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생으로 서른여덟의 중견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첫 앨범을 낸지 어느덧 17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은 그의 처녀작 '춘천 가는 기차'나 '동네'의 신선한 쇼크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놀랍다. 이른 아침에 여전히 떠있는 별처럼 은은하게 1989년 음악계에 홀연히 나타난 이래 김현철은 가수로서, 작곡가로서, 프로듀서로서 음악계의 중심에서 정점의 광채를 만끽해왔다.
관록을 쌓으면서 대중의 환호와 갈채도 함께 누린, 국내에서 사례를 쉬 찾기 어려운 뮤지션인 것이다. 지금은 뜸해졌지만 한때 그를 향한 수식 중에는 '재즈를 대중화시킨 젊은 거장'이란 찬사도 있었다. 판에 박힌 멜로디와 애절한 정서가 전부이던 우리 가요가 재즈의 아취를 풍기게 된 것은 김현철의 공로임에 분명하다.
그는 지금도 걸맞은 활동 보폭을 유지하고 있다. 벌써 2장의 앨범을 내면서 동요 대신 '키즈 팝'으로 어린이의 대중음악 장르를 대체하려는 노력을 비롯해 얼마 전 창작 뮤지컬 <더 플레이>의 작곡을 맡아 뮤지컬 분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여전한 뉴스 피플. 여러 가수의 앨범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지만 그래도 팬들은 2002년 봄에 발표한 <...그리고 김현철> 이후 감감무소식인 새 독집을 기다린다. 일단 올해 중에 나올 것으로 알려진 신보는 통산 9집이 된다. 이에 앞서 그는 거미와 호흡을 맞춘 싱글 '우리 이제 어떻게 하나요'를 막 내놓았다.
지난 1994년 MBC FM <김현철의 디스크쇼>에 게스트로 출연하던 시절부터 면식을 쌓아온 사이지만 어쩌다보니 공식 인터뷰와는 인연이 없었다. 가끔 방송국에서 우연히 부딪치게 되면 그는 “한번 만나 긴 대화를 나눠야 되는데...”라고 되뇌곤 했다. 막상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반가웠는지 만나자마자 특유의 호쾌한 대소(大笑)를 지었다.
그는 현재 구상중인 새 앨범, 자신의 음악관을 위시해서 결혼과 현실 등 공사를 막론하고 생활 전반에 대해 기탄없이 털어놓았다. “오늘 아는 분하고 자리하니까 얘기도 다르고 말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는 새 앨범이 나온다면 유부남이 된 뒤 첫 앨범이라면서 총각 때와 여러모로 상황이 달라 표현지점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신보는 언제쯤 내는 건가. 현재 만들고는 있는지.
안 내면 내 인생 상 곤란해요. 너무 오랫동안 독집을 내지 않았죠. 올해 안으로는 완성하려고 하는데, 현재 6곡 정도는 써놓았어요. 하지만 작업이 쉬 달려가지는 않습니다.
어떤 점이 어려운가.
지난 2002년에 낸 앨범 <...그리고 김현철>으로 한창 활동하고 있는 중에 결혼 발표 기사가 났어요. 15만장까지 잘 가다가 그 뒤로 매기가 뚝 끊기데요. 이번에 앨범내면 유부남으로서 첫 앨범인데 장가를 가기 전과 후, 아기를 갖기 전과 후는 외부에서 보는 시각차도 다르고 저로서도 편차가 만만치 않아요. 정말 결혼은 뮤지션에게는 또 다른 인생인 것 같습니다. 아티스트는 계속 날카로워야 하고 문제투성이고 자기 얘기를 해야 되는데, 결혼 후 가정을 갖게 되면 그럴 수가 없잖아요. 원만해야 되죠. 당연히 이중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2002년 이경은씨와 결혼해 현재 두 아이, 네 살 이안과 한살 정안을 두고 있다)
신보의 방향은 어떻게 잡고 있나
방향은 잘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좋죠 뭐. 다만 근래 들어 포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요. 포크는 통기타음악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표현세계가 풍부한 음악이죠. 최근 잭 존슨(Jack Johnson), 제임스 블런트(James Blunt)와 같은 네오 포크 뮤지션들이 눈에 띄더군요. 어쿠스틱 개념의 록이든 발라드든 그런 스타일이 가슴에 와요. 아마 포크의 정적(靜的)인 느낌이 가슴에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은 저한테도 맞고, 지금의 우리 음악계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저로서는 '기름기'를 빼는 게 목표입니다.

