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대립 그리고 용서, 사회와 개인의 관계, 사랑과 결혼의 의미, 더 나아가 인간의 인생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까지 제기한다. 안나라는 여인의 불륜이야기를 통해 톨스토이는 인간의 심리와 인생전반을 관통해내고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풍부한 철학과 문학의 디테일을 펼쳐낸다. 상류층 부인의 불륜과 비극적 결말을 다룬 소설이지만 흔히 말하는 막장드라마와는 본시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
지금까지 수 없이 각색돼 크고 작은 규모의 영화로 제작되어왔다. 1935년의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나 1948년의 비비안 리(Vivien Leigh) 등, 세기의 유명여배우들이 주연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고, 2012년에 영화로 다시 제작된 이 명작은 톰 스토파드(Tom Stoppard)가 각본을 쓰고 감독 조 라이트(Joe Wright)가 연출했다.
라이트 감독은 이 영화에서 실험적인 접근법을 채택했다. 실제 야외촬영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면서 특별히 제작된 극장무대를 대신 활용해 다양한 로케이션효과를 낸 것. 이는 등장인물들이 마치 현실과 분리된 귀족적인 세계 자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묘사한다.
본 줄거리는 키이라 나이틀리(Keira Knightly)의 안나 카레니나와 주드 로(Jude Law)의 알렉시 카레닌의 결혼생활을 중심으로 다룬다.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매튜 맥퍼딘)은 문란한 여자관계로 성추문을 뿌렸지만 이는 안나가 청년장교 브론스키(아론 테일러-존슨) 백작에게 홀딱 반해 격정적인 연애에 빠진 저력의 스캔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약과다.
감독 조 라이트는 2005년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에서의 합작을 인연으로 2007년 <어톤먼트>로 아카데미음악상을 수상한 작곡가 다리오 마리아넬리(Dario Marianelli)의 음악적 영감을 다시금 수용했다. 오스카 네 개 부문수상 후보에 오른 라이트의 이 최신작은 반 연극조의 무대를 특징으로 배우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순응자의 압박감 등, 위선으로 얼룩진 귀족들의 사교계 생활을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마리아넬리는 그래서 주인공들의 사회체제에 빗댄 분위기의 음악을 투영했다. 풍자적인 곡조보다 러시아의 민요와 춤곡을 주로 사용했다. 작곡가는 Beriozka", "Berezka", 또는 "Beroza"라는 러시아명으로 보통 쓰였고, 때로 영어로 "In The Field Stood a Birch Tree"라 불린, 아주 오래된 러시아민요 'The Birch Tree'(자작나무)의 대대적인 사용을 추진했다.
클래식작곡가 차이코프스키(Peter Ilyich Tchaikovsky)도 자신의 4번 교향곡(Symphony No.4 in F minor Opus 36)의 마지막장에 멜로디를 썼던 것으로 유명한 자작나무는 러시아에서 특별한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톨스토이의 소설“안나 카레니나”그 자체와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의 영화를 포함해 여타 문학작품에서 자주 쓰인 소재이기도 하다. 마리아넬리는 또한 가창이 들어간 노래를 통해 여주인공이 그녀의 남편을 기만하는 걸 적합하게 묘사하도록 했다.
마리아넬리는 작곡한 일부 추가적인 멜로디를 영화 내내 반복해서 흘려보낸다. 모두 서정적인 민요조의 특징을 가지고 다채로운 장면들과 영화 전반의 분위기에 어울리게 편곡되어 적합한 구실을 한다. 그의 스코어링은 현악합주와 그 사이를 독주로 누비는 다양한 악기들의 반주들로 명백하게 나타난다. 영화의 막을 여는 'Overture'는 트럼펫, 바이올린 독주, 클라리넷, 그리고 아코디언으로 자작나무 멜로디를 확립하지만 다시 자작나무 장식음으로 복귀하기 전 피차카토와 스타카토 스트링 반주로 탐상을 하면서 울린다.
기차객차소리는 타악적 사운드가 계속되는 가운데 스네어 드럼의 파열로 'Clerks'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 같다. 이 새롭게 수립된 사운드들의 미묘한 사용은 <어톤먼트>에서 마리아넬 리가 특징적으로 사용한 바 있는 타자기소리를 연상시킬 만하다. 'She is of the heavens'는 3박자의 빠른 춤곡 풍 곡조로 변하는데 이는 유대인들로부터 파생된 민속음악스타일, 결혼과 축하 등의 예식에 사용된 악기들로 춤곡조의 음악을 연주하는 클레츠머(Klezmer)음악과도 같다. 이어지는 곡조는 자작나무 멜로디를 휘파람과 노래로 재도입한다. 클레츠머 스타일은 영화 속 이야기전개의 배경무대에 역사적으로 정확한 반영으로 스코어의 다른 지점에서 재연된다.
변덕스럽거나 풍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곡 'Anna marches into a waltz'는 곡의 종결을 향하면서 리듬적인 변화를 다시금 제시한다. 'Beyond the stage'는 더 어두운 음조의 스트링 반주로 지지되기까지 피아노와 하프연주로 사뭇 진지한 분위기를 주입한다. 'Kitty's debut'에서 때론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음악을 암시하는 비엔나왈츠의 더 경쾌한 무드로 복귀하면서 이전의 심각한 분위기는 막을 내린다.
