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하러 가는 기분은 무거웠다. '은퇴를 선언한 심경'은 하고많은 인터뷰 주제 가운데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내용이기 때문. 정말로 신중현은 지난 6월 “이제는 음악계 현장을 떠나겠다!”는 말로 은퇴를 기정사실화했다. 7월1일로 예정되었다가 폭우로 인해 7월15일로 연기된 단독 공연의 타이틀도 '라스트' 콘서트였다.
은퇴선언과 함께 그는 20년 동안 집무실이자 거처였던 서울 문정동 소재의 '우드스탁' 사무실도 폐쇄하고 경기 용인 양지면의 한적한 곳에 '신중현 MVD'라는 이름의 새 공간을 마련했다. 속세를 떠나 그동안 못했던 음악을 혼자 즐기며 말년을 보내기 위한 쉼터이자 일터인 셈이다. 그곳을 찾아가는 마음은 왠지 모르게 편치 않았지만 전화로 친절하게 위치를 설명해주고 “근처에 오면 집밖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씀에 긴장감은 사라졌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들어가서 차 한 잔 하시죠.” 당대의 음악거목이자 어르신이지만 그는 웬만해선 음악관계자들에게 말을 놓지 않는다. 편하게 말씀하시라고 몇 번을 주문해도 끝까지 존대어를 유지한다. 집은 한창 수리 중이었다. 목재와 기구들, 악기와 음향기기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손수 집을 지으시는 거냐고 묻자 선생은 “혼자 하니까 다 지으려면 한 5년은 걸릴 거예요.”라고 말했다.

(잠깐 숨을 들어 마시더니) 사실 할 데가 없어요. 음악을 할 공간과 기회가 없는데 붙어 있어서 뭘 하나요? 아예 은퇴를 공표하고 떠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나만의 조용한 자리를 찾아 정리해야죠. 그리고 이렇게 나이 든 사람이 버티고 있는 모습도 보기 안 좋잖아요. 후배를 위해서라도 자리를 내줘야지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일부에서도 동의하는 말이지만 은퇴라는 언어 속에는 우리 음악계에 대한 섭섭함도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내 음악, 록 음악 그리고 과거의 모든 음악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잊혀져가니까 관계자들이 안타까워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요. 그래요. 섭섭하죠. 답답해요. 아무리 뭘 해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요. 그동안 정말 지옥 같은 심정이었어요. 무슨 수가 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일단 자리부터 여기로 옮긴 거예요.
재정적으로는 괜찮으신가요. 보니까 공식적인 활동은 아니더라도 여기서도 음악은 계속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전 하나도 돈 못 벌었습니다. 여전히 빚만 2억 원 정도 됩니다. 음악인이니까 은퇴를 해도 음악은 해야죠. 여기에서 인터넷 방송을 해볼 생각이긴 하지만 돈 버는 것은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도대체 음악 해서 지금 얻을 게 뭐 있겠습니까? 인터넷이니 뭐니 해도 돈은 막연한 얘기지요. 그냥 하는 겁니다.
은퇴라고 해서 영원히 음악과 끝은 아니다. 어렸을 때 마냥 좋아서 기타를 잡았을 때 그랬듯이 혼자서라도 또 언제든 음악을 할 수 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신중현은 사무실에 라이브를 할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을 만들어 인터넷 방송으로 수요자들에게 노익장의 음악을 들려줄 계획을 가지고 있다. 당장 라스트 콘서트도 있고, 그것에 이어 전국의 팬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순회공연도 잡혀 있다. 은퇴를 선언한 뒤 오히려 바빠 보인다.
사실 인터뷰 다음 날인 7월4일에도 KBS 1TV의 <콘서트 7080>에서 마련한 '신중현 스페셜 헌정공연' 녹화가 있다고 밝혔다(방송은 7월29일). 은퇴라는 말로 인터뷰의 운을 뗀 것이 숙연한 듯해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 공연으로 화제를 돌렸다. 역시 무대와 음악 얘기로 들어가니까 무거웠던 자리는 일순간 밝아졌다. 전에도 수차례 뵌 적이 있지만 이날처럼 즐겁고 신나게 대화를 풀어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그간 여간해서는 텔레비전에서 연주하고 노래하지는 않으셨는데. 이번이 TV편 라스트 콘서트겠네요.
