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로 그를 애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존 레논)
“우리는 브라이언을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많은 것을 빚졌습니다.” (링고 스타)
“그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비틀스에 바쳤습니다. 우리는 그를 좋아했고 사랑했습니다.” (조지 해리슨)
브라이언 엡스타인(1934-1967)은 비틀스의 매니저로 그들을 발굴하고 키워주고 돌봐주고 가르쳐준 그룹의 친구이자 최고의 은인이었다. 명백히 그때까지 비틀스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1966년 8월 캔들스틱 파크 이후 밴드가 투어를 포기하고 스튜디오 실험에 매달리면서 그의 역할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런데다가 비틀스가 1967년 만료되는 자신의 매니저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까봐 두려움을 느꼈다.
이에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수면제와 진정제와 같은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에 비례해 사용량과 복용기간은 점차 증가했고 비틀스가 명상수업을 받으러 뱅거로 떠난 사이 결국 사고가 터진 것이다. 갑작스런 엡스타인의 죽음에 패닉 상태가 된 그룹은 영적 스승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에게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마하리시는 슬픔에 빠진 비틀스에게 인간은 영원한 영적 존재라는 베다의 지혜를 말했다.
“비탄에 젖어 너무 우울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강인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브라이언을 계속 붙잡고 있으면 그의 영혼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를 사랑한다면 이제 그 갈 길로 그를 놔주십시오. 그의 영혼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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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은 그저 바로 옆 단계로 넘어갔을 뿐입니다. 그의 영혼이 지금 이곳에 있고 앞으로도 언제까지고 존재할 것입니다.” (존 레논)
“죽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죽음은 오직 육체적 관념입니다. 브라이언이 괜찮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편안합니다.” (조지 해리슨)
이 일을 계기로 이후 비틀스는 정신적으로 더욱 더 마하리시에게 의존하게 된다. 거의 동시에 일어났던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의 등장과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은 이제 브라이언 대신 마하리시가 그룹을 돌본다는 상징적인 의미로까지 발전한다.
“우리가 명상에 막 심취하던 바로 그때에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었습니다.” (조지 해리슨)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숨진 뒤 비틀스는 사업과 재정 등 그전까지 그들이 전해 해보지 않았던 업무를 떠맡아야 했다. 그룹 일을 누가 경영하느냐 하는 문제로 인해 커다란 혼란이 일었고 이를 해결하려고 폴 매카트니가 전면에 나섰다. 매카트니의 주도로 비틀스는 예정했던 인도방문을 잠시 미루고 TV영화 <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 Magical Mystery Tour >를 먼저 제작하기로 했다. 1967년 9월 5일 밴드는 사운드트랙 작업을 시작해서 이틀째인 6일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Blue Jay Way'를 녹음했다.
9월 11일부터 비틀스가 버스를 타고 영화촬영을 떠난 2주 동안, 조지 해리슨의 마음은 전혀 딴 곳에 있었으며 본인의 촬영분 외에는 방에서 꼼짝 안했다. 한편 10월 4일 조지 해리슨은 존 레논과 함께 데이빗 프로스트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해 초월명상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12월 5일에도 역시 조지는 존과 애플 부티크 개업 파티에 참석해 사과와 애플주스를 나눠주면서 애플 숍을 홍보했다.
1968년 1월 7일, 조지 해리슨은 비틀스의 첫 솔로 프로젝트였던 앨범 < 원더월 뮤직 Wonderwall Music >을 녹음하러 인도 봄베이로 날아갔다. 그 음반은 제인 버킨 주연의 사이키델릭 영화 < 원더월 >의 사운드트랙이었으며 거의가 인도음악으로 장식된 작품이었다. 특이한 점은 해리슨이 여기서 아무런 작곡이나 연주도 하지 않고 제작만 했다는 것. 9일부터 13일까지 이어진 레코딩 기간 동안 그는 온전히 인도음악가들에게 모든 스코어를 맡겼다(그밖에 런던에서는 에릭 클랩튼과 링고 스타도 녹음에 참여했다).
