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의 장윤정이 말해주듯 트로트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주류음악으로서의 위치를 지키며 질긴 끈기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아무리 사회적 지체가 높아도 고학력의 소지자라도 '나이가 들면' 또 '노래방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트로트 한 가락을 뽑고야 마는, 지금도 살아있는 '백 투 트로트!'의 관습은 트로트의 꺾이지 않는 위상을 말해준다.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된 트로트 음악의 힘은 무엇보다 전(全)국민적이고 세대 포괄적이라는데 있다.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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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트로트의 탄생기가 다름 아닌 일제 강점기라는 것이며 이것은 트로트의 발생, 기원과 관련하여 '태생적 한계'로 따라 붙는다. '트로트가 일본의 것이냐 아니냐?'는 국적 논쟁은 유서 깊으며 그 불씨는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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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말부터 해방 이전까지 수많은 트로트의 별들이 쏟아져 나왔다. 놀라울 정도의 긴 호흡을 자랑했던 '애수의 소야곡'의 미성 가수 남인수와 20세기 최고의 가요로 손색이 없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은 남녀 대표가수였다. 1930년대 말 남인수의 인기는 지금의 빅뱅 못지않아 공연이 끝나면 입구에 기생집에서 보낸 인력거가 줄을 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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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 이난영과 더불어 이 시기에는 '짝사랑'의 고복수, '나그네 설움'의 백년설, '울고 넘는 박달재'의 박재홍,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역마차'의 장세정 등이 맹활약했다. 해방 후에 등장한 가수로는 단연 '굳세어라 금순아'의 현인이 발군이었다. 매우 심한 떨림을 강조한 특이한 음색으로 시대를 풍미해 '신라의 달밤'을 비롯한 그의 노래는 한동안 가수든 일반인이든 모창 단골 소재였다.
이미자 그리고 남진 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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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의 가성은 물론 여타 가수들이 보여준 기교와 장식이 전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순정(純情) 보이스를 전한 이미자는 1964년 '동백아가씨'로 당시로는 경이적인 10만장 이상, 요즘으로 치면 100만장의 판매량을 거두면서 음악이 이제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알렸다. 지구레코드의 고 임정수회장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로 음반사를 차릴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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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이전 '눈물의 연평도'의 최숙자 그리고 동시대 '바다가 육지라면'의 조미미, '영산강처녀'의 송춘희 등 인기 여가수가 있었지만 트로트의 위력을 꼭짓점으로 끌고 올라간 주역은 두 남자가수 남진과 나훈아였다. 남진은 1967년 '가슴 아프게'의 대박으로 알려졌고 나훈아는 1969년 '사랑은 눈물의 씨앗'으로 인기가도의 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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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에 되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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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 즉 록 출신의 가수들이 대거 안전한 트로트를 선택하면서 다소간 위력을 회복한 것이다. 시작이 19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였고 그 뒤를 '오동잎'의 최헌,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윤수일, '정주고 내가 우네'의 김훈, '내게도 사랑이'의 함중아가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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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의 피를 가진 조용필은 이후 록밴드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며 록과 젊은 음악 중심의 활동을 했지만 1985년에는 3박자 트로트 '허공'을 불러 다시 트로트에 원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수은등'의 김연자와 '멍에'의 김수희는 대박이었고 1979년 박정희대통령 궁정동 시해사건과 연루되어 공식 활동이 어려웠던 심수봉은 1984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로 날갯짓을 시작해 트로트의 상승기류에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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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경쾌한 폭스트로트는 하지만 과거의 마이너 애상 조와 작별하면서 트로트를 '관광버스용'의 위락 음악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유행음악의 대세는 젊은이의 댄스와 발라드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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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의 젊은 트로트가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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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의 박상철, '오빠만 믿어'의 박현빈, '사랑의 배터리'의 홍진영 그리고 LPG, 뚜띠 등 젊은 트로트가수들이 잇달아 출현했고 트로트를 할 것 같지 않은 아이돌 가수들도 새로운 시장 트로트에 도전했다. 최고 인기의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는 티(T)라는 프로젝트 팀을 통해 '로꾸거'를 발표했고 '빅뱅'의 대성은 '날 봐 귀순'을 노래방의 골든 레퍼토리로 만들었다. 2009년에는 김종국도 '따줘'라는 트로트를 내놓기도 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트로트의 파워는 선거 기간에 확인할 수 있다. 근래 선거에서 로고송으로 사용한 10곡 노래 가운데 무려 7-8곡이 트로트였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후보는 '어머나'를 로고송으로 채택했고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자그마치 194명의 후보가 박상철의 '무조건'을 유세전에서 사용했다. 유권자 공략을 위해 트로트를 썼다면 그것은 여전히 트로트의 서민적 흡인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80년 트로트의 무궁한 역사의 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