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음악성을 넘어서는 것의 정체는 지난 20세기의 경우, 아마도 사회 참여적이고 현실을 비판하는 리얼리즘의 표출이 아닐까 한다. 존 레논은 베트남전쟁을 반대했고 닉슨대통령의 워터게이트 등의 권력형 부조리를 비판했으며 거리에 나가 평화 시위를 주도했다. 오선지의 세계에만 갇힌 게 아니었다.
'Instant karma'를 통해 뭉치자고 호소했고 민중에게 권력을 돌리라고('Power to the people') 역설했으며, 여성은 세계의 노예라고 외쳤으며('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 'Imagine'에는 재산이 없는 평등세상에의 갈망을 표현했다. 'Mind games', 'Give peace a chance' 등 많은 노래가 웅변하듯 그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과 평화'였다. 스스로를 노동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으로 일컫는 위협적인 문화게릴라였기에 그는 1972년 닉슨정부로부터 비자연장신청이 기각되는 사실상의 추방령을 받았다.
예술성을 지닌 음악에 이러한 사회적 중량이 더해졌으니 그가 '지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숭앙되는 것은 당연하다. 1999년, 권위 있는 영국의 인명록 '인터내셔널 후즈 후'는 '20세기를 움직인 100인'을 선정하면서 대중가수로는 유일하게 존 레논을 올려놓았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존 레논이면 왜 밥 딜런은 안 되는가?'하며 즉각 이의를 제기했지만 글로벌 인지도에 있어서 밥 딜런은 '불후의 현재진행형 그룹' 비틀스 시절을 포함하면 무게가 더 불어나는 존 레논을 이기지 못한다.
존 레논의 비판정신은 자신 존재에 대한 각성과 쓰디쓴 고백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영국의 런던도 아닌 리버풀에서, 그것도 가난한 노동계급의 자손으로 태어난 그는 부모의 버림 속에 이모 손에서 자라나는 불우를 겪었다.
그는 일본인 아내 오노 요코를 죽도록 사랑했다. 대놓고 'Oh Yoko!', 'Yoko, Yoko', 'Dear Yoko'라는 제목의 곡을 썼고 제목에 없더라도 'Oh my love', 'Woman' 등의 노래는 요코를 위해 쓴 것들이다. 심지어 잠시 요코와 헤어져 있던 외로운 때를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했고 그 공백 기간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밤을 제대로 보내게 해주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다!(Whatever gets you through the night)'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아들 숀을 위해 육아에 전념하는 '남자 집사람'이 되는 이른바 하우스 허스밴드(house husband)를 실천했다. 유작 앨범 < Double Fantasy >에 수록된 'Beautiful boy(darling boy)'는 그의 무한 자식사랑을 읽을 수 있는 노래다. 나중 숀은 “아버지가 바친 평생의 테마는 세계평화, 엄마(요코) 그리고 나였다!”라고 말했다. 아내와 자식에 올인하는 이러한 면모는 평화투사와는 다른 인간적 측면을 부각해준다. 존 레논은 음악은 물론 인간으로도 사랑할 게 많은 사람이다.
그가 왜 지난 세기 최고 음악인인가를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그가 위대한 줄은 알지만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실 히트곡 숫자나 대중적 인기도로 봐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내트라 그리고 마이클 잭슨은 그보다 훨씬 히트곡도 많고 앨범의 판매량도 크게 앞선다.
지난 1970년대까지만 해도 20세기의 음악가로 그가 선택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틀스의 대표성에 관해서도 상기한 것처럼 단연 라이벌인 폴 매카트니가 우월했다. 비틀스 시절의 찬란한 명곡들 'Yesterday', 'Hey Jude', 'Obladi oblada', 'Let it be' 등은 모두가 폴 매카트니가 주조한 곡들이다.
그러던 것이 존 레논이 1980년 12월8일 팬의 총격에 사망한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존 레논의 시대성과 비판정신이 갈수록 고평을 획득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1990년대 중반 폴 매카트니가 “비틀스하면 무조건 존 레논의 그룹으로 떠올리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며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을까.
존 레논은 비틀스와 분리된 개체
존 레논이 정말로 위대한 이유는 비틀스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해체 뒤 '비틀스의 굴레'를 벗어났다는 사실에 있다. '난 비틀스를 믿지 않고 나 자신을 믿는다'고 토로한 1970년 명곡 'God'이 말해주듯 비틀스 해산 직후 반(反)비틀스와 독자적 행보를 선언했다. 비틀스를 환기시키기 위해 이후 다분히 비틀스적인 음악을 했던, 그래서 더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폴 매카트니와 이 부분에서 달랐다.
그의 아들 숀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한 음악은 비틀스 때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리하여 팝 음악의 달콤한 하모니 세계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감정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펑크가 등장하기 이전에 펑크(punk)를 했다.”
비틀스로부터 독립하여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저명한 비평가 로버트 힐번은 이 앨범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역사와 도덕 시간에 배운 위인들의 어떤 저서보다도 진실을 전해주는 다시없는 소중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그가 솔로 시절 남긴 명곡들인 'Imagine', 'Working class hero', 'Power to the people', 'Jealous guy'는 비틀스 시절과 비교할 때 곡조나 메시지가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자세와 음악 모든 면에서 비틀스는 거세되어 있다. 이를테면 그는 비틀스 멤버로도 위대하지만 존 레논이란 개체로도 우뚝 선다. 한 번도 어려운데 두 번 위대한 것이다.
가창력에서도 역사적 선두에 서다
노래실력은 어떠한가. 서구 평단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리스트를 짤 때 놀랍게도 존 레논은 아레사 프랭클린, 프랭크 시내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등과 함께 어김없이 4-5위 상위권에 오른다. 일각의 사람들은 목소리가 얇은 존 레논이 왜 가창력마저 높이 평가받는지를 모르겠다고 한다.
타고난 목청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릴 적부터 목이 터져라 노래한 덕분에 그의 보컬은 잘 닦여있고, 자기 얘기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진실하게 들린다. 'Imagine' 외에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이 곡은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지만 아무도 존 레논과 같은 맛을 내지 못했다.
산울림 김창완은 존 레논이 훌륭한 가수인 이유를 이렇게 풀이했다. “프랭크 시내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아레사 프랭클린은 하늘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천부적인 것이다. 연습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존 레논이 우대되는 것은 땅의 소리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하늘만큼 땅의 소리도 소중한 것 아닌가.”
결국은 존 레논의 키워드는 진실과 지향이다. 꾸민 게 아니라 자신의 실제 현실을 말하고 자기와 주변을 사랑하면서 세상을 노래했다고 할까.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참 세계'를 구축했다. 대중음악은 여기에 의미가 있다. 대중이 먼저가 아니라 아티스트 자신의 표현이 먼저인 것이다.
인기 가수와 톱스타는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지만 자기 세계를 소유한 아티스트는 그다지 없다. 천편일률의 공산품(工産品)이라고 할 요즘 아이돌 그룹의 후크 송을 보라. 올해는 존 레논 탄생 70돌, 사망 30주기가 되는 의미 있는 해다. 이에 맞춰 출시되는 그의 리마스터드 CD들은 비틀스의 위대성과 높이가 같은 존 레논의 위상을 증명해줄 것이다. 밥 딜런이 '20세기의 지성'이라면 존 레논은 그 위에 있는 '20세기의 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