그렇게 되겠지요. 주저했지만 저의 마지막 공연 모습을 TV에서도 보여주는 것이 팬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 출연을 결심했어요. 또 프로그램 이름이 '7080'인데 전 솔직히 '6070'이잖아요.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나가서 '6070'음악의 진수를 보여줘야겠다는 뜻에서 출연에 응했죠. 방송에서 노래한 게 한 20년도 넘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시청자 입장에서는 마지막인데, 뭔가 보여주셔야죠.
보여줄 게 있어요. 그동안 제가 음악에 대해 고민하고 느낀 것을 창법으로, 연주로 공개할 생각입니다. 노래하면 사람들은 목으로 하는 것으로 알지요. 하지만 창법은 몸에서 나는 소리로 해야 합니다. 목청만이 아니라 목, 눈, 다리를 다 써서 하는 거예요.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창법인데, 지르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집어넣어 노래하는 것으로 여기면 됩니다. 소리의 확대는 기계 즉 마이크가 하는 거죠. 그리고 그동안 가다듬은 기타의 주법도 보여주려고 해요. 약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 중에서 세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스타일인데 여러 가지 의미에서 '3, 3 주법'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아마 세계에서 나밖에는 못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겁니다.
라스트 콘서트는 날짜는 물론, 문학경기장에서 인천 송도 야외 특설무대로 장소도 옮기게 됐는데 우여곡절도 있고 의미도 있는 만큼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니까 선생님 이름으로 한 콘서트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라스트나 마나 그동안 제대로 한 공연이 뭐 있었나요.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트리뷰트 공연, 힐튼호텔 공연, 세종문화회관 공연 등 근래 와서 큰 거 세 번 정도 하긴 했지만 그전에는 거의 없었죠. 마지막이니까 저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해요. 공연 초반 게스트 순서를 지나서는 혼자서 24곡을 내리 연주하려고 합니다. 좀 벅차지만 자신은 있습니다.
게스트 중에는 선생님의 세 아들도 출연한다면서요.
아들 셋이 모두 음악을 하니까 모처럼 부자 합동 무대를 마련했어요. 하지만 라스트공연에만 그렇고 그 뒤 순회공연에서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신중현의 세 아들 대철, 윤철, 석철은 모두 아버지처럼 록 음악을 한다. 미8군 시절에 만나 결혼한 아내 명정강씨도 당시 여성그룹 '블루리본'에서 드럼을 연주했으니 가족 전체가 음악을 하는 음악집안인 셈이다. 첫째 아들 신대철은 1980년대에 아버지 음악보다 더 강한 록 이른바 헤비메탈을 국내에 소개한 그룹 '시나위'의 기타리스트이자 리더로 지금도 그 밴드를 이끌고 있다. '시나위'는 그동안 임재범, 서태지, 김종서 등 1990년대를 주름잡은 스타들을 잇달아 배출, 팬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이다. 둘째 아들 신윤철 역시 기타리스트이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가 2년 전에 결성한 밴드 '서울전자음악단'은 광(狂)팬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막내 석철은 '서울전자음악단'의 드러머이기도 하면서 여러 가수의 앨범에서 드럼을 연주하는 명 세션맨이다.
아들 셋이 모두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음악을 하는데, 아버지처럼 모두 이 땅에서는 힘든 록을 하잖아요. 아버지로서 조금 미안하지는 않으신가요?
좋아서 하는 음악인데요, 뭘. 미안한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어요. 다들 지금 과정에 있지요. 아직 더 해봐야겠죠. 음악계가 뭐라 말하기도 어려운 극심한 침체의 상황이라서 무지 애쓰고 있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순간을 맞이할 것으로 봅니다.
1938년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태어난 신중현은 전쟁 직후 서라벌고등학교를 다니던 1955년, 학교를 그만두고 옷이 없어 교복을 입고 미8군 공연 팀의 조수로 부대를 출입하게 되면서 음악계와 공식 선을 댔다. 국내 무대가 아닌 동두천 미8군 쪽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은 중학교 때부터 전기기타 연습에 몰두하던 그의 실력을 알고 기타를 배우고자 했던 한 무용수의 소개에 따른 것이었다.

