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015B 1집 객원가수로 데뷔
1991년-1992년 MBC 라디오 <우리는 하이틴> 진행
1992년-1996년 SBS 라디오 <기쁜 우리 젊은 날> 진행
2003년-현재 MBC FM <2시의 데이트> 진행
초등학교 3-4학년 때는 존 덴버(John Denver)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와 같은 팝송 가사를 한글로 받아 적어 부르기도 했지만 경청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래도 사춘기에 들었던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레드 제플린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이 곡을 좋아했다고 하는 게 맞는데, 이 곡은 한마디로 이전에 들었던 가요와는 통째로 달랐다. 비록 멋지다고 생각한 친구나 교회 형이 좋아하는 곡이라서 따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음악청취 방향을 바꿔놓았으며 이 곡 때문에 통기타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쭉 지나보니 난 '록'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 용량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소프트한 포크나 가요가 체질임을 알았다. 중학교 3학년 때와 고교(대원외고) 1학년 때 나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든 팝 그룹 시카고(Chicago)의 16집과 17집과 만나면서는 더 그랬다. 결정적인 곡은 'Hard habit to break'와 'Will you still love me?' 2곡이었다.
고교 때 '터보'라는 헤비메탈 밴드에서 보컬을 하게 되면서 그러한 나의 맘 속 취향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당시는 유일한 팝 정보지인 <월간팝송>을 보면서 팝 상식을 나열해야 팬 축에 끼었고 당장 메탈 밴드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마음은 시카고인데 하고 있었던 음악은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Breaking the law', 'Electric eye' 아니면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과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과 같은 강성(强性)의 음악들이었다.
강성 메탈이 아니면 취급도 하지 않았다. 일례로 'Holiday'와 'Still loving you'의 스코르피언스(Scorpions)는 소프트하고 멜로디가 좋다는 이유로 꺼렸으니까. 물론 커서는 스코르피온스의 대부분 곡을 쓴 루돌프 솅커(Rudolf Schenker)와 클라우스 마이네(Klaus Meine)가 훌륭한 작곡가라는 것을 알았다. 상당 기간 혼자서는 시카고를 듣고, 친구들끼리는 메탈 빅3(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 오지 오스본)에 시간을 바치는 '괴리'가 계속되었다.
헤비메탈을 하면서도 난 거기에 본격적으로 빠지기보다는 대중적 감각을 더 중히 여기곤 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면...' 하는 생각에 한 장르에 침잠하는 게 아니라 이 음악 저 음악 두루두루 훑었던 것이다. 마니아로 흐를 것 같으면 즉시 거기서 빠져나왔다. 이러한 '대중전선'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라디오프로 <황인용의 영 팝스>였다. 록 마니아들은 소프트하다고 꺼렸지만 난 거기 나오는 음악들이 감기는 맛이 있어서 몰래몰래 열심히 들었다. 물론 친구들한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난 '라디오키드'가 되어갔다.
그때 라디오에서 들었던 시카고나 알이오 스피드웨건(REO Speedwagon)이 결국은 내게 영향을 미쳤다. 물론 멜로디와 보컬의 측면에서였다. 이 그룹의 보컬인 피터 세테라(Peter Cetera)나 케빈 크로닌(Kevin Cronin)이 훌륭한 보컬이라는 것을 나도 프로페셔널 가수가 되어서 알았다. 그러고 보면 직업가수가 된 후 무시하는 뮤지션은 없어진 것 같다. 음악의 영역에서 종사하는 사람은 다 인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대가들의 음악은 무조건 좋다는 것을. 자신이 맘에 들어 하지 않는 장르라도 대가의 음악은 감동을 준다. 트로트의 경우 '배호'를 보라. 에릭 클랩튼(Eric Clapton)만 하더라도 'Layla' 'let it grow' 'Change the world'는 누구나 좋아하지 않는가. 나 역시 이 곡들을 현재 진행하고 있는 <2시의 데이트>에서 자주 틀곤 한다. 언제 들어도 참 좋다.
시카고와 함께 몰래 들었던 음악 중 하나가 빌리 조엘(Billy Joel)이다. 특히 초창기인 1978년 앨범 < The Stranger >는 기념비적이다. 잊을 수 없는 곡은 'She's always a woman'이고 다음 앨범 < 52nd Street >에 수록된 'Rosalinda's eyes'도 좋아했으며 지금도 'Big shot'은 프로그램에서 자주 선곡한다. 나중 곡으로는 'Leave a tender moment alone'이 가장 맘에 든다. 그런데 같은 피아노 도사인 엘튼 존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엘튼 존 팬들과 자주 부딪쳤던 기억이 난다. 비슷한 시기에 'Kiss on my list'의 홀 앤 오츠(Hall & Oates)는 너무 쉽게 음악을 해서 좋아했다. 실제로는 쉽지 않은 음악인데 쉽게 들린다는 것,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고수 아닐까.
결론을 내자면 '이지 리스닝 이즈 베스트(Easy listening is best)!'다. 나와 내 음악의 역할은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음악은 대중적이어야 한다. 일단 음악은 즐기는 것이지, 설명이나 분석, 비평 그리고 학술은 그 다음이다. '듣다보면 좋아져!'라는 설득은 싫고 '들어서 좋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 음악으로는 이문세의 전성기 히트 곡 전부를 쓴 이영훈의 멜로디가 날 사로잡았다. 이 분은 클래시컬하면서도 누구나 좋아할 요소를 가진 선율을 썼다. 고3 때인 1987년 가을에 접한 고(故) 유재하도 빼놓을 수 없다. 화성도 멜로디도 그렇고 내 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꼭 언급하고 싶은 뮤지션이 편곡의 측면에서 최고의 테크니션이라고 할 고 김명곤이다. 난 그와 같은 건반주자 출신 작곡자와 더불어 1980년 후반부터 우리 가요가 예뻐졌다고 본다. 그 음악들은 10대와 20대 여성 라디오 청취자들을 귀로 자극했다. 마치 여성한테 주는 팬시 같은 선물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대중들이 라디오와 음반시장에 참여했고 그러면서 음반업계가 호황을 맞게 된 것이다.
음반으로서는 '동네' '춘천 가는 기차'가 있는 김현철의 1집이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나와 동갑내기인 그는 분명 그때 당시 음악적 리더였다. '가을이 오면' '굿바이'가 수록된 이문세의 4집, 이영훈과 김명곤이 크게 공헌한 이 앨범은 이지 리스닝의 결정체이자 나의 큰 계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떨결에가 아닌 공식적으로 발라드음악을 함에 있어서 바탕이 된 나의 재산과 같은 작품이다. 이때부터 아까 말한 음반업계의 호황이 시작되었다. 다시 그 시절, 열심히 라디오를 듣고 좋아하는 음반을 사는 그 시절이 돌아왔으면 한다. 뮤지션이 좋은 음악을 하는 한,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