. 비록 싸이 같은 가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혼자 기타를 두드리는 영상을 찍어 유튜브 같은 곳에 자발적으로 복제를 허가해 자신을 알리는 것이 마치 시대의 강령처럼 되어 있는 현재. 이른바 이것이 B 피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터전이자 발판이다. 복제가능성은 신화를 없애지만 동시에 전 세계를 하나로 엮을 만큼 폭넓은 대중화와 일상화를 가능하게 했다. 몇 천만 건의 다운로드가 기록이 되고 그것이 심지어 이 시대의 전설이 되는 현재에 과거적 의미의 전설은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조용필을 우리가 '살아있는 전설'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이 변화하는 시대의 중간 지점에 정확히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조용필이라는 가수의 위대함이다. 무려 40여년에 가깝게 '현재'를 고집함으로써 당대를 관통하는 살아있는 존재이면서도, 그 오랜 세월의 역사가 그 이름에 겹겹이 쌓이면서 전설이 된 존재. 그러니 그가 내민 'bounce'라는 곡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내미는 부끄러운 손짓이면서 동시에 우리네 가요계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그의 음악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혹시 음악이 가진 힘은 아니었을까. 늘 현재형으로 불려지지만 들을 때마다 아련한 저마다의 과거 어느 한 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 음악의 힘. 음악이라는 틀 안에서는 그래서 늘 청춘이 어른거린다. 실로 놀랍지 않은가. 이 시대에 '살아있는 전설'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