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 밴드가 설령 주류 미디어인 TV에 출연해도 아이돌 댄스그룹이나 가창력을 내세운 발라드 가수만큼 빠르게 대중적 화제를 흡수하지는 못한다. 여전히 대한민국 음악 판은 댄스와 발라드 틀 속에서 구동한다. 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록을 하는 팀이 있더라도 본격적인 수준이라기보다는 흉내 내는 정도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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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은 주류에서 포효했다. 이 시기의 많은 록밴드 가운데 단연 손꼽히는 팀이 '송골매'일 것이다. 배철수와 구창모가 이끈 송골매는 공연무대나 야간업소에서도 맹활약했지만 TV에도 자주 모습을 비췄다. 당시 TV의 음악은 완전히 기성가수들의 것이었다. 10대와 20대들은 쉽게 텔레비전에 나올 수 없었다.
배철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송골매는 그런 풍토를 뚫고 TV에서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했고 록으로 가장 대중적으로 팬들에게 다가선 그룹이다!” 이 얘기는 송골매와 같은 록밴드의 분발로 당시 TV 시청자들은 그 음악을 굳이 록이라고 목청 높여 말하지 않았을 뿐 일상적으로 록을 접했다는 말이다. 일반인들이 가장 자연스레 록을 많이 들었던 시절이 바로 1980년대였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록의 존재감에 의해 1980년대 중후반에는 '들국화', '부활', '시나위', '백두산'과 같은 언더그라운드 록밴드도 출현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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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요제>에서 탁월한 연주력을 발휘해 자신의 활주로를 놀라게 했던 '블랙 테트라'(이들의 곡 '구름과 나'는 빅히트했다)가 생각났고 그들과 함께 음악을 해야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리하여 블랙 테트라의 멤버인 구창모, 김정선, 오승동이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배철수의 판단과 결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음악적 열정에 충만했던 그는 노래 잘하는 구창모와 발군의 연주솜씨를 자랑한 김정선과 오승동, 그들의 빼어난 실력이 절실했다.
그는 구창모에게 함께 해보자는 제의를 하기 위해 구창모가 있었던 오색약수터라는 암자를 찾아 산에 오르는 열의까지 보였다. 조금 과장하면 유비가 제갈량을 찾기 위한 '삼고초려' 격이랄까. 리더 자리를 구창모와 나누어야 했지만 오로지 그의 관심사는 좋은 연주의 음악이었다. 구창모 역시 음악 욕심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마침내 배철수와 구창모의 의기투합이 성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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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처음 본 순간', '빗물', '한줄기 빛', '난 정말 모르겠네' 등 그룹의 히트 퍼레이드는 계속되었다. 송골매는 CF 모델로도 분했고 대학생 소재의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 청춘의 아이콘으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순항하던 그룹은 4집을 끝으로 구창모의 탈퇴라는 쇼크를 당하면서 좌초의 위기를 맞는다. 솔로의 가능성을 높게 점친 제작자들의 끝없는 섭외로 구창모가 솔로독립에 나선 것이다.
솔로 구창모는 '희나리', '아픔만큼 성숙해지고', '문을 열어' 등을 연속 히트시키며 당대 최고의 가수로 부상했다. 배철수는 팀을 추슬러 같은 해 '하늘나라 우리 님'으로 가요 톱10의 정상에 오르는 등 위신을 지켰지만 그것으로 전성기는 끝이었다. 6집부터 9집까지의 앨범은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1990년에 발표한 9집에서 '모여라'가 잠시 화제를 모았을 뿐이다. 배철수가 그해 MBC 라디오의 디스크자키로 변신하면서 사실상 송골매는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송골매를 회고하면서 젊은이들의 힘찬 연주와 개성을 내세운 음악, 그 로큰롤이 주류 미디어에서 힘쓰지 못하는 요즘의 현실이 개탄스럽다. 록이 부재하다는 것은 역으로 현재의 주류 음악이 가수마다 그룹마다 개성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올해는 인디 밴드를 비롯해 록 음악이 분전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록의 활기는 다름 아닌 청년문화의 외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