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comes the sun'은 애플사가 점점 학교 같이 되어가던 시절에 쓴 곡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애플사에 출근해서 사업가처럼 일해야 했습니다. '여기 서명하시고' '저기에도 서명하세요.' 마치 영국의 겨울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어요. 봄이 올 즈음이 되면 누구나 그럴 겁니다. 그렇게 나는 어느 하루 애플사를 잠시 비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에릭 클랩턴의 집에 놀러갔죠. 그건 구원이자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회사에 나가서 그 바보 같은 회계사들을 만나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그런 다음 나는 에릭의 어쿠스틱 기타를 가지고 정원을 걷다가 'Here comes the sun'을 만들었습니다.” 조지 해리슨, 자서전 < I Me Mine >

“'Here comes the sun'에서 해리슨은 처음으로 자연을 영적 은유로서 사용했다. 이 음악의 산뜻한 분위기는 계절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계시에서 얻은 아티스트의 내적 자각 덕분이다. 이 지점부터 해리슨은 자신의 내면여행이 청중들에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이 자연의 상징들을 자주 쓴다.”
1969년 7월 7일, 조지 해리슨과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가 13번째 녹음 만에 'Here comes the sun'의 리듬 트랙을 완성했다. 존 레논은 교통사고를 당한 직후라 유일하게 이 곡에 참여하지 않았다. 16일에는 박수소리와 하모늄이 오버더빙되고 8월 6일 해리슨이 여러 대의 기타연주를 덧붙였다. 그리고 8월 15일 비올라, 첼로, 바이올린, 더블 베이스, 피콜로, 플루트, 알토 플루트, 클라리넷 등의 오케스트라가 세션에 동원됐으며 그로부터 4일 뒤인 8월 19일 조지 해리슨이 무그 신시사이저 연주를 녹음한 것을 끝으로 노래가 완성되었다. 'Here comes the sun'은 나중 2006년 비틀스의 < 러브 > 앨범에 변형된 'The inner light'('Within you without you' 리듬 포함)와 함께 실렸다.

1969년 8월 1일부터는 비틀스 사상 최상의 하모니를 선사하는 'Because'를 레코딩했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이 탄생시킨 3부 화음이 무척 아름답다. 해리슨은 이 곡에서 하모니 보컬 외에 무그 신시사이저를 녹음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9년 9월 26일 비틀스는 < 애비 로드 >를 출시했다. 언제 들어도 즐겁고 기분 좋은 이 걸작은 마지막으로 녹음된 비틀스 앨범이다. 해체 직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정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강력한 로큰롤과 사랑스러운 발라드, 팝 오케스트라가 골고루 섞여 있는 감성적이고 근사한 음반이며, 수록된 노래 하나하나가 모두 불후의 명작들이다.
한편 1969년 8월 22일 조지 해리슨의 도움으로 애플레코드에서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를 발매한 런던 라다-크리슈나 템플의 크리슈나 신도들은 자신들의 영적 스승인 프라부파다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스승을 모실 장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존 레논이 그들을 도왔다. 레논은 본인이 이번여름에 구입한 티텐허스트 파크 맨션에 신자들이 와서 머물도록 했다. 마침 새 집의 수리를 해야 했던 존 레논은 신도들에게 일손을 보태준다면 숙소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샤마순다르는 그들의 구루데바 역시 같이 묵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말했고 레논은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존 레논의 호의로 각자 흩여져 살던 런던의 크리슈나 신자 15명이 레논의 집으로 한 데 모였다. 새 아내 요코 오노와 지내려고 새롭게 사들인 존의 티텐허스트 집은 총 거대한 저택 하나와 여러 개의 작은 건물들로 구성된 76에이커(약 9만3천 평)의 크기에 대저택이었다(나중에 링고 스타의 소유가 된다). 레논 부부가 메인 빌딩을 썼고 프라부파다의 제자들은 100미터 가량 떨어진 그 근처 4개의 별채로 구성된 하인용 숙소를 사용했다.

