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을 숨긴 채 음반을 낸 사람의 팬이 된다는 것도 어렵거니와, 이제껏 서태지가 시도한 음악적 변신 중 가장 난해하고도 본격적이라 회자되곤 하는 5집
▶ 1990년대, 우리는 서태지를 원해요
1992년 서태지의 데뷔를 설명할 때면 언제나 “혜성같이 등장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 말 그대로, 서태지의 등장은 마치 혜성과도 같았다. '기존에 들어보지 못했던 음악', '기존 체제를 반역하는 통렬한 가사' 덕이 컸지만, 기실 서태지가 당시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력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것이다.
음악계의 변혁은 문화계의 변혁이었고, 의식의 변혁이었다. 서태지의 음악은 사회를 보는 눈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기존의 틀을 깨어 버린 그의 과감한 패션들과 쏟아지는 사회의 화살에 맞서는 그의 자세는 당시 청소년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서태지를 원해요!”라 울부짖는 당시 한 소녀의 발악처럼 서태지는 가려운 곳 긁듯 시원하게, 청소년들의 코드를 바깥으로 내질러줬고, 마찬가지로 청소년들 역시 그들 자신을 대변하기 위해 서태지라는 카드를 내세웠다.
일정 부분 그러한 면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수많은 반항이 '결국엔 정당했다'는 데 있다. 서태지와 그를 지지하는 팬들이 이루어낸 저 사전심의 철폐며 저작권 투쟁을 보라. '정당한 반역'을 보고 자란 세대는 지금, 30대 혹은 40대인 '어른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까지도 서태지에게 열광한다. 그렇다면 서태지 혁명은 거기서 멈추는가. 그 시대를 겪지 못한 나의 역주행은 거기까지이지만, 그를 겪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다.
▶ 나는 백 명의 대중보다 한 명의 마니아를 원한다
앳되던 '어린 왕자'의 모습은 어디 가고 붉은 레게머리에 과격한 액션을 취하던 서태지에게 쏟아지던 비난은 이전의 그 어떤 비난들보다도 강력한 것이었다. 대중이 그에게 등을 돌렸음은 물론, 인디밴드며 여타 대중가수들도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음악적 변신이나 비주얼 변신을 논외로 하더라도 이는 굉장한 변화였다. 더 이상 '서태지 세대'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미 대중이 서태지에게 등을 돌린 상황에서 그들에게 “서태지를 보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그들 내부에 들어온 '신생'들에게는 서태지를 겪을 수 있는 무한한 기회가 주어진다. 사전심의 폐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은퇴를 겪지도 않은 포실한 N세대들은 X세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의 일들을 자기 일 마냥 추억하고 그들의 역사에 감격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서태지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어 행복하다.
▶ 2010, 아직도 우리는 서태지를 원해요
자신의 이름으로 대규모 록페스티벌을 개최하거나 '서태지 심포니'를 통해 거장 톨가 카쉬프와 협연하는 등, 그는 아직도 깨부수고 공정(工程)하며 시도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그가 '아이들'일 때,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끊임없이 깨워온 사회의식들은 그것을 겪은 현대 한국사회의 주역들로 인해 유효하다.
나이를 들먹이기 무색하게, 그를 흡수하는 팬들은 이미 우리 사회를 뿜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이지 않은가. 오래된 팬들이면 오래된 대로, 새로운 팬들은 새로운 대로 수많은 서태지가 창조되고 발견된다.
그런데 서태지 혁명론은 왜 언제나 1집에서 4집까지에만 머무는가. 왜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만이 '혜성 같은 등장'이며, '신선한 충격'인가. 그의 8집 전국투어 '뫼비우스'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팬들은 과연, 저 '어른들'뿐인가.
이젠 '태지 마니아'다. 서태지의 영향력은 그래서 '세대'에 멈추는 것이 아니다. '문화대통령'이라는 오래된 별명답게 그는 대한민국 문화의 패러다임을 뒤집어엎은 장본인이자, 그의 노래 가사 대로 '이젠 너를 통해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회인들의 의식, 그 기저의 깊은 숨소리인 것이다.
글: '태지 마니아' 성지선
사진: 서태지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