제 앨범을 샀던 분들도 30대로 가고 있어요. 저 또한 이제는 새로운 구매층, 젊은 팬들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죠. 그러니까 저는 30대인 그들의 얘기를 해야 하고, 또 해보고 싶어요. 당연히 가사가 고민인데 옛날처럼은 곤란하죠. 소재는 같더라도 주제의 깊이를 획득해야 한다고 봅니다. 같은 사랑얘기를 해도 풋풋함이 아닌 여문 얘기를 해야죠.
그 많던 팬들이 줄어들고, 관록이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 음악계 풍토에 섭섭한 점은 없는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악계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어요. 음악계가 이래야 한다고 원래 법으로 정해놓은 게 있나요? 경험이 우대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본디 우리 사회가 빨리 가는 것을 좋아하고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해서 그런 거죠. 음악인으로서 불만이 아닌, 이런 국민적 분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창작 뮤지컬 <더 플레이>의 작곡을 맡았는데.
<더 플레이>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17만 명 관객을 동원한 흥행이 어느 정도 된 작품이에요. 전 지난해 <캐츠 포에버>에 몇 곡을 쓴 것밖에 뮤지컬 경험이 없지만 연출가가 제 음악이 맞을 것 같다고 요청해왔죠. 선배 동료 후배로 이뤄진 작곡가 모임 5인이 함께 음악제작에 참여하고 있죠. 강호정씨가 음악감독이고 전 프로듀서입니다.
최근 흐름도 그렇고 나이를 감안해도 그렇고 뮤지컬은 알맞은 선택인 것 같다.
뮤지컬은 카메라의 전방위와 달라 좁은 무대에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고 그래서 예술적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죠. 강점은 영화와는 다른 비주얼의 극치이자 음악의 극점이라고 봅니다. 전 직접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옛날부터 해보고 싶었죠. 보고 듣고 공부하고 따고 그랬어요. 자신감을 얻었던 것은 아바의 <맘마미아>, 퀸의 <위 윌 록 유>와 같은 뮤지컬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서였어요. 사실 요즘 쓰는 곡들은 뮤지컬 스타일입니다.
뮤지컬도 그렇지만 최근 키즈 팝(kids pop)이란 장르도 실험중이다. 앨범도 벌써 두장이나 발표했다. 아이들의 대중음악을 확립하려는 시도인 줄은 알지만 불가피하게 기존의 동요계에 대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실 동요라는 말이 있는 나라도 별로 없어요. 키즈 팝의 출발은 '왜 동요는 클래식밖에 안되는 것이어야 하나'라는 의문이었지요. 가사 면에서 특히 그렇고 사실상 동요 부르는 아이는 커서 성악가가 됩니다. 동요는 한마디로 아이들 사이에서 불려지는 노래가 아니라 실제로는 '아이를 가르치는 음악'이라는 거죠. 이걸 바꾸고 싶었습니다.
아이들 음악에 원래 관심이 많았나. 얼핏 결혼해서 아이를 갖다보니 필요성을 느꼈을 거라고 봤다.
아이를 키우면 당연히 교육을 생각하게 되죠. 그렇기도 하지만 애들의 음악도 사실 무척 다양해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의 음악은 아이들이 열광하지만 어른들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죠. 분명 아이들 음악인데도 음악적으로 또 시장에서 결코 홀대되지 않죠. 그런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음악을 하고 싶었죠. 장가 가보니 지금 안하면 못할 것 같았어요. 이 (아이들 음악) 시장은 무시할 수 없어요. 공연도 많고 뮤지컬로 올릴 수도 있고... 2004년 < Love Is... >와 올해 < When I Grow Up > 두장의 앨범을 냈지만 앞으로도 계속 낼 겁니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퓨전 재즈 터치라는 그릇은 유지해왔지만 김현철은 그 그릇을 CD라는 상에만 올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1989년 첫 앨범에 이어 숨 가쁘게 질주했던 1992년에는 2집, 퓨전 재즈 팀 야사(Yasha)와 함께 영화 <그대안의 블루>의 스코어 앨범을 내놓는다. 영화음악 작업은 1994년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 2000년 <시월애>로 이어진다. 뮤지컬과 키즈 팝으로 대변되는 영토확장의 욕구가 실은 오래전에 구동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93년 3집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의 '달의 몰락'이 시장을 강타하면서 그는 재능 있는 뮤지션에서 일약 스타로 비상한다. FM 디스크자키로 분했던 것도 이 덕분. 이후 표절시비 등 우여곡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999년 7집 <어느 누구를 사랑한다는 건 미친 짓이야>가 시장에서 실패하기 전만해도 그의 스타덤은 하강을 모를 것처럼 견고했다.