신중현 선생님의 앨범은 1963년에 결성해서 이듬해 출반한 애드포(ADD4) 앨범이 처음인 줄 알았는데 그 이전에 이미 독집을 내셨군요.
이 앨범은 1958년에 나왔어요. 제 나이 스무 살 때였죠. 1956년부터 8군 무대에 섰는데 이듬해에 이름이 났고 그러자 8군 측이 앨범을 내준 거죠. 제 음악활동경력을 올해로 50년이라고 한 것은 이 시점이 기준입니다. 앨범의 반주는 함께 했던 쇼 단의 어른들이 해주었구요. 음악은 '봄처녀'와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과 같은 국내외 동요를 기타 솔로로 연주한 것들이었죠. 당시 음악은 재즈 스타일이었습니다. 재즈전문지 <다운비트>를 열심히 봤던 시절이고 거기서 늘 최고 연주자로 꼽히던 바니 캐슬, 웨스 몽고메리, 짐 홀과 같은 재즈 기타리스트들이 제 초기 영웅들이었죠.
미8군 때의 이름은 '재키'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히키'였나 봅니다.
재키라는 이름이 더 유명했어요. 이 앨범을 냈을 때는 히키로 불렸을 뿐입니다. 히키든 재키든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고 미군들이 다들 그렇게 부르더라구요.
그 때 어떻게 미군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게 됐는지를 듣고 싶습니다.
8군에 출연했던 밴드는 미군들이 춤추기 위한 음악을 잘 연주해야 했어요. 어떤 때는 연습 없이 새로운 악보에 맞춰 현장에서 알아서 바로 기타를 쳐야 했죠. 분위기를 파악해 한번에 연주해내야 한 건데요, 여기서 미군 관객들에게 어필했습니다. 조그만 키에 드럼 옆의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앉아 연주를 해도 알아보고 '기타 솔로! 기타 솔로!'하며 아우성을 치는 거예요. 매번 그러니까 클럽 매니저에게 연주 중간에 기타 솔로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죠. 그랬더니 클럽 미군 책임자가 절 데려가서는 주크박스에서 45회전 싱글 즉 도너츠 판 3장을 꺼내주더라구요. 사무실에서 이것을 듣고 밤새도록 따서 연습을 한 거죠.
신중현은 1960년, 나이 스물 둘에 미군 정보부 소속 요원들이 출입하는 용산역 건너편의 '시빌리언 클럽'에서 마침내 기타 솔로 즉 기타 독주공연을 갖기에 이른다. 미국도 아닌 한국에서 본토의 최고연주자 못지않은 출중한 기타연주를 과시한 키 작은 한국인에게 미군들은 넋을 잃었다.
“연주를 끝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요. 떨려서 인사를 못하겠더라구요. 옆에서 연주한 선배가 툭툭 치면서 고개 들고 앞을 보라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군 전원이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월급이 3천원에서 7천원으로 올랐고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져 며칠 만에 단장이 받는 월급 수준인 2만4천원으로 뛰어올랐습니다. 이때부터 플로어 쇼를 하기도 전에 미군들은 '위 원트 재키(We Want Jacky)! 위 원트 재키!'하고 외치며 난리였죠. '재키를 모르면 미국 놈 아니다!'라는 말도 퍼졌으니까요.”
말씀 하시는 것을 들으니까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었겠네요.
(웃으며) 제가 너무 정신없이 떠들고 있나요. 그래요. 나중 가수들을 키우고 제 히트 곡을 냈을 때보다 이 시절이 더 즐거웠고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쇼가 끝나면 늘 미군들은 저랑 악수하려고 길게 줄을 섰죠. 마치 꿈과 같은 순간들이었어요.
그런데 미군들이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나요. 결국은 전쟁 때문에 먼 이국땅으로 온 건데 그렇게 음악에 열광했다는 사실, 미8군 클럽이 늘 관객으로 꽉꽉 찼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군인이지만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미국의 문화를 지키러 왔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특히 미국 음악하면 목을 맵니다. 나중에 인기 최고였던 영국의 비틀스 음악을 하니까 싫다며 미국 음악을 연주해달라고 하더군요. 정말 5시 퇴근시간만 되면 칼 같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클럽으로 떼를 지어 몰려옵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주크박스를 틀고 쇼가 열리기도 전에 흥을 내고 있는 거예요. 막상 쇼는 7시30분 정도나 되어야 열렸거든요. 저도 놀랄 만큼 미군들은 음악을 좋아했고 특히 기타 솔로에 열광하더라구요.

