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이라기보다는 '현상'이었다. 학교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술집에서도, 심지어 군부대에서도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이들의 'Tell me'가 흘러나왔고, 거기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람들을 눈길 닿는 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DOC와 춤을' 이후, 유행가에 관심 없던 백발 어르신들까지 움직일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대중가요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그만큼 대단하긴 대단했다는 거다. 박진영과 이 다섯 명의 소녀가 만들었던 전 국민적 현상이.
시간은 흘렀고, 시장은 변했다. 박진영이 원더걸스와 미국 시장에서 모험(혹은 도박)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 활동에 소홀했던 이들은 더 이상 국민 아이돌이 아니었다. 이제 과거의 국민 요정들은 해외시장 공략에 빠르게 성공한 여타 걸 그룹들과의 비교는 물론, 멤버 교체와 같은 부침까지 겪으며 한물갔다는 조롱 섞인 비아냥거림마저 감당해야했다. 이것이 원더걸스가 헤쳐 나가야하는 현재의 상황이다. 바꾸어 말해서, < Wonder World >는 이런 순탄치 않은 상황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되어주어야 했다.
소녀시대가 < The boys >를 발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컴백을 선언한 것을 보면 박진영은 정면승부에 자신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앨범의 퀄리티로 보건데, 그것은 분명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신보에서 이들은 'Tell me'와 'Nobody', '2 different tears'를 통해 쌓아온 복고적 이미지를 덜어내고,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신스 팝으로의 중심 이동을 꾀하고 있다. 풍성한 신디사이저 입자들은 1980년대의 추억을 환기시킴은 물론, 현대적인 세련미까지도 제공한다.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볼 수 있는 음악들이라고나 할까.
곡의 작법이 국내의 아이돌그룹 음악시장에서 관습적으로 이뤄지던 '후크송'에서 벗어났다는 점과, 회사의 규모를 키움에 따라 그동안 상대적으로 박진영에 대한 의존도가 높던 작곡 방식 -이를테면 지오디(god) 시절부터 최근 미스에이(Miss A)의 음악에까지 어느 정도의 한계를 보이던 어설픈 리듬 중심적 작법- 에서 탈피했다는 점은 이들의 음악을 괄목상대하고 대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요인들이다. 아마 이런 변화들이야말로 박진영이 가진 자신감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혼(horn) 세션으로 재미를 주고 신디사이저로 혼을 빼놓는 댄스 넘버 'G.N.O.', 캐럴송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신스팝 타이틀 'Be my baby', 베이스의 펑키한 사운드를 제대로 살려낸 'Sweet dreams'가 바로 그런 진화의 중심에 있는 트랙들이다. 신중현의 '미인'을 대담하게 리메이크한 'Me, in'은 고전적인 느낌의 원곡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세련된 후크를 갖추게 했고,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Nu shoes'는 국내 음반의 수록곡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해외의 팝 감성에 충실한 인상적인 멜로디라인을 뽐내고 있다.
앨범만 놓고 보면 참 맵시 있게 잘 빠진 음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영화 <혹성탈출>의 주인공들처럼, 앨범이 자신의 시대가 아닌 곳에 불시착해버렸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JYP, and the Wonder Girls are back.' 오랜만의 복귀를 알리는 문구일 뿐인데 안 그래도 먼 길을 너무 돌아서 왔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앨범에 대한 만족도와 정비례하는 이 안타까운 마음은 오직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수록곡-
01. G.N.O.

02. Be my baby

03. Girls girls
04. Me, in

05. Sweet dreams

06. Stop!
07. Dear. boy
08. 두고두고
09. SuperB
10. Act cool (Feat. San. E)
11. Be my baby (Ra.D mix)
12. Nu sho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