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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웨이는 사실 <레이첼, 결혼하다>(Rachel Getting Married, 2008)에서 망가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호연으로 유수의 비평가협회상을 거의 독식하고도 오스카여우주연상 수상의 영예는 놓친 바 있다. <다우트>의 메릴 스트립, <체인질링>의 안젤리나 졸리 등과 어깨를 견줬지만 아깝게도 <책 읽어주는 남자>의 케이트 윈즐릿에게 트로피를 내줘야만 했다.
<러브 앤 드럭스>(Love & Other Drugs)에서도 그녀는 파킨슨병환자란 점을 감안해 마르고 초췌한 모습으로 나온다. 그래서 안 그래도 큰 눈망울이 더 왕방울 만해 보일 정도다. 뿐만 아니라 자유연애를 하는 현대여성의 면모 속에서 빛나는 연기력은 감정적으로 흡인력 있게 다가오는 극적인 순간들에서 제대로 발휘된다. 제이크를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눈 덮인 싸늘한 골목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뒷모습, 병적 증상으로 손을 떠는 등 고통 속에 절규하는 순간들에서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 정도로 찡한 감동을 주는 감정연기는 실로 대단히 열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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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 질렌할은 또 어떤가. 주지하다시피 그는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2005)으로 영국아카데미시상식(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이력의 소유자. 비록 미국의 오스카상과는 연을 맺지 못했지만 감동적인 감성연기로 이미 공인을 받은 실력파배우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두 남녀의 생화학적 반응은 심하게 뜨겁게 달아올라 흐지부지되는 듯 허나 감동적인 러브스토리로 매듭짓는다.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e)의 영화적 스타일과 유사한 면들도 발견된다.
찰스 랜돌프(Charles Randolph), 마샬 허스코비츠(Marshall Herskovitz)와 각본을 겸한 감독 에드워드 즈윅(Edward Zwick)은 그들의 캐릭터들을 잘 지탱하면서 관객들에게 지루할 시간을 거의 내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러브 앤 드럭스>는 리듬감 있는 유쾌한 전개와 훈훈한 로맨스로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현실적인 화두를 절묘하게 엮어내 감염도 높은 도취감을 제공한다. 적역을 만난 좋은 배우들과 함께 웃기고 울리고 성적으로 완전 개방하면서 너무 거부감 들지 않은 선에서 사회적으로 할 말은 하고 넘어가는 내용의 전달력이 썩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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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앤 드럭스>(Love and Other Drugs), 우리말로 “사랑과 다른 처방약들”되시겠다. 알다시피 사랑은 곧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한 거니까 대충 감이 잡힐 게다. 사랑의 효험은 이미 정평 난 바, 백약보다 사랑의 묘약에 담긴 힘이 더 세다는 걸 전하는 제목이라 하겠다. 어느 여성관객의 말처럼 야하기도 하지만 사랑의 긍정적인 힘으로 어두운 현실을 이길 수 있다는 내용에 일반관객들의 호응이 이어지리라 본다. 제이미 라이디(Jamie Reidy)의 자전적 소설 “Hard Sell: The Evolution of a Viagra Salesman”(강매: 비아그라 판매원의 발전)에 근거해 제작된 영화는 제이크 질렌할(Jake Gyllenhall)이 극중 남주인공 제이미 랜달(Jamie Randall)로 출연했다.
시간적 배경은 1990년대 후반, 1996년을 기점으로 문을 여는 영화에서 그는 제약사 영업사원이다. 사실 맨 처음에 그는 전자제품대리점 판매원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성적매력으로 일을 관둔 후 제약사로 이직했다. 체질적으로 타고난 영업사원인 그는 끈질기게 들러붙어 상대방에게 호감을 산다. 물론 명민한 머리에서 나오는 달변의 실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 학창시절 의대생이 되려고 했던 적이 있었기에 제약사 일에도 적합한 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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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울증치료제 졸로프트를 병원에 들여놓기 위해 접수처 여직원을 구워삶고, 나중에 비아그라와 다른 약품들을 파는데도 더할 나위 없는 성실함으로 승승장구한다. 세상물정에 밝은 말주변으로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사는 게 아니다. 게다가 살인미소에 잘생긴 매력남인 그의 천부적 바람둥이기질에 녹아나지 않을 여자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는 타고난 매력을 발휘해 오하이오 변방에서 벗어나 거대시장인 시카고로 판매망을 확장해나간다.
영화는 1990년대 후반을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남성성기능강화 혁신제약(?) 바이아그라가 시장에서 발기한 바로 그 즈음이다. 제약회사 파이저(Pfizer) 영업사원인 제이미는 바이아그라의 선풍적인 인기와 더불어 성공가도를 질주한다. 그는 병원에 침입하다시피 해 의사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강하게 밀어 붙이고 파이저의 항우울증치료제 졸로프트보다 더 많이 팔리는 프로작(Prozac)의 판매율에 지대한 공을 세우는 공격적 경쟁자 트레이 해니건(가브리엘 마크트)을 방해하는 행위까지 일삼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천부적 영업맨이다. 이들 영업사원들에게 약품들의 아주 잘 듣는지 아닌지에 대한 효능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팔기만 하면 된다. 어떤 식으로든 더 많이 팔아야 산다. 제이미는 그의 상사 브루스 윈스턴(올리버 플랫)에게 충동질당하면서 판매에 더욱 열을 올리고 그에 따라서 시카고로 진출할 수 있는 인생의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커진다. 그의 인생은 예기치 않은 진로수정의 길로 접어든다.