왈츠는 'Dance with me'에서도 계속된다. 처음에 스네어 드럼 비트로 나타나지만 연쇄적으로 분위기를 바꾸면서 더 복잡하게 변하고, 대조적으로 더 어두운 멜로디를 복합적으로 나타내면서 극적인 절정에서 경쟁적으로 상충하다 막을 내린다. 이처럼 복잡미묘한 무드는 'The girl and the birch'에서 부드럽게 완화되고 은은하게 울리는 반주로 자작나무 노래를 간결하게 묘사한다.
'Unavoidable'은 피아노와 저음 현의 협주로 왈츠테마를 지속적으로 연주하고 'Can-Can'에서 분위기는 다시금 급반전한다. 휘몰아치는 관악기(목관악기와 금관악기)로 다소 거칠게 클레츠머 스타일 음악을 허둥지둥 우왕좌왕 난잡하게 반주하고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근본적으로 저변에 깔린 스네어 패턴으로 기차여행을 재차 암시한다. 스코어의 중반은 주도적인 스토리라인이 전개됨과 함께 훨씬 더 진지하고 심각한 톤을 취하기 시작한다.
'I don't want you to go'는 이전의 왈츠테마에 부분적으로 근거했지만 최저음으로 지속되는 베이스음으로 인해 음악은 마치 누군가의 마음에 계속되는 불안감을 주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긴장감 넘치고 암담한 기조를 유지한다. 'Time for bed'는 오르골/뮤직 박스 스타일의 첼레스타반주로 비교적 차분하고 평온한 순간들을 잠시 동안 부여한다. 그리고 곧이어 'Too late'에서 애수와 고뇌에 찬 분위기로 다시 되돌아간다. 애절한 바이올린 독주가 일품인 'Someone is watching'에서 감정의 깊이는 더욱더 깊어진다.
'Lost in a maze'는 풍부한 스트링으로 울적한 왈츠를 느리게 연주하고 자작나무 멜로디의 주제적 편린들을 희망차게 연주하는 클라리넷의 경쾌한 분위기로 대체된다. 'Masha's song'은 감정에 북받친 여성의 보이스가 주저하듯 들리는 한편 'A birthday present'는 위협적인 금관악기와 스네어 반주로 처음엔 크고 어둡게 묘사되지만 고요하게 조를 바꾼 뒤 사색적인 피아노 반주로 종결된다.
'At the opera'는 남성과 여성 독창으로 가극조의 양식미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마리아넬리는 이 곡에 쓸 가사를 위해 톨스토이의 원작 “안나 카레니나”의 원문을 인용했다고 한다. 'I know how to make you sleep'은 현악 효과음으로 시작해 현을 위한 애도의 비가로 변주된다. 왈츠테마는 'Anna's last train'에서 아코디언과 현악으로 재연되어 나타난다. 현악주도의 오케스트라를 지속함으로써 작곡가 마리아넬리는 결코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사교적 모임의 동떨어진 세계와 속편한 무도회를 암시적으로 재강조한 듯하다.
암울한 무드는 'I undersood something'에서 첼로독주로 계속된다. 괴로워하는 피아노반주는 아코디언 독주와 함께 어떤 위로를 찾으려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Curtain'의 타이틀은 왈츠테마를 비애감에 젖게 재연해 이야기가 결말에 달했을 때 연극적인 무대에서 막을 내리는 것을 다시 암시한다. 마지막 트랙 'Seriously'는 악마적인 탱고로 풍자적인 분위기를 되살린다. 수미상관의 기법처럼 클레츠머 풍의 경쾌하고 낙관적인 곡조로 앨범을 매듭짓는 곡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스코어는 다리오 마리아넬리가 작곡한 또 하나의 명화적 걸작이라 추켜세우기에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자신의 독특한 음악적 파노라마를 다시금 규정한 것은 물론 영화와 별도로 들어도 청취자들이 자연스레 영화적 상상에 동화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영화음악으로서의 가치는 최상이다. 다재다능한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다리오 마리아넬리의 영화음악여정은 늘 기대를 끊이지 않게 한다. 자기만의 독자적인 요령을 항상 탐구하고 영화가 필요로 하는 음악의 톤을 최적으로 제공할 줄 아는 그는 명실공히 부정할 수 없는 영화음악장인이다.
-수록곡-
01 Overture 서곡
02 Clerks 사무원
03 She Is Of the Heavens 천상의 그녀
04 Anna Marches Into a Waltz 안나 왈츠로 행진해가다
05 Beyond The Stage 무대 저편에
06 Kitty's Debut 키티의 첫선
07 Dance With Me 나와 춤춰요
08 The Girl and the Birch 소녀와 자작나무
09 Unavoidable 불가피한
10 Can-Can 캉-캉
12 Time For Bed 잘 시간
13 Too Late 너무 늦었어
14 Someone is Watching 누군가 보고 있어
15 Lost In a Maze 미로에 빠지다
16 Leaving Home and Coming Home 출가와 귀가
17 Masha's Song 마샤의 노래
18 A Birthday Present 생일선물
19 At the Opera 오페라에서
20 I Know How To Make You Sleep 당신을 어떻게 잠들게 할지 알아요
21 Anna's Last Train 안나의 막차
22 I Understood Something 뭔지 알았어요
23 Curtain 커튼, 막
24 Seriously 진심으로
작곡: 다리오 마리아넬리(Dario Marianelli).
지휘와 관현악편곡: 벤자민 월피쉬(Benjamin Wallfisch).
독주 찬조출연: 잭 리벡(Jack Liebeck).
녹음과 믹스: 닉 올리지(Nick Wollage).
편집: 제임스 벨라미(James Bellamy).
앨범제작: 다리오 마리아넬리(Dario Marianel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