클럽에 출입하는 군인들의 계급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계급에 따라 대체로 셋, 그러니까 장교들이 출입하는 '업소스' 클럽, 상사와 병장이 주를 이룬 '엔시오'클럽, 하급병사들이 출입했던 '에어맨스'클럽으로 나뉘었고 당연히 음악도 달랐어요. 업소스는 품위가 있는 스탠더드 음악, 엔시오는 미국 텍사스의 토속적인 컨트리음악, 에어맨스는 로큰롤이나 트위스트를 해야 했죠. 잘못하면 분위기가 안 맞아 야유를 받기도 했어요. 이런 저런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음악을 접해야 했습니다. 음악을 듣지 않으면 끝이었죠.
당시 국내 출연 밴드들에 대한 미8군 측의 대접은 어떠했나요. 한국의 연예인이라고 은근히 무시하지는 않던가요.
그렇지 않아요. 출연 밴드들이 조명 의상 등 일체 무대도구들을 차에 실고 다녔어요. 서울 원효로 사무실에서 떠나 동두천 부대에 도착하면 정문에서부터가 달라요. 엔터테이너 하면 그들은 늘 최고로 쳐주더라구요. 차가 도착하면 미군들이 짐을 같이 내려주는 것을 비롯해서, 샤워도 마련해주고 식당으로 데려가 뷔페식으로 늘 융숭하게 대접해주었습니다. 생전 못 보던 고급 미국음식을 다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못살던 시절이라 우리 출연자들 중에서는 음식이나 기물을 몰래 빼가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들 그러니까 미군 측이 혀를 내둘렀지만 그렇다고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어요.
8군 무대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는 1960년대 초반, 음악을 제대로 하고 싶어 해군 군악대장을 역임한 이교숙 선생으로부터 사사를 받는다. 화성학 공부에 들어가 벌써 곡 쓰기에 재능을 발휘하자 이교숙 선생은 그더러 작곡 쪽으로 진로를 잡으라고 권고한다. 그가 작곡을 비롯한 음악공부에 매달린 이유는 미8군 아닌 국내 일반무대의 음악수준이 낮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게다가 미8군 클럽은 어느덧 인기 측면에서 사양길에 놓여있었다. 국내 일반무대로 나가 “한국의 대중음악을 확 바꾸어 놓아야겠다!”는 포부를 굳혔다. 신중현은 그 당시를 개척자의 정신이었다고 술회한다. 그리하여 미8군을 나온 그는 1963년, 일반무대 진출을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단행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록그룹이라는 영예가 주어진 '애드포'의 결성이었다.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동두천 논밭 중간에 있는 독채에서 멤버들과 연습하며 꿈을 키웠지만 멤버나 음악이나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서울에 온 즉시 그는 팀을 해산했다. 몇 개월 후 다시 멤버를 모집, 당시 힘깨나 쓰던 한 쇼 단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노래와 연기를 곁들인 종합예술 즉 '패키지 쇼'에 나섰고 1964년 겨울에는 대망의 밴드 첫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비록 음반은 나오자마자 죽었지만, 나중 공연 부문에서 '신중현 리사이틀'은 언제나 인기품목이었다. 주 무대는 현재 세종문화회관 자리였던 시민회관이었고, 1970년대 전후로 시민회관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며 미8군에서 그랬듯 무대의 히어로로 홀연히 부상한다. 신중현은 당시 무대를 현란한 사이키델릭 조명을 비롯한 세트 전체가 질서의 전복이었다며 여기에서부터 국내 무대의 조명문화가 획기적 진전과 혁신을 이뤘다고 즐겁게 회상한다. “그때는 세상에서 내가 최고인 줄 알았어요. 외국의 명 기타리스트인 지미 헨드릭스가 뭐고 에릭 클랩튼이 뭐야 했으니까요.”
애드포의 결성이 1963년이고, 비틀스가 미국을 정복한 때가 1964년 이른 봄이었으니까 한국과 미국의 록그룹 열풍시기가 비슷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비틀스보다 시점이 빨랐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자랑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외국의 음악동향을 체크하고 계셨나요.