그 대신 세션 도중 조지 해리슨은 'The inner light'라는 곡을 썼다. 'Love you to'와 'Within you without you'에 이은 조지의 인도음악 3부작의 완결편인 이 작품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함께 사로드, 시타르, 반수리, 셰나이, 파카바즈, 하모늄, 에스라지 등 여러 종류의 인도악기가 쓰여 그 어떤 곡보다 인도향기를 짙게 풍겼다. 다른 비틀스 멤버들은 이 노래를 높이 평가했고 'The inner light'는 1968년 3월 'Lady Madonna'의 B면 싱글로 발매됐다. 해리슨의 작곡으로는 최초의 비틀스 싱글 커트 넘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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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와 함께 후안 마스카로는 자신이 < 도덕경 >을 번역한 책 < Lamps Of Fire > 한권을 같이 보내면서 그 가운데 한 구절을 음악으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The inner light'라는 제목을 단 48장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었다. 조지 해리슨은 이 편지와 선물을 받고 무척 기뻐했고 교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 시구를 기반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Without going out of my door / I can know all things on earth / Without looking out of my window / I can know the ways of heaven / For the further one travels / The less one knows”
1968년 2월, 비틀스는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에게 초월명상을 배우러 인도 리시케시로 향했다. 이 세기의 방문을 맞이해 전세계 프레스들이 인도북부 델리와 리시케시로 총집결했다. 기본적으로 명상이 목적이었지만 수많은 팬들이 밴드를 따라하는 상황 속에서 비틀스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쳐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들은 10대 청소년들이 자신들을 본받아 약물을 끊고 명상에 몰두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리시케시에서의 명상학회야말로 그 절호의 기회였다.
젊은이들의 약물 사용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꼈던 조지 해리슨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렇게 말했다.
“엘에스디(LSD)는 궁극적인 답이 아닙니다. 엘에스디는 깨달음을 주지 않습니다. 엘에스디는 어쩌면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새로운 가능성들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엘에스디는 진짜 답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명상이나 요가, 정신적인 수양 같은) 보다 진지한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조지 해리슨)
1968년 2월 16일 조지 해리슨과 패티는 존 레논, 신시아 부부와 함께 먼저 인도에 왔고 폴 매카트니와 그의 연인 제인 에셔, 링고 스타와 부인 모린은 사흘 뒤인 2월 19일 도착했다. 미국 배우 미아 패로와 그녀의 여동생 프루던스, 비치 보이스의 마이크 러브, 영국 포크 가수 도노반도 리시케시에 동행했다. 거대 패밀리였던 이들은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두 달 동안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가 운영하는 아슈람(수행자 공동체)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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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리시케시에 남은 조지 해리슨과 존 레논은 누가 더 오래하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하루에도 몇 시간씩 명상에 열중했다. 과정이 심화함에 따라 명상코스는 리시케시에서 카슈미르로 장소를 이동해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조지와 존은 카슈미르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존 레논은 최근 알게 된 요코 오노를 보러 런던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고, 2년 전 카슈미르에 다녀온 바 있는 조지 해리슨은 다큐멘터리 영화 < 라가 >를 촬영 중이던 라비 샹카르를 만나러 남인도로 가려고 했다.
이즈음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를 둘러싼 좋지 못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마하리시가 미아 패로에게 성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는 루머였다. 안 그래도 요코 오노를 빨리 만나고 싶어서 아슈람을 벗어날 구실을 찾고 있었던 존 레논은 조지 해리슨과 함께 마하리시를 찾아가 떠난다고 말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마하리시와 존 레논 사이에 긴장된 분위기가 연출됐고 열 받은 존 레논은 떠나는 길에 'Sexy Sadie'라는 곡을 써서 마하리시를 비꼬았다.
그렇지만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는 '섹시 새디'가 아니었다. 미아 패로를 어찌 해보려 했다는 헛소문은 마하리시에 비틀스가 너무 깊숙이 빠져드는 것을 경계한 알렉시스 마르다스(나중 애플 일렉트로닉스의 책임자가 됨)가 꾸며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머지않아 존 레논은 판단 착오였다며 실수를 인정했으며, 폴 매카트니 또한 아니라고 말했다. 끝까지 마하리시를 지지하고 따랐던 조지 해리슨은 나중에 마하리시를 찾아 어렸을 적 자신들의 철없던 행동에 대해 사죄했다.
2008년 2월 5일,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는 네덜란드에 있는 자택에서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폴 매카트니는 성명을 통해 “마하리시에 대한 내 기억은 즐거웠던 것들뿐입니다. … 나는 그 분을 그리워할 것이며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추모했다. 또 링고 스타는 “마하리시는 내가 평생 만나 본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 나는 언제나 마하리시의 즐거움에 감명 받았으며 그 분은 당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라며 조의를 표했다.
2009년 4월 4일, 미국 뉴욕의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는 살아있는 비틀스의 두 멤버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의 공연이 열렸다. 데이빗 린치 재단이 주최한 < 변화는 내부로부터 >라는 타이틀의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에서였는데, 데이빗 린치 재단은 전세계 학생들에게 초월명상을 교육해 평화롭고 창의적인 세상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2005년에 설립한 재단이다. 폴과 링고가 40년 전에 이어 다시 한번 젊은이들에 초월명상 보급을 위해 나선 것이다. 이 역사적인 공연현장에는 1968년 비틀스의 리시케시 명상여행과 그들의 구루였던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를 추억하는 자리도 마련되어 그 뜻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