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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제트 여객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내린 조지와 패티는 라디오방송국을 거쳐 헤이트-애시버리 거리에 도착했다. 패티의 동생 제니와 비틀스의 로드 매니저 닐 아스피널, 밴드의 홍보 담당자 데렉 테일러, 그리고 얼마 전 존 레논을 통해 알게 된 그리스 출신의 '괴짜' 알렉스 마르다스도 이 사이키델릭 성지순례에 동참했다. 이들은 관광객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헤이트-애시버리 구석구석을 다녔다. 그렇지만 결코 이곳이 '사랑과 평화'의 이상적인 낙원이 아님을 금방 깨닫게 된다.
1967년 6월 1일 발매된 비틀스의 앨범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는 시대정신을 관통한 걸작으로 모든 지구촌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헤이트-애시버리의 히피족에게는 인생의 지침서와도 같이 높이 받들어졌다. 그런 그들이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불과 잠깐 사이 해리슨 일행 주위에 수십,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조지를 외치며 몰려들었다. 이 히피들은 그러나 하나 같이 공포를 느낄 만큼 약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폐인들이었다.
“우리는 해이트-애시버리를 아주 특별하고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만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름끼칠 정도로 너무나 끔찍했어요. 정신줄 놓은 인생낙오자들과 부랑아들, 그리고 아직 여드름도 가시지 않은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두들 약에 취한 듯 보였어요.” (패티 보이드)
“헤이트-애시버리에서 봤던 것들은 우리 눈을 번쩍 뜨이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길에서 아무렇게나 자고 있었고 각종 약물을 복용했어요. 개중에는 엘에스디보다 10배는 더 강력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 그들에게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측면이란 아무것도 없었어요.” (패티 보이드)
패티와 마찬가지로 조지 해리슨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곳을 근사한 장소로 기대했습니다. 작은 작업실에서 예술작품과 미술품, 조각 등을 만드는 멋진 집시들이 모여 있을 줄 알았지요. 그러나 헤이트-애시버리는 마약에 찌든 10대 중퇴자들로 넘쳐났습니다. 이러한 소름끼치는 광경은 나로 하여금 그 약물 씬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조지 해리슨)
“그날 헤이트-애시버리는 내게 약물 문화 안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영적인 자각이나 예술적 심미안이 아니었어요. 알코올 중독이나 그 어떤 중독과도 같았습니다. 헤이트-애시버리의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 그곳에 와서 노숙을 했습니다. 술 대신 그들은 온갖 종류의 마약을 했어요.” (조지 해리슨)
이때까지 조지 해리슨에게 엘에스디는 깊숙한 무의식의 세계까지 의식을 확장시켜주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조지는 그 환각제를 만난 뒤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고 사물을 보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러나 헤이트-애시버리에서 약물의 폐해를 정면으로 목격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드럭 컬처에 환멸을 느꼈고 애시드 여행을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또 비틀스가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처음으로 깨달았으며 그 영향력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원했다.
“나는 메시아처럼 대접받았습니다. (그들에게) 비틀스는 상당히 거대했고, 비틀스 중에 한 명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조지 해리슨)
다음날 런던으로 귀국한 조지와 패티는 당장에 엘에스디를 끊었다. 대신 그들은 명상과 만트라를 찾았다.
만트라(Mantra)란 신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 신성한 음절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어 '만man(mind)'과 '트라야traya(liberation)'의 합성어로서 사전적인 의미로는 '정신의 해방'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진언(眞言)이며, 보통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이 만트라를 되풀이해서 외우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조지 해리슨은 바로 그 만트라 암송과 명상을 통해 약물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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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는 약물에 반대했다. 그는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명상을 통해 인간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으며 더 강력하고 자연스러운 황홀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지 해리슨과 패티, 존 레논, 폴 매카트니는 이 점에 특별히 끌렸다. 마하리시의 철학에 깊은 감명을 얻은 비틀스는 그의 초대를 받아들여 이틀 뒤인 8월 26일부터 웨일스 뱅거에서 개최될 열흘짜리 명상학회에 가기로 했다.