미8군에 있을 때부터 록그룹 붐이 일었어요. 하지만 애드포의 결성은 비틀스의 영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우리들 식의 록을 하겠다는 의지였죠. 그룹을 만들어 한창 연습할 때 비틀스란 그룹이 영국을 강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우리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죠. 애드포 앨범을 내고 신중현 리사이틀에 한창일 때는 영국그룹들이 미국을 완전 장악했고 국내에서도 너도나도 비틀스, 애니멀스, 롤링 스톤스 곡을 따라 연주했습니다. 저는 이미 록 밴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음악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수월했고 또 능동적이었죠. 밴드가 없었다면 한국 록은 시기가 더 늦춰졌을 거라는 얘기에요. 전 이게 애드포의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이라고 여깁니다.
나중 1970년대 들어 '안녕하세요'를 불러 크게 히트시킨 여가수 장미화가 애드포의 1964년 첫 앨범의 멤버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건가요?
아까 말했듯이 패키지 쇼는 종합예술의 개념으로 노래와 무용을 겸하는 여성 멤버가 꼭 필요했어요. 그래서 쇼 단장이 방송 노래경연대회에서 입상한 재능 있는 신인이라고 소개하면서 장미화를 데려왔어요. 애드포에 그의 노래를 넣어달라는 거였죠. 그래서 맨 끝 2곡에 장미화가 부른 '굿나잇 등불을 끕니다'와 '천사도 사랑을 할까요'가 수록되게 된 겁니다.
최초라는 이점이 있었는데도 애드포는 역사에만 존재할 뿐 당대에 대중적 성공은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다고 보십니까.
전혀 홍보가 안됐어요. 공연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반응이 없어서 애드포를 해산하고 먹고 살 길을 찾아 다시 8군으로 들어갔으니까요. 당시에 록은 분명히 하기 어려운 음악이었죠. 국내 대중의 취향은 남진 나훈아의 트로트였고, 어른들은 패티김과 최희준을 들었습니다. 대학생들은 팝송에 취해있었고. 분명 자리 잡기가 쉬운 음악은 아니었지만 TV에 나온 가수들처럼 홍보가 좀더 잘됐더라면 사정은 좀더 나아졌을 겁니다. 전 록을 하더라도 대중과의 접점을 항상 의식했으니까요. 이게 조금 아쉬웠죠.
애드포만 그런 게 아니었다. 1966년에 결성한 그룹 '덩키스', 1970년에 결성한 '퀘스천스'와 '신중현 빅밴드' 그리고 1972년의 '더 멘' 등 만드는 그룹마다 신중현은 대중으로부터 실력에 상응하는 반응을 얻지 못했다. 록이 소음이라는 매스컴과 대중의 인식, 그리고 '음악적으로 극을 달리는 음악'이라는 본인의 말마따나 타협 없는 실험적인 자세도 일련의 밴드가 어필하지 못한 원인이었겠지만 거기에는 열악한 홍보 상황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밴드의 불우를 메워준 것은 '가수 프로듀서'로서의 위력이었다. 펄 시스터스, 김추자, 박인수, 장현 등 그의 곡을 받은 가수들은 거의 예외 없이 스타덤을 질주하며 당대를 풍미했다. 이들의 앨범은 흥행을 위해 '신중현 작, 편곡집'이란 타이틀을 내걸곤 했으며 언론은 이들에게 '신중현 사단'이란 영예로운 호칭을 붙여주었다. 국내 일반무대로 진출해 처음 누려보는 성공이자 환희였다.
신중현 사단의 가수들 중에서는 펄 시스터즈와 김추자가 손꼽힙니다만 첫 사례는 이정화였다면서요. 아까 말씀하신 장미화가 아니라 왜 이정화가 첫 가수가 되는 건가요.
장미화는 단장이 소개한 케이스고 이정화는 그룹 덩키스를 만들면서 여가수가 필요해서 제가 직접 픽업했기 때문입니다. '봄비'는 박인수 노래로, '꽃잎'은 김추자 노래로 알려져 있지만 이정화가 먼저 불렀죠. 하지만 반응은 없었어요. 기다려봤는데도 소득이 없자 이정화는 월남 붐을 겨냥해 거기서 활동하기 위해 월남으로 가버렸죠. 그 뒤로 소식을 모릅니다.
