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어느 날, 짧은 머리에 짙어 보이는 화장, 긴 드레스를 입은 여가수가 TV 가요프로그램(가요 Top 10)에 출연했다. 일그러지는 표정으로 한 곡을 부르고 별다른 말없이 내려간 그녀는 그날의 1위 후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도 마찬가지로 가수에게 있어 TV출연은 무조건 따야만 하는 홍보수단이었다.
앞 다투어 출연을 잡고 부지런히 활동해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는 치열한 가요계, 더군다나 여가수들의 파워가 턱없이 부족했던 당시 이소라는 라디오 플레이만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대중들의 '귀'가 노래를 찾아낸 것이다. 참 잘 나가던 가요계였다. 정상의 자리에 서 있는 가수는 100만장을 그냥 팔아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김현철과의 듀엣곡 '그대안의 블루'의 인지도로, 그저 슬픈 노래를 찾는 20대의 힘만으로 그녀 역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고 보기엔 힘들다. 그렇다면 또 다른 힘은 무엇일까.
'난 행복해'의 폭발적인 인기는 같은 앨범의 '처음 느낌 그대로'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해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발표한 2집 < 영화에서처럼 >에선 '기억해줘', '청혼' 등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1990년대 가요계에 그녀의 존재는 뚜렷한 윤곽을 잡게 된다. 그 후 2년마다 1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꾸준히 사랑의 단편들을 짚어왔지만 그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3집에서 슬픔은 분노로 치달아 앨범의 반이 넘는 곡들이 파격적인 변신을 보였고, 때문에 팬들은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4집에서는 약간 밝아진 톤에 시선을 맞춰야 했으며 5집에서 한 번 더 들 뜬 마음을 잡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2년 뒤인 2004년, 6집 < 눈썹달 >이 나왔다.
어느 곳으로 이사를 가든지 보통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게 된다. 낯선 동네에 대한 설렘도 있으려니와 길을 잃을 때를 대비해 주위의 풍경을 눈에 두기 위함이다. < 눈썹달 >은 이제 막 동네 한 바퀴를 빙 돌고 제자리에 돌아온 (이방인의) 안도감이 배인 앨범이다. 총 11곡에 걸쳐 이별을 겪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늘어놓았는데 크게 세 개의 맥락으로 나뉜다. 헤어진 후 겪어야하는 쓰라림, 가슴에 스치는 그리움, 마지막으로 다시금 원점을 향하는 에필로그.
일기예보 출신이지만 러브홀릭으로 더 유명한 강현민의 곡, 'tears'와 'Midnightblue'가 앨범의 문을 장식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첫 곡이 발라드가 아닌 모던 록이 된 것도 당연한 일. 이어지는 두 곡은 앨범이 그리는 가장 높은 곡선에 이른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바람이 분다'에서 그녀는 분노는 삼키고 슬픔은 걸러냈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는 가사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남 얘기하듯 한 편의 소설을 읽어내려 가듯 덤덤하게 내뱉는 말투는 그렇기에 더욱 와 닿는다.
뒤를 잇는 타이틀곡 '이제 그만'에서는 다시 얼굴을 바꿔 처절하리만큼 울부짖는다. 누구나 일기에 한 번 쯤 끼적여봤던 말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바닥까지 무너져 내린다. 가장 쉽지만 막상 하기는 어려운 양면의 표출이기에 이 두곡은 크게 사랑받았다. 여기까지 작곡가별로 곡을 묶어서 나열하다시피 한 진행은 평범하다 할 순 없으나 이별의 순차적 흐름이라는 테마로 본다면 더 없이 적합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덧 곡은 짙은 그리움의 길로 접어들었다. 델리 스파이스 혹은 스위트피로 알려진 김민규가 작곡한 '별' 과 '듄' 이다. 5집에서는 밝고 아기자기한 '첫사랑'과 '데이트'로 멜로디 메이커 역할을 소화해냈지만 이번엔 스스로의 최면에 빠져 기억의 메아리 속을 부유하는 이의 모습을 표현해냈다.
앨범은 중반부를 넘어 한 숨 쉬어간다. 수록곡 중 가장 빠른 비트를 지닌 '쓸쓸', 미디엄 템포의 모던록 '아로새기다'를 지나가면 생뚱맞게도 일렉트로니카를 연상시키는 도입부가 나오는데 당황스러움도 잠시, 이내 재지(Jazzy)한 전주가 펼쳐진다. 시나위의 신대철이 만든 'fortuneteller'로 느긋한 비트와 끈적이는 보컬이 섞인 블루스는 오랜만에 반가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과 같은 이름의 열 번째 곡, 'siren(세이렌)'은 가사 없이 허밍으로만 채워졌다. '세이렌은 감미로운 노래로 지나가는 배의 선원들을 유혹한다'는 신화의 내용과도 같은 설정이다. 마침내 '봄'이 오고 이 곡으로 앨범은 실질적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다. 에필로그로 칭한 마지막 곡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쓰라림과 그리움 두 파트를 모두 아우르는 현실로의 복귀를 나타낸다. 결국 누구도 이별을 이기지 못하며 사랑 역시 끊을 수 없다는 진실을 늦은 밤 두 여인의 전화통화 형식을 빌려 보여주고 있다.
어찌 보면 진부하고 터무니없이 구차한 사랑이야기, 표현할 것조차 없다 여겨졌던 사소한 감정들을 이소라는 모두에게 이것이 당신 스스로의,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겪어 나가는 일들은 절대 영화처럼 화려하거나 아름다울 수 없다. 꾸밈없이 빚어내는 한 줄 한 줄의 가사와 가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숨어있는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진지한 자세로 감정을 살피는 그녀이기에 가능하다. < 눈썹달 >은 눈물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녀리지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어깨 같은 앨범으로 남게 될 것이다.
- 수록곡 -
1. tears (작사: 이소라 / 작곡: 강현민 / 편곡: 강현민)

2. Midnightblue (이소라 / 강현민 / 강현민)
3. 바람이 분다 (이소라/ 이승환(The story), 이병준 / 이승환(The story), 이병준)

4. 이제 그만 (이소라/ 이승환(The story), 이병준 / 이승환(The story), 이병준)

5. 별 (이소라/ Sweetpea / Sweetpea)
6. 듄 (이소라/ Sweetpea / Sweetpea)
7. 쓸쓸 (이소라/ 정지찬 / 정지찬)
8. 아로새기다 (이소라/ 이한철, 옥정용 / 이한철, 옥정용)
9. fortuneteller (이소라/ 신대철 / 신대철)

10. siren (작곡: 정재형 / 편곡: 정재형)
11. 봄 (이소라/ Kazuto Miura / 김현철)
12. 시시콜콜한 이야기 (이소라, 조규찬 / 이한철 / 이한철)
프로듀서: 이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