2000년에는 문화부에서 주는 '오늘의 젊은 작가상'도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2002년 동료뮤지션과 꾸려낸 8집 <...그리고 김현철>은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김현철의 존재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역작이었다.
알려진 대로 뮤지션 가운데 처음 만난 사람이 듀오 팀 '어떤 날'의 조동익씨 맞나.
그래요. 고교 때 열렬한 '어떤 날'의 팬이었죠. 김수철 선배의 공연에서 게스트로 선 것을 보고 공연이 끝난 뒤 인사를 했고 며칠 뒤 동익이 형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찾아갔어요. 황홀했죠. 삼겹살 파티가 벌어졌고 그날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씨 그리고 박학기를 처음 만났습니다. 나중에는 한 카페에서 들국화의 최성원씨를 만났고 노래를 불러보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나중 박학기가 부른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를 노래했어요. 음반취입은 이 과정에서 이뤄졌습니다.
'달의 몰락'은 크게 성공했지만 실망했다는 팬들도 많았다.
음악 팬들은 흔히 남들이 잘 모르는 뮤지션을 혼자 알면 우월감을 즐기다가고 나중 그 뮤지션을 다들 알면 애정을 식히는 경향이 있죠. '달의 몰락'은 지금 들어도 그렇게 실망할 곡은 아닌데 아마도 1집 이후 신비감 같은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너무 알려져서 그런 거죠. 80만장이나 나갔으니까요. 게다가 그때 TV에 출연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달이 뭔지 아세요? 여기서 달은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좋아하는 다른 남자를 비유한 거예요. 달의 몰락은 그 남자의 몰락이죠. (웃으며) 질투와 시기가 담긴 곡이죠.
1999년의 7집은 왜 그리 반응이 저조했다고 보나.
미국 뉴욕에서 유명한 세션맨을 불러 녹음한 야심작이었습니다. 몇몇은 잘 된 곡이라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전체적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죠.
지금까지의 앨범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것은.
8집 <...그리고 김현철>입니다. 동료뮤지션들과의 앙상블이 괜찮다고 봐요. 평가가 좋은 1집은 이제 좀 창피합니다. 너무 잘난 척한 것 같아요.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아는 느낌이 보입니다. 솔직하게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확대해서 그려냈다는 거죠.
영향을 받은 뮤지션과 앨범을 꼽는다면.
우리 아티스트는 상기한대로 '어떤 날'이구요. 서구 인물은 역시 어떤 날도 영향을 받은 팻 매스니(Pat Metheny)죠. 감성적인 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거의 모든 곡을 입으로 따라 할 정도였으니까요. 저의 최고 앨범도 그의 < First Circle >입니다. 리 리트너(Lee Ritenour),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퓨전 쪽에 쏠리긴 했지만 이글스(Eagles), 퀸(Queen), 레드 제플린(Red Zeppelin)의 록도 정말 좋아했어요. 곡 하나를 꼽는다면 이글스의 'I can't tell you why'입니다.
자신의 곡 중에는 어떤 게 흡족한가요.
5집 <동야동조>에 수록된 '그렇더라도'와 7집의 '이 길은 언제나'가 맘에 들어요. 아내에게 바친 곡인 8집의 'Loving you'도 괜찮은 것 같아요. 다른 가수에 준 곡으로는 이소라의 4집에 있는 '제발'이 제일 나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현철의 음악이 대중에게 무엇을 의미했다고 보나. 이 질문을 뮤지션들에게 했더니 상당수가 위로, 산울림 김창완의 경우는 자신감 부여라고 하던데.
글쎄요. 제가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굳이 말로 하자면 '누림' 아닐까요. 첫 앨범을 냈을 때부터 한창 뛰던 '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가 좀 살게 되면서 제 음악, 과거 같으면 붙기가 어려운 음악이 수용되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봅니다.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진 거죠. 만약 우리나라가 그렇지 못했다면 제 음악이 대중화되지는 않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