펄 시스터즈와 김추자가 그 뒤였군요.
저도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아 덩키스를 해산하고 월남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 부근에 펄 시스터스가 찾아왔는데, 창법과 곡 해석 등을 사사했죠. 흡수력이 굉장했고 서로 다투듯 경쟁했던 자매로 기억합니다. 펄 시스터즈 음반은 월남을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덩키스와 기념음반으로 제작했어요. 결과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죠. 이 상황은 제가 김추자에게 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만든 것이 증명해줍니다. 그랬는데 펄의 '님아'가 예상외의 빅 히트를 친 거예요. 거리에서마다 사람들이 '님아! 님아!'를 합창했어요. 그 바람에 월남도 못가고 8군도 가지 못했죠. 그 뒤로 김추자 박인수 장현 임아영 김정미가 이어졌습니다.
자료를 보니까 비단 신중현사단이 아니더라도 곡을 준 가수가 부지기수더군요. 선생님과 결부된 또 다른 가수로는 누가 있습니까.
1970년대 들어 작곡자로 잘나갈 때는 참으로 많은 가수와 제작자들의 부탁을 받았어요. 일일이 기억하기가 어려운데 우선 아까 말한 장미화가 있고 김추자 전에 김상희 음반도 만들어줬죠. 윤수일과 함중아가 몸담은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그룹도 제가 만든 거예요. 윤수일에게는 1979년인가요, '나나'를 써주었어요. 댄스가수 김완선이 1989년에 불러 히트한 '리듬 속의 그 춤을'도 제 곡입니다.
조금 짓궂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곡을 주고 키워준 가수 중에 여가수 그것도 미모의 여가수들이 참 많았는데 스캔들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가수를 대하는 자세가 좀 냉정했던 것 같습니다.
전 오로지 가수들이 '내 음악성을 얼마나 표현하느냐' '얼마나 잘 불러주느냐'만을 생각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스타가 되느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늘 가수들에게 그랬어요. '나한테 올 때는 음악성 외에는 생각하지 말라'구요. 음악이 되고난 뒤 스타가 있고 명예가 있는 거죠. 가수들도 잘 따라주었습니다. 스캔들이 날 리가 없었죠. 한마디로 무서운 선생님이었습니다. 비집고 들어올 사적인 영역은 아예 차단해버렸습니다. 일례로 임아영은 판 내고 다른 가수를 가르치고 있으니까 엉엉 울고가버렸습니다. 제 음악 발전만을 생각하고 새로운 것만을 실험하니까 스타덤을 바라는 가수 입장에서는 제 음악이 어려웠겠죠. 지금 생각하면 1971년에 온 김정미의 경우는 어려운 것만을 주문해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신세대 음악 팬들이 당대에 잘 알려지지 않은 김정미의 음반을 많이 찾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김정미는 제가 잡혀가기 전에 밴드 '엽전들'을 해산했을 무렵, 유일하게 남은 가수거든요. 대중성을 떠나 다분히 실험적인 곡들 예를 들면 '햇님' '봄' '바람' 등을 써주었죠. 거의 잡아놓고(?) 강압적으로 임했는데도 김정미는 좋아했어요. 독집 음반을 만들기는 했지만 시중에 내놓지도 못했죠. 그런데 근래 인터넷에서는 김정미 음반을 가장 많이 찾아요. 결국 음악은 시간이 걸려도 음악성이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을 다시금 느낍니다.

전 돈을 몰라요. 지금도 그렇고 옛날에도 그랬어요. 음악을 할 때 돈은 아예 신경 쓰지도 않았습니다. 가수한테 쓴 커피 한잔 얻어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작곡료도 별반 많지 않았어요. 전 오로지 음악을 한다는 게 좋았을 뿐입니다.
'잡혀가기 전에'라는 말이 웅변하듯 신중현의 음악이력은 작곡자와 프로듀서로서의 화려한 영광을 뒤로 한 채 박정희 유신시대에는 통제의 굴레 속에서 들이닥친 갑작스런 수난으로 돌변한다. 1972년 유신 바로 직전, 청와대에서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달라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는 괘씸죄에 걸려 공연 때마다 경찰의 단속을 당하는 등 정권차원의 시달림을 받게 된다.