1969년 9월 11일 마침내 프라부파다가 신의 사랑을 전하러 런던에 왔다. 프라부파다는 공항서부터 티텐허스트 맨션까지 존 레논이 제공한 흰색 롤스로이스 리무진을 타고 편안한 여행을 즐겼다. 프라부파다를 기다려온 조지 해리슨도 포르쉐를 타고 티텐허스트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늘 함께 했던 아내 패티 없이 혼자였다. 문 앞에서 만난 조지와 존, 요코는 프라부파다를 보러 별채로 이동했다. 프라부파다는 조지 해리슨을 보자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화환을 그에게 전해줬다. 꽃다발을 받아 목에 건 해리슨은 “고맙습니다. 하레 크리슈나”라며 감사의 뜻을 표했고 프라부파다는 “이 화환은 크리슈나의 축복입니다.”라고 신의 가호를 빌어주었다. 그것이 해리슨과 프라부파다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이 자리에서 프라부파다는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 요코 오노에게 약 50분 동안 크리슈나와 '크리슈나 의식(意識)', < 바가바드 기타 >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만약 이러한 철학이 마음에 든다면 이해해보도록 노력해보고 그 다음 받아들여보라고 제안했다. 그 뒤로는 20여 분간 요코와 존을 중심으로 명상과 만트라(진언, 주문) 등에 대한 질문과 프라부파다의 답변이 이어졌다. 그 당시 대화를 조금만 우리말로 옮겨본다. 실제 녹취파일은 아래 링크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http://krishna.org/george-harrison-john-lennon-and-yoko-ono-from-the-beatles-talk-with-srila-prabhupada-mp3-audio
프라부파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철학을 따르시는지요?
존 레논: 따르는 철학이요?
요코 오노: 우리는 어떠한 것도 따르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일 뿐이에요.
조지 해리슨: 우리는 명상을 해왔습니다. 아니면 저 혼자 해왔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명상, 만트라 메디테이션을 해오고 있습니다.
프라부파다: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 또한 만트라입니다.
존 레논: 하지만 노래는 아니지요.
조지 해리슨: 아니, 찬팅(Chanting)입니다.
존 레논: 우리는 마하리시에게 만트라를 받았어요. 각자 하나씩요.
프라부파다: 마하라시의 만트라는 잘 알려진 것이 아닌가요?
조지 해리슨: 아니에요. 소리 내어 외우지 않았어요.
존 레논: 네, 아닙니다. 아주 비밀스러운 것이지요. (웃음)

요코 오노: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가 그렇게 강력하고 효과적인 만트라라면 그밖에 또 다른 것들을 부를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가령 당신께서 말씀하신 노래들이라든지 다른 만트라들 말이지요. 그렇다면 다른 노래나 만트라를 암송하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프라부파다: 아니, 이러저러한 만트라를 노래해도 됩니다. 하지만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는 특별히 이 시대에 추천하는 주문(呪文)입니다. 물론 다른 베딕 만트라들도 권위가 있고 암송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 찬팅(chanting)은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진언(眞言)입니다. 이는 < 브라흐만다 푸라나 >, < 칼리-산타라나 우파니샤드 >, < 아그니 푸라나 > 등 여러 베딕 문헌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외에도 차이타니아 마하프라부는 이 만트라를 전했습니다. 하레 크리슈나 하레 크리슈나 크리슈나 크리슈나….
이야기를 다 마친 프라부파다는 존과 조지, 요코에게 신에게 먼저 바친 음식 '프라사담'을 나누어주고 모두 함께 그 성스런 음식을 먹었다. 그 뒤로 조지 해리슨은 박티요가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프라부파다를 자주 찾으며 그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조지 해리슨은 1982년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크리슈나 신도인 무쿤다 고스와미와의 인터뷰에서 프라부파다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프라부파다를 처음 봤을 때는 나는 그를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때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프라부파다 덕분에 하레 크리슈나 만트라가 지난 16년 동안에 그렇게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는 것을요.”
그 무렵 비틀스는 서서히 종말에 다다르고 있었다. 존 레논은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해 1969년 9월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데뷔 콘서트까지 열었다. 그리곤 곧 플라스틱 오노 밴드의 이름으로 'Cold Turkey'란 곡을 녹음했다. 또 링고 스타는 프로듀서 조지 마틴과 함께 1969년 10월 27일 솔로 앨범 < 센티멘털 저니 > 작업에 착수했고 배우로서 영화 < 더 매직 크리스천 > 촬영도 시작했다. 비틀스보다는 하레 크리슈나 신도들과 보다 많이 어울려 지내던 조지 해리슨은 빌리 프레스턴과 같이 1969년 12월 그가 좋아했던 딜레이니 앤 보니 밴드(Delaney and Bonnie Band)의 유럽투어에 참여했다. 반면 폴 매카트니는 아내 린다와 함께 스코틀랜드 북서부 킨타이어 뮬(Mull of Kintyre)의 농장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비틀스의 일대기는 막을 내렸다. 어찌됐든 조지 해리슨은 마침내 자신의 음악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에게 비틀스는 분명히 놀라운 경험이었으나 그만 독립해서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자신만의 날개를 펴야했다. 조용한 비틀? 투명인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만 기억하는 XXX 세상? 실은 그렇지 않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비틀스의 알파와 오메가였다면 조지 해리슨은 비틀스의 영혼이자 정신이었다. 이제 그 거대 그룹에서 벗어난 솔로 아티스트 조지 해리슨의 시대가 개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