그는 끈질긴 설득 끝에 친해진 닥터. 스탠 나이트(행크 아자리아)와 짝을 이룬다. 닥터. 스탠은 그를 인턴이라고 소개하라고 하고 그는 스탠 박사의 사랑스러운 환자 매기 머독(앤 해서웨이)의 가슴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엄밀히 의사라고 그러면 쓰나. 매기는 곧 그가 순 엉터리 사기꾼이라는 걸 발견하고 제이미와 옥신각신 말다툼을 벌이던 중 서서히 서로를 향한 격정적 수위를 높인다.
개방적인 성향의 두 남녀는 사실 첫 눈에 서로에게 꽂혔다. 그리고는 하루 날 잡아 통화를 시도한 그는 그녀 집으로 쳐들어가 서로의 옷을 찢고 뜯어내며 욕정을 해소한다. 때론 서로에게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음과 양의 이치에 백 마디의 말보다 동물적 성적 교감이 솔직한 대화의 첫걸음일 수 있음을 여실히 실천해 보인다. 침대보와 교성이 질펀하게 엉겨 붙은 침대에서의 뼈와 살이 타는 나날들은 시간장소를 불문하고 그 후로 오랫동안 계속된다.
매기와 제이미는 둘이 서로를 정말로 너무나 좋아한다는 걸 알아간다. 그녀에겐 쉽게 말 못할 비밀스런 사정이 있다. 그녀는 파킨슨병 1기 환자다. 이 돌발변수는 두 남녀가 장차 우여곡절을 겪을 것임과 동시에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될 거라는 희극적 이야기, 스크루볼 코미디(screwball comedy)가 될 것임을 예견한다. 헤서웨이는 자신의 역할에 매우 온유하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불러와 영화를 코미디에서 탈피시켜 “러브스토리”로 끌고 간다. 거기에서 순간 관객의 입장에서는 멈칫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이미와 마찬가지로 시청자들도 어디로 어떻게 향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둘의 감정적 줄다리기가 심해질 무렵 제이미의 뚱보동생 조시(조시 갓)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대략난감 특이한 버디무비(남자배우 두 사람이 콤비로 등장하는 영화)로 급선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자지만 아내가 바람났다며 형 집에 와 얹혀사는 동생 조시는 성인야동 중독자, 하룻밤 섹스를 해보고 나서야 아내에게 돌아가겠다고 하는 얼뜨기다. 정말 가관이자 압권은 형 제이크와 매기 둘이서 찍은 섹스비디오를 몰래보다 들켜 비디오테이프로 때려 맞는 장면이다.
몸만 컸지 아직 정신적으로 덜 큰 미성숙아가 따로 없다. 부적절한 행동을 하기로는 여생을 초중고교정에서 보내기로 작정이라고 한 것처럼 속수무책이다. 시장에서 번 건 많은 데 사생활은 형편없다. 돈이 많아도 용기나 기술이 부족하고 여생에 대한 목적의식이 불분명한 동생은 제이미의 좁은 아파트 소파에 비대 사는 게 현실이다. 그의 등장은 유사 잭 블랙(Jack Black)을 대하는 것 같은 코믹 요소를 가미하긴 하지만 점점 더 문제가 심각해지는 두 연인사이에 굳이 껴들지 않았어도 됐다.
단지 남과 여의 가벼운 교제로 만난 둘의 관계는 속 깊은 정이 들면서 더욱 더 진지해지고 고난의 길을 어떻게 이겨나가느냐에 대한 논쟁으로 번진다. 제이크는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녀는 그런 그에게 부담을 느낀다. 자기가 전도유망한 그에게 짐만 될 거라는 게 뻔하다는 생각에서다. 자기가 혼자라는 걸 잊게 해준 유일한 남자의 진심어린 사랑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은 거다. 영화는 연인의 로맨스가 완성되기 위해 꼭 극복해야만 할 파킨슨병을 주제의식으로 밀어 넣고 비중 있게 다루면서 주목하게 만든다. 이 영화가 그냥 가벼운 농담이나 주고받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는 거다.
매기와 제이미의 이야기에 무게감이 실릴수록 그러나 더욱더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각본이 제약사간의 전쟁에 대한 최근의 정보를 삽입하기를 요구한다는 거다. 브루스와 트레이에 대한 존재감은 그러한 정보를 주기위한 필요충분조건이지만 별로 개의치 않아도 된다. 이와 관련해 가장 효과적이면서 인상적인 장면은 파킨슨병환자들과 그들의 사랑하는 이들로 구성된 사람들의 모임에서 발생한다.