게다가 그룹 '더 멘' 시절, 독재자에게 바치는 것이 아닌 나라와 국민을 위한 곡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어 부르자 대표적 반골로 찍히기에 이른다. 1974년 전국을 강타한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대박도 잠시, 가요규제조치와 함께 금지곡으로 묶여버렸고 엽전들의 2집은 금지를 피하기 위해 국민가요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오자마자 통째로 금지를 당했다. 아마도 가요역사에서 '엽전들'만큼 영광과 오욕이 그토록 갑작스럽게 교차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억울한 나머지 심의위원회를 찾아가 왜 금지됐는가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이유 없는 무조건의 금지'였다. 잠시 후인 1974년 12월, 신중현은 대마초 조달책으로 지목되어 남대문시장 여성회관 지하로 끌려가 4개월간 수감되면서 무진 고문을 당했다. 신중현의 음악인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중현만이 끝이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의 자유가 압사당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 시절과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러 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수차례 인터뷰를 통해 이미 익히 알려져 어떤 답이 나올지 압니다만 아직도 유신시대의 억압을 용서할 수 없는 건가요.
전 이후 최악의 상황에 빠졌습니다. 저의 음악작업을 못하게 한 것은 목숨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음악인 더러 음악을 하지 말라는 것이니 사형선고 아닙니까. 너무나 잔인했습니다. 그런 시대와 어찌 화해할 수 있겠습니까. 생사람을 잡은 거죠. 아는 게 음악밖에 없는데 음악을 할 수 없다면 그건 죽음이지요.
수감되기 전 전국을 메아리 친 '미인'은 가요규제 조치의 본보기로 방송 및 판매금지를 당했습니다. 그 순간 기분이 어땠나요.
분노나 화가 아니라 감각이 없어지더라구요. 정말이지 아무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혔던 거죠.
그 뒤 사실상 5년간 활동금지가 따르게 되는데 어떻게 그 긴 세월을 보내셨는지, 과연 음악은 계속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음악을 어떻게 합니까. 소일 그 자체였죠. 할일이라곤 술 먹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것도 혼자요. 1975년인가요, 한번은 다방에 갔는데 함께 연주하던 동료들이 모여선 들리는 소리로 '이제 신중현은 끝났어!'하면서 비꼬더라구요. 다방에서 커피 마시고 하릴없이 길 걷다가 집에 들어가는 무미건조한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한번은 프로모터가 나를 보호해주겠다며 한국인은 출입할 수 없는 미군부대의 장교클럽에 출연을 알선해주었습니다. 4개월 정도 했는데 혼자서 기타를 연주하다보니 별 생각이 다 들고 너무도 내 자신이 처량했어요.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죠.
신중현은 1980년 금지에서 풀려 9인조 대형밴드인 '신중현과 뮤직파워'를 결성하며 재기의 의지를 다지지만 어느덧 세상은 변해있었다. 주류 음악은 디스코로 헤게모니가 넘어가 밴드들도 디스코를 연주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고, 방송국은 흘러간 트로트를 연일 내보내면서 음악유행의 방향은 새로움 아닌 복고로 바뀌어있었다. '아름다운 강산'을 리메이크해 내놓았지만 잠깐 호응을 얻었을 뿐 실적은 거의 전무였다. 한때 시대를 호령하던 그의 록은 옛날 음악으로 치부돼버렸다.
“5년 공백을 겪다보니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잊어버렸어요. 더구나 디스코 장은 댄스음악이 범람했고 우리 밴드가 출연해 연주를 하면 '발이 안 맞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았어요. 록 음악에 왜 춤을 못 춥니까? 일할 데라고는 나이트클럽 밖에 없는데 가는 곳마다 그러더라구요. 한번은 직원이 대놓고 저한테 '그 연주에 손님들이 춤을 출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라고 하길래 바로 짐 싸고 내려와 버렸어요. 다시 완전 실업자 신세로 돌아갔지요.”
음악이라는 수족이 잘린 상태에서 신중현은 자아실현은 물론, 가정에서도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물먹은 솜처럼 의기가 가라앉은 아버지가 세 아들의 따뜻한 아빠가 될 리 없었으며 아내한테는 TV <콘서트 7080>에서 공개한 대로 '빵점짜리 남편'이었다. 그는 아내와 세 아들에게 적어도 가정적으로는 미안하고 한편으로 고마울 따름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존재의 이유인 '진정한 음악'에 대한 그의 의지와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1983년, '나와 뜻이 있으면 같이 가자'는 제안을 따른 엽전들 시절의 동료 이남이, 서일구와 함께 신중현은 산에 오른다. 우리네 사람들만이 호흡할 수 있는 토속적인 한국음악을 만들려는 의지였다.
