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사 앨범이라는 것도 최근에는 새로 나와서 그 생명이 한 달을 넘기지 못하는 '반짝'들이 부지기수다. 재미와 감각은 근래 음악 판을 한 주 턱걸이의 짧은 유행절기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아직도 음악팬의 가슴을 울리는 음반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걸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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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어떤 날의 음반이 나왔을 당시 조그마한 센세이션이라도 있었는가. 다수와 연을 맺는 히트라고는 할 수 없었고 언론에서 떠든 화제작 또한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은 마치 장롱 깊숙이 금을 보관하는 심정으로 이 작품을 뇌리에 심어두었다. 3년 후 1989년에 발표된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앨범 <어떤 날Ⅱ>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팬들도 그렇지만 특히 후대의 다수 뮤지션들이 딱 두 장에 불과한 어떤 날의 앨범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 어떤 날은 TV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텔레비전 프로듀서들이 찾지도 않았다. 둘은 같이 찍은 사진도 없다. 지금처럼 인기몰이, 띄우기와 같은 홍보나 마케팅을 전혀 전제하지 않았음의 증명이다.
하지만 1980년대 대중가요 황금기를 주조해낸 그 무렵의 음악팬들은 브라운관의 '보이는' 인기가수 말고도 참되고 진지한 세계를 탐구하는 '보이지 않는' 음악가들을 골라낼 줄 알았다. 그들만의 서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해주는 이 내면적인 음반은 당대의 음악팬들의 수요에 맞춘(아니 수요를 불러낸) 적절한 공급이었다.
'하늘', '오래된 친구', '지금 그대는', '너무 아쉬워하지마'를 비롯해 일렉트릭 기타와 신시사이저가 기막힌 조화를 이뤄내 수작으로 평가받는 곡 '그날'과 동시대의 전설 '들국화'도 불렀던 곡 '오후만 있던 일요일' 등 수록된 9곡 모두가 가슴을 적시는 서정적 울림으로 빛나는 1집으로 이미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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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작사 작곡가 심현보는 1집에 대해 “그 서정성이란… 지금 들어도 휴식 같은 앨범!”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호들갑떠는 TV와 암울한 군부 독재의 세상에 지친 당시 일각의 젊은 세대들은 심현보의 말처럼 이 앨범으로 위로와 쉼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두 장을 관통하는 어떤 날 음악의 핵심어는 당대는 물론 지금에도 그 서정성이 갖는 의미에 있다. 근래 우리의 주류음악이 상실한, 그래서 도무지 경험하기 어려운 바로 그 서정적 분위기다.
아이돌과 걸 그룹의 이른바 후크 송은 일정 소절의 반복과 자극적인 재미로 철저히 감각화, 패션화되어 있다. 이 점은 인디와 언더 음악도 예외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어디선가 진지하고 사색적인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암약하고 있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는 리스너들로부터 싸늘하게 외면을 당한다. 1980년대의 대중음악이 끊임없이 환기되는 이유는 일방통행의 지금과 달리 서정성을 포함한 다채로운 음악의 정서가 표출되고 또 팬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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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텔레비전에서 접했던 가요들, 이를테면 발라드와 댄스는 중심이 노래하는 가수였다. 하지만 어떤 날의 이병우는 기타리스트, 조동익은 베이스주자라는 사실은 우리 대중음악이 연주자들을 밀어제쳐놓고 오로지 가수만으로 접근해왔음을, 그리하여 연주는 곧 반주였음을 반성적으로 일깨우는 것이었다. 획기적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음악이 보컬과 반주라는 등식은 지극히 재래식이라는 것, 그 고정관념의 파기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연주는 보컬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독립된 것임의 실천이다. 그러기 위해선 메시지와 같은 권리를 행사하는 고밀도의 연주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병우가 마니아들 사이에 사랑받은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Pat Metheny)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외국음악의 추종에 대한 아쉬움을 가져오기보다는 세련된 연주에 대한 기대감을 불렀다. 이후로 팬들도 앨범을 구입할 때 가수 이름만 보는 게 아니라 뒷면에 적혀있는 연주자나 편곡자의 이름을 챙기게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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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의 세월이 마치 어제인 것처럼 또렷하고 생생하다. 처음 '어떤 날'의 앨범을 샀을 때는 이러한 둘의 '매직 앙상블'을 다시는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시절에 집착하는 무리들은 미련하게도 '돌아온 어떤 날'을 꿈꾼다. '그런 날에는' '덧없는 계절'인 '11월 그 저녁에' '오래된 친구'를 불러 '취중독백'하며 '하루'를 '출발'했어도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고 위로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