아내가 파킨슨병환자인 어느 남편이 제이미에게 말한다. 자기 아내의 과거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머지않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거라는 그러니까 일찍이 새 삶을 찾으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병의 진행과정에 따른 엄연한 현실적 세부사항들을 제이미는 듣게 된다. 이 장면 후, 영화가 여분의 시간동안 틀림없이 사뭇 진중하게 전개될 거라는 걸 암시하는 대목이다.
감독은 에드워드 즈윅(Edward Zwick), <가을의 전설>(The Legend of The Fall, 1994)을 비롯해 <라스트 사무라이>(The Last Samurai, 2003), <디파이언스>(Defiance, 2008) 등 감동적인 작품들을 연출했으며 <섹스피어 인 러브>(Shakespeare in Love, 1998), <아이 앰 샘>(I Am Sam, 2001) 등의 제작자로, 그리고 1994년 < My So Called Life >(내 인생이라는 것)을 포함해 다수의 TV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바 있는 도량이 큰 제작자다.
그는 각본가 찰스 랜돌프와 마샬 허스코비츠와 긴밀히 작업하면서 악천후도 문제될 게 없는 유능한 제작자임을 다시금 여실히 입증한다. 그는 앤 해서웨이로부터 온기 있고 애정 어린 연기, 겉으로 강한 척하지만 내심 아주 여리고 순수한 여성의 진솔한 모습을 얻어냄과 동시에 질렌할에게서는 코믹한 인간미에서 심각한 상황을 거쳐 진지한 한 여인의 남자로 거듭나는 고차원의 연기력을 뽑아냈다. 파킨슨병의 생존자의 남편으로 인생을 동행하는 장면들은 소박하면서도 아주 장엄하다.
천성적으로 즈윅은 그 장면에 전적으로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잘 맞지 않아도 문제될 건 없다. 특별히 매우 가치 있는 현실적 문제의식의 제기이므로. 바이아그라와 같은 발기부전치료제 제조에는 앞장서면서도 파킨슨병 치료제 개발에는 미온적인 의학계나 제약사의 현실적 문제는 사뭇 진중하다. 제이크가 매기를 데리고 전국각지의 유명박사가 있는 병원을 전전하지만 만나기조차 어려운 현실, 제약사들의 전시와 세미나가 대규모로 치러지고 있는 다른 한편에서는 파킨슨병으로 어렵게 연명하는 환자와 가족들이 작게나마 모여 발표회를 열고 있는 상황이라든가.
매기가 약이 떨어져 술로 달래고 있다가 제이크가 오자 초췌한 자신의 모습을 자학하며 화를 내지만 그가 나가자마자 고함을 치며 쓰러져 울부짖는, 그런 그녀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제이크의 장면은 정말 눈물겹다.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인들이 전세버스를 공동으로 타고 약을 구하러 가는 장면들도 가슴 아픈 현실이다. 여기에 대해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면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식코>(Sicko, 2007)을 반드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사운드트랙에 쓸 배경음악과 삽입곡들의 스코어링은 제임스 뉴튼 하워드(James Newton Howard)가 맡았다. 2010년 그는 최근 <투어리스트>를 포함해 6편의 영화음악을 담당했다. 매년 워낙 다작을 하기로 유명한 그이기에 생경할 것은 없지만 형식적 패턴에 갇히지 않을까 우려는 된다. 그래도 지금까지 오스카의 주목을 받으면서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을 만큼 실력이 받쳐주는 작곡가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남과 여를 주인공으로 한 코믹드라마의 장르적 성향을 감안한 음악을 설계했다. 직접적으로 <더블 스파이>(Duplicity, 2009)와 <투어리스트>(The Tourist, 2010)에서 공히 사용한 스타일을 차용한 점이 두드러진다. 아코디언을 특징적으로 재래식 낭만의 감성적 터치를 가미한 음악과 반복적으로 고조되고 빠지는 피아노 선율로 감동을 주조하는 주된 방식으로 극적 감동을 주는 한편 리듬적인 전개를 위한 도우미로 삽입곡을 섞어냈다.
신나는 오프닝에 쓴 스핀 닥터스(Spin Doctors)의 'Two princes'를 위시해 제약회사 파이저에서 영업사원들을 교육하는 장면에 사용된 군무 댄스 송 'Macarena'(Los Del Rio), 제이크와 첫 통화하는 매기의 집에서 울리는 'Supernova'(Liz Phair), 불티나게 팔리는 바이아그라 덕에 신난 제이크와 상사 브루스 장면에 절묘하게 삽입한 'Heaven is a place on earth'(Belinda Carlisle), 파킨슨병환자들을 위한 'Praise you'(Fatboy Slim), 그리고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의 'Show', 레지나 스펙터(Legina Specktor)의 'Fidelity', 빌리 브랙과 윌코(Billy Bragg and Wilco)의 'Way over yonder in the minor key', 스튜어트 마이클 토마스와 스티브 크레스펠(Stuart Michael Thmas and Stever Krespel)의 'Blue pill' 등이 영상과 적절히 접목돼 이야기전개를 돕거나 감정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