이때의 그룹이 현재 마니아들의 앨범 구매욕을 자극하고 있는 '신중현과 세 나그네'였다. 앨범의 곡도 '내', '길', '바다' 등 대부분 자연을 다뤘다. 1980년대의 그룹 '부활'의 리더인 김태원은 이때의 음악을 '상업성이 철저히 배격된 국내 최초의 실험음악'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신중현 선생님이 추구한 음악세계는 개괄하면 한마디로 「한국적인 록」이 될 것 같습니다. 서구의 음악인 록을 토속화하려는 기념비적인 작업이었는데요, 언제부터 그러한 시도를 구상하셨나요.
록을 외국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바꿔 놓으려고 했죠. 우리 것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섰어요. 굳이 한국적인 록이라는 명칭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엽전들 시절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룹이름도 엽전이란 말을 쓴 거구요. 당시 서구 록도 국가별로 분리되어가는 경향이었어요. 미국 록, 영국 록, 이태리 록, 독일 록 등 자기네 나라 정서를 구현하는 쪽으로 갔지요. 한국 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미인'이 그렇지만 한국적인 가락을 살리는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신중현과 세 나그네' 음악은 그것을 실험적으로 더 구체화한 것이었죠.
지금까지 수많은 곡을 쓰셨는데요,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모두 영생(永生)의 가치를 발하는 곡들입니다. 하지만 신중현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하는 신세대를 위하여 꼭 들어야 할 곡을 추천한다면 어떤 게 될까요.
글쎄요. 그런 의도라면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좋지 않을까요. 가사 중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 잔치하네...' 하는 대목이 말해주듯 이 곡에는 어머니에 대한 효 사상도 담겨져 있죠. 정말 대중적인 가사죠. 대중음악은 대중정서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미인'도 그렇죠. 예쁜 여자를 보면 관심이 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남자들의 상정 아닌가요. 이런 곡을 먼저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생님의 음악 지론을 듣고 싶습니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음악이라는 것, 결코 철학이나 장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죠. 돈 벌려고 저질로 가는 것은 용납될 수 없으며, 무슨 철학이라도 하는 듯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스타일도 진정한 대중음악이 아닙니다. 제 가사를 보면 어려운 게 없어요. 간혹 의미가 연결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음(音)이 해주는 거죠. 그 음을 잘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대중음악이 하기 어려운 겁니다.
신중현은 유신시대에 대한 감정만큼이나 현재의 음악계에 대한 격한 톤의 비판으로 유명하다. 어떤 때는 거의 독설로 비쳐지기도 한다. 은퇴를 맞은 지금에도 매스컴 관계자들은 만나면 어김없이 '진정한 음악은 죽었다', '한국 대중음악은 한 방향밖에는 모른다' 등의 강성 의견을 피력한다. 인터뷰가 3시간이 지난 상황에서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무례하게도 '우리의 문제점을 딱 한 가지만 지적해주십시오'라는 부탁을 드렸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중한 훈육의 언어들이 이어졌다. 전성기 시절 가수를 키웠을 때 들었다는 무서운 선생님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가시에 찬 비판이 아니라 사랑의 매로, 한없는 애정으로 들렸으며 나아가 은퇴의 변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은퇴를 보고도 별반 반성의 기미가 없는 우리 음악계와 우리 사람들 전체가 자세를 갖추고 경청해야 할 내용이었다.
“우선 멀티 문화가 되도록 다들 노력해야 합니다. 많은 문화가 존재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은 국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노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지속되어야 강대국이 되는 거죠. 문화를 귀하게 여기고 보존하려는 자세가 없으면 강대국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과 매체가 의무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밥그릇 챙기려는 자세, 자기만 살겠다는 사고로는 곤란해요. 이제 남은 게 거의 없는 것 같아요. 하루치기들만 존재하고 있어요. 좋은 음악은 매장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문화라는 소중한 재산을 다 없애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