“마하리시는 뱅거에서 세미나를 갖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오세요. 그러면 내가 명상하는 방법을 보여주겠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우리는 기차를 타고 그곳에 갔습니다.” (조지 해리슨)
“정말 감동 받았습니다. 마하리시는 늘 웃고 있었어요. 처음 봤을 때 그 모습에 깊은 감명을 얻었습니다. 이 분은 지금 진짜 행복한 상태이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또한 명상을 시작했고 각자 만트라를 전수 받았어요.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최초로 동양철학에 빠져들었던 때였고 그것은 또 하나의 돌파구였습니다.” (링고 스타)
전 세계에 초월명상을 전파한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는 마헤시 프라사드 바르마(Mahesh Prasad Varma)라는 이름으로 1918년에 인도 라이푸르에서 태어났다. 알라바하드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뒤 평범하게 지내던 그는 20대 후반 스승 구루 데브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구루 데브를 따라 히말라야로 들어가 13년 동안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수행했고 수천 년 동안 은밀하게 전해진 의식개발법을 전수받았다. 그것이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이었다.
초월명상이란 아침, 저녁 20분씩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만트라를 외우는 간단한 명상법이다. 마하리시는 이렇게 하루 두 차례의 명상만으로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고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설파했다. 초월명상은 짧은 시간에 배울 수 있으며 쉽게 실천할 수 있어서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컬트의 제왕'으로 명성이 높은 미국 영화감독 데이빗 린치는 3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초월명상을 수행해온 대표적인 신봉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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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8월 25일, 비틀스는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와 함께 뱅거행 기차 '미스티컬 스페셜'에 올라탔다. 이번 명상여행에는 패티의 동생 제니와 존 폴 매카트니의 약혼녀였던 제인 애셔, 그리고 믹 재거와 마리안느 페이스풀, 도노반도 동행했다. 다만 존 레논의 아내였던 신시아는 기차역까지 같이 왔지만 혼잡함 속에서 기차를 놓치는 불운을 맞았고, 언제나 이들을 책임졌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도 나중에 합류하기로 하고 오지 않았다.
비틀스 일행은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의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교실에 마련된 합숙방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인 8월 26일 토요일, 이들은 첫 수업을 시작했다. 모두들 자리에 앉아 마하리시의 초월명상법 강연을 경청했다. 이어 마하시리로부터 하나씩 개인적인 만트라까지 얻은 멤버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가 그날 배운 명상을 시도했다. 잡념을 떨쳐내도록 만트라를 되풀이해 암송하며 명상에 집중했다. 당시 그들이 터득한 명상 방법은 이랬다.
“앉아서 마음이 가는대로 그냥 둡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상관없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세요. 그런 다음 만트라를 시작합니다.” (존 레논)
“명상을 위해 앉아서 만트라를 외우지만 다른 생각들 또한 계속 생겨났습니다. … '빌어먹을, 우리 다음 음반은 어떻게 될까? 앗, 그만, 그만, 그만'. 이렇게 처음 며칠동안은 잡념을 몰아내는 데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괜찮았어요. 나는 드디어 올바르게 명상하는 법을 알아냈습니다.” (폴 매카트니)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다시 그 생각을 만트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조지 해리슨)
뱅거에서 비틀스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들이 명상에 심취했음을 밝히고 약물도 끊었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꼭 마하리시의 가르침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지 해리슨은 물론이고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도 약물을 그만 두려는 차에 우연히 마하리시와 만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밴드는 명상과 약물 복용 중단에 대한 본인들의 강한 의지를 만방에 천명했다. 이들은 이미 그 결정 하나가 미칠 막대한 영향력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평화롭게 명상에 빠져있던 비틀스에게 갑자기 재앙이 닥쳤다. 뱅거에 도착한지 사흘째이던 1967년 8월 27일 월요일,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부고가 전해졌다. 마하리시의 명상학회에 조금 늦게 오기로 했던 엡스타인은 이날 아침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술과 함께 수면제, 항울제 등 약물을 과다 복용한 탓이었다.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비극에 그룹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