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보베르데 대통령 호르헤 까를로스 폰쎄까(Jorge Carlos Fonseca)는 “세자리아 에보라는 조국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라는 추도성명을 내놓고, 이틀 동안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다. 앙골라 가수 유리 다 쿤아(Yuri Da Cunha) 역시 “그는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목소리였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항상 문이 열려있던 그의 집에는 수많은 국민들이 생전 그가 즐겨 피웠던 담배를 갖다 놓았다.
세자리아 에보라는 미국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와 종종 비견된다. 홀리데이처럼 그의 목소리에도 깊은 슬픔이 칠해져 있다. 아무리 빠른 리듬이라도 콘트랄토(Contralto, 여성의 최저 음역)로 부르는 그의 음색은 아프고 서럽다. 애잔하기도 하고, 울음을 꾹 참기도 한다. 그의 슬픈 초상은 아프리카 국가이면서도 지역적인 환경 때문에 500년 동안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놓였던 조국 까보베르데의 역사와 그 처절한 조건 아래서 가난을 겪으며 '살기 위해' 노래해야만 했던 개인의 역사가 그렇게 만들었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까보베르데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섬나라. 1456년 포르투갈 항해사에게 발견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살지 않는 열다섯 개의 섬으로 이뤄진 군도였다. 이후 포르투갈이 대서양 무역의 전진기지로 삼으면서, 아프리카로부터 많은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흑인들과 유럽 백인들 사이에 성적인 결합이 일어나면서, 까보베르데는 크리올의 천국이 되었다.
하지만 열악한 자연환경은 까보베르데를 죽음의 땅으로 내몰았다. 사막과 사바나 지역으로 뒤덮인 땅은 식량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주기적으로 닥치는 가뭄과 기근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조국을 등지고 포르투갈,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으로 떠났고, 이민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모르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다드(Sodade)'라 불리는 정서이다. '노스탤지어'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소다드는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고 있는 가족,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을 담고 있다. 또한 푸른 바다가 파도에 실어 보내는 강렬함과 잔잔함,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운명에 도전하겠다는 까보베르데 사람들의 마음가짐, 사랑과 이별의 아픔, 삶의 자세 등도 소다드에 녹아있다.
세자리아 에보라는 바로 모르나를 상징하는 가수이다. 1941년 8월 27일 상 비센테 섬의 민델로에서 태어났고,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고아원에 들어가 생활해야만 했다. 열여섯 살 무렵에 선원들의 숙소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는 돈 대신 공짜 술을 마시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때부터 술과 담배는 그의 삶에 치명적인 휴식처를 제공했다.
1970년대 까보베르데를 대표하는 가수로 우뚝 선 그는 1985년 포르투갈에서 활동하던 동료 가수 바나(Bana)의 초청을 받아, 리스본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동향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프로듀서 주제 다 실라(Jose Da Silva)를 만나면서 음악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그는 다 실바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88년 데뷔 앨범 < La Diva Aux Pieds Nus (맨 발의 디바) >를 내놓았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맨발의 디바'라는 음반 타이틀은 바로 맨 발로 노래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붙였다. 이후 그의 애칭이 됐다.
세자리아 에보라의 대표곡으로는 'Maria elena', 'Sodade', 'Angola', 'Beijo De Longe (멀리서 하는 키스)', 'Jardim Prometido (약속의 정원)', 'Voz D'Amor (사랑의 목소리)', 'Africa nossa (우리의 아프리카)', 'Rogamar (바다를 향한 기원)', 'Sombras Di Distino (운명의 그림자들)'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특히 조국과 고향에 대한 노래를 즐겨 부르며 뜨거운 애정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Cabo verde mandá manténha (까보베르데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Petit pays (작은 고향)', 'Sao vicente di longe (멀리서 본 상 비센테)', 'Carnaval de sao vicente (상 비센테의 축제)', 'Carnaval de sao vicente (영광의 땅 까보베르데)' 등 노래 제목만 봐도 대번 그 마음이 느껴진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세자리아 에보라는 민델로에 열 개의 방이 있는 집을 새롭게 지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 함께 하지 못했던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공연 때문에 해외에 나가있어도, 크리스마스에는 가족과 보내기 위해 민델로로 꼭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탄절을 일주일 앞두고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했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노래들은 매일 매일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줄 